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앞에 다양한 형용사를 붙인다

나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나만의 형용사

by 불비

자아 앞에 다양한 형용사를 붙인다


한 권의 시집을 내면

물컹한 자아가 커 보이고

나머지 세계가 사사롭고 작아 보인다


시는 콩맷돌이다

어떤 일상도 갈아 진한 자아를 만든다

시는 콩시루에 콩나물 같다

시를 쓰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멀건 자아가 부쩍 자라 있다


사랑은 산사의 범종이다

처마 끝이라 다가가도 닿을 수 없고

뒤돌아 멀어지면 귀속에 달랑달랑 댄다

사랑은 적당한 거리가 말끔한 자아를 만든다


돈은 낫달이다

베일 수도 품을 수도 있다

돈은 딱딱한 베이커리처럼 사각사각대는 야채가 끼여 있어야

바삭한 자아가 씹힌다


여행은 스타필드다

내가 가고 싶은 길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여행은 시간 디자인에 따라 붉쿵한 자아가 생긴다


골프는 매일 아침 배달되는 쿠퍼스다

너무 많이 먹으면 내장이 묽고

너무 먹지 않으면 몸이 텁텁하다

골프는 묵직한 자아를 준다




나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나만의 형용사


시인이라는 자아는 자아 자체로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남아 있어서도 안 된다. 시인은 자기 자아를 형용사로 수식하고 싶어 한다. 형용사는 명사에 추가 정보를 제공하는 어법이다. 다양한 성질의 형용사가 존재한다. 명사는 형용사의 수식을 받으면서 그 정체성을 하나하나 만들어간다. 여러 형용사는 아무런 순서 없이 무작위로 명사를 수식하지는 않는다. 형용사의 어순에 관한 영문법이 있다. 의미 그룹별로 의견/평가, 크기, 모양, 상태, 연령, 색상, 원천/출신, 재료, 목적의 형용사가 순서대로 나오고 그 뒤에 명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사실 형용사의 어순은 명사의 속성에 따라 결정된다. 명사의 가장 구체적인 속성을 표현하는 형용사가 명사 바로 옆에 오고, 추상적 속성의 형용사가 명사와 거리를 두고 그다음에 온다. the famous delicious Italian pepperoni pizza(유명하고 맛있는 이탈리아 페페로니 피자)는 자연스럽지만, the Italian delicious famous pepperoni pizza는 부자연스럽다. 그 이유는 피자라는 명사의 속성을 기술하는 다양한 속성이 있을 때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속성을 기술하는 형용사가 피자라는 명사에 더 가까이 위치해야 한다. pepperoni는 피자의 고유한 속성을 나타내므로 명사 pizza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다. 페페로니 피자의 출처인 Italian은 영속적인 속성을 띠고 있으므로 개념적 거리상 그다음에 위치한다. 그리고 맛과 유명하다는 것은 주관적이고, 특히 먹어봐야 맛있는 줄 알고, 맛있다고 판단되면 유명하게 되는 것이므로 delicious가 famous보다는 명사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이다.


우리 시인은 어떤 형용사를 자신의 가장 근처에 둘까? 자신의 자아를 가장 먼저 수식하는 위치에 둘까? 이 시의 연이 나오는 순서가 이를 반영하는 것 같다. 우리 시인은 가장 먼저 시집과 시를 제일 먼저 언급한다. 시와 시집이 자기 자아라는 명사에 가장 가까이 놓여있다. 역시 시인답다. 시인이므로 시가 시인의 자아에 가장 가깝다고 느낀 것이다. 시인은 시집을 낼 때마다 자신의 물컹한 자아가 커 보이고, 나머지 세계는 작아 보인다. 시인은 세계를 해석하고, 그 해석을 시로 담는다. 여러 사람의 공통 세계 중에서 자신이 시에 담은 세계는 자기 것이 된다. 막연한 현실에서 무엇이 내 것이고, 무엇이 내 것이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현실에 질문을 던지고 해석하면 된다. 질문을 던져 해석된 세계는 내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내가 아직 모르는 막연한 덩어리로 남는다. 시인의 시집은 막연한 현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 고유의 정답지가 된다.


