자아의 저주에서 벗어나길!
불면에 시달릴 때
헤어 카카오 자연의 소리 들려줘 하면
자연의 소리가 쩌렁쩌렁댄다
파도 소리가 침대 위 뱃살 위로 찰랑찰랑 댄다
강릉항 앞바다 커피섬에 게이샤 커피가
짙게 처벅처벅 대고
붉은 바다해는 저물어가는 시간을
수평선 넘어 가라앉을 때까지
뒤돌아보며 해죽해죽 된다
자갈 구르는 소리가 목침을 타고 뒷덜미를 덮친다
몽돌바다 검은 돌이 촤르르 구른다
비워내는 몸은 문지르면 문질 수록
몸이 더 단단해지고
마음의 해변 평수가 더 넓어진다
풀울음 소리가 먹다 만
요구르트병에 새끼를 치며 허북허북 댄다
어머니 쑥 캐는 소리가 풋풋하고
새벽 도마에 탁탁 도다리 꼬리 자르는
소리가 맑고
도다리 봄국에 봄날을 새끼치는 노란 날치알이
발발거린다
인간은 자아(self)를 갖춘 이성적이고 의식적 존재이다. 인간은 이성을 이용해 과학기술 발전을 이룩한 위대한 존재이다. 그 어느 동물 종도 인간의 이런 위대한 업적에 도달하지 못한다. 동물 종에게는 자아가 없고 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 종은 절대 걸리지 않는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것은 자아의 저주(curse of the self)라는 병이다. 자아의 저주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우리의 웰빙과 행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 저주 중 하나가 불면증이다. 다음날 특별한 일이 없을 때도 잠을 푹 자지 못하지만, 중요한 일이 예정되어 있을 때는 더욱 불면증에 시달린다. 긴장을 풀려고 일찍 잠들고자 애쓰지만, 결국 끊임없는 생각들로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게 자아의 저주에 시달린다.
우리 시인도 보통 사람들처럼 불면에 시달린다. 우리 시인은 이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연에게 도움을 청한다. 물론 그 자연은 ‘자연적 자연’이 아닌 ‘인위적 자연’이다. 디지털 비서인 카카오에게 자연의 소리를 요청한다. 그러자 자연의 소리가 쩌렁쩌렁한다.
쩌렁쩌렁한 자연의 소리는 시인의 몸을 덮친다. 파도 소리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시인의 뱃살 위로 찰랑찰랑 된다. 막연한 파도 소리가 구체적인 강릉항 앞바다의 파도 소리로 전이한다. 강릉항 앞바다의 파도 소리는 그곳 커피숍에서 마시던 케이샤 커피의 출렁임으로 다시 한번 전이한다. 이제 시인에게 가장 가까운 파도는 커피의 파도이다. 시인은 그 파도에서 첨벙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어느 듯 해가 저물어 노란 해는 붉은 해로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다. 붉은 바다 해는 하루 중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저물어가며 소진될 때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해죽거리고 있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하나 드러난다. 붉은 바다 해 자체가 저물어가는 시간이다. 시간이라는 추상성이 붉은 바다 해로 구체화된 것이다. 결국 그 둘은 같은 대상이다. 그런데도 붉은 바다 해는 사라지는 시간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 모습을 응시하고 있다. 시간이 완전히 저물어 사라지면, 바다 해 자신도 저물고 없을 터이다. 그저 저물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느낌이다.
자갈 구르는 소리가 시인의 목침을 타고 뒷덜미를 덮친다. 인위적인 자갈 구르는 소리는 몽돌바다의 검은 돌을 환기시킨다. 몽돌바다에서 자갈이 서로를 문지르면서 조금씩 깎이면서 자기 몸을 비워낼수록 그 몸은 더 단단해지고 있다. 모든 자갈이 갈리고 깎이면서 그 부피는 줄어든다. 자갈의 부피와 크기가 줄어들면서 자갈이 없는 모래 해변의 면적은 더 넓어진다. 시인의 눈에서, 넓어진 모래 해변은 마음이고, 자갈은 몸이다. 몸은 단단해지고, 마음은 넓어진다. 몸과 마음이 충돌하는 모습이다. 마음은 푹 자고 싶다는 희망을 품는다. 그런데 몸은 더 굳어지면서 마음의 소박한 희망을 들어주지 않는다. 결국 불면이다. 불면의 가장 큰 문제는 마음이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자고 싶다는 희망을 품는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과 희망은 그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언어를 통해 구축된다. 마음속으로 자고 싶다는 말을 한다. 그것이 자고 싶다는 생각이고 희망이다. 우리 몸은 원래 언어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다. 우리 십대들이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잘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 십대들도 부모님이 하는 잔소리가 자기를 위한 것이고 옳은 것임을 안다. 그렇지만 괜히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은 반항적인 십대들의 행동을 고칠 수 있을까? 언어를 철회하고 눈이라는 몸을 동원해 멀리에서 자녀를 무관심한 척 지켜보는 것이다. 언어가 사라졌기 때문에 반항적인 십대들은 ‘반항’의 속성을 버리면서 반듯한 청소년의 모습을 되찾는다. 불면을 극복하는 방법도 이와 비슷하다. 몸이 편하게 숙면을 취하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언어의 작용을 차단하는 것이다. 언어를 동원하는 자고 싶어 하는 희망을 버리라는 것이다. 언어의 간섭이 사라지고 마음의 작용도 멈춘다. 이제 몸은 독립체가 되어 늦은 밤에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인 숙면을 취한다.
디지털 비서가 들려주는 마지막 인위적인 자연의 소리는 어머니의 쑥 캐는 소리이다. 쑥 캐는 소리가 청각적으로 상상은 잘 안 된다. 어쩌면 작은 칼을 흙 속에 넣고 쑥 줄기를 자르는 소리일 것이다. 어머니의 쑥 캐는 자연의 소리는 도다리쑥국을 끓이는 어머니의 모습과 연상된다. 쑥과 도다리는 봄에 먹어야 제격이다. 이 둘을 합쳐 만든 음식이 ‘봄도다리쑥국’이다. 우리 어머니가 새벽에 도다리 꼬리를 자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최종 결과물인 도다리쑥국을 가리키므로 맑게 들린다. 도다리쑥국에는 노란 날치알도 발발거리고 있다. 우리 시인은 디지털 비서가 들려주는 자연의 소리를 듣고 숙면을 취하여 아침에 잘 일어난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니 도다리쑥국이 차려져 있다. 어머니가 새벽에 도마에 도다리 꼬리를 자르는 탁탁하는 소리가 리듬감 있고 맑게 들려 그 소리에 잠을 깼다. 도다리쑥국을 먹을 생각에 노란 날치알이 발발거리듯 시인의 마음도 분주히 발발거린다.
우리 시인은 다행히도 디지털 비서가 들려준 자연 소리를 듣고 깊이 잤다. 매번 이런 방식으로 깊이 자는 습관이 자리를 잡으면 다행한 일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자아의 저주를 받을 것이고, 의식적인 자아인식(conscious self-awareness)이라는 병에 걸린다. 이 병을 알고 있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만약 내가 뭇 짐승 중 한 마리의 고양이라면, 이 삶에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이런 문제 자체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카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걸리는 이 의식적인 자아인식의 병에 걸리고 싶어 하지 않아서 차라리 동물이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우리 인간은 원숭이 뇌(monkey-brain)를 갖고 있다. 인간의 뇌가 원숭이의 뇌라는 말은 아니다. 원숭이가 숲 속에 살면서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바쁘게 건너다니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이 일에서 저 일로 한시도 쉬지 않고 건너 뛰어다니는 ‘분주한 마음’을 갖는다는 말이다. 이런 분주한 마음이 밤에는 작동하지 않고 모두를 숙면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