시인에게 시는 또한 콩 맷돌이다. 일상 세계를 갈아 진한 자아를 만드는 맷돌이다. 시는 시인의 자아를 묽지 않고 진하게 만들어준다. 진한 자아는 이제 타인의 자아를 포용할 수 있다. 타인의 자아를 추가한 시인의 진한 자아는 이제 부드럽고 융통성이 있는 자아가 된다. 시는 콩 시루에 있는 콩나물 같기도 하다. 콩 시루에 매일 물을 주면 콩나물이 부쩍부쩍 자라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하루하루 시를 쓰다 보면 멀건 시인의 자아도 부쩍 자라 있다. 시인에게 시란, 시인에게 시집이란 자신을 크게 하고, 자신을 진하게 하고, 자신을 부쩍 자라게 하는 촉매제이다.


시인의 자아를 수식하는 두 번째 형용사는 사랑이다. 시인은 사랑을 산사의 범종에 비유한다. 산사의 범종은 처마 끝에 매달려 있어 손이 닿지 않는다. 뒤돌아 멀어져도 범종의 달랑달랑 소리가 귀에 들린다. 산사의 범종은 멀지만 가까이 있다. 산사의 범종과 시인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있듯이 시인이 꿈꾸는 사랑도 사랑하는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사랑에 몰입하여 자기 자아를 챙기지 못하는 우둔함도 아니고, 사랑을 너무 무시하는 야속함도 아니다. 사랑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자아를 시인은 말끔한 자아라고 부른다. 티 없이 맑고 환하게 깨끗한 자아이다.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을 시인은 원한다.


시인의 자아를 수식하는 세 번째 형용사는 돈이다. 시인에게 있어 돈은 낫달이다. ‘낫달’은 ‘낫’과 ‘초승달’의 합성어이다. 시인의 만든 용어이다. 낫의 모양과 초승달의 모양 간의 닮음에 기초한 신조어이다. 낫의 기능은 불필요한 풀과 잡초를 베는 것이다. 달의 기능은 어둠 속에서 사람들에게 빛을 주고 사람을 포근하게 품어주는 것이다. 시인의 눈에는 돈도 낫달을 닮았다. 불필요한 존재에게는 돈을 쓰지 않고 차단하고 베어버리고,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돈으로 그 사람을 따뜻하게 품을 수도 있다. 돈의 이중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베어내는 역할을 위해 돈은 딱딱한 베이커리 같고, 품어주는 역할을 위해 사각사각한 야채가 그 베이커리에 끼어 있다. 돈의 이중성을 잘 제어하는 시인의 자아는 바삭한 자아이다. 바삭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딱딱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딱딱함 속의 바싹함 그 전체가 바로 돈이다.


시인의 자아를 수식하는 네 번째 형용사는 여행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여행은 자기 집 바로 근처에 있는 경기도 하남의 스타필드이다. 스타필드에는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이 모두 집결되어 있다. 없는 것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정도이다. 시인이 가고 싶은 곳은 무엇이든 빼곡히 들어차 있다. 시간마다, 계절마다 가고 싶은 여행지가 있다. 그 시간 디자인에 따라 여행을 하다 보면 시인의 자아는 붉쿵해진다. 새로운 여행지에 있으면 자아는 붉게 타오르고, 마음은 심쿵해진다. 붉은 에너지로 자아를 활성화하고, 설레임으로 가슴 떨게 하는 여행을 시인은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정착시키고자 한다.


시인의 자아를 수식하는 다섯 번째 형용사는 골프이다. 시인에게 골프란 아침마다 마시는 쿠퍼스 같다. 쿠퍼스를 아침에 한 개 이상 마시면 인간 몸의 가장 응결적 존재인 시인의 내장은 묽어진다. 너무 먹지 않으면 내장이 텁텁해진다. 내장이 너무 묽고 너무 텁텁하면 내 마음과 내 정신도 똑같이 그러한 성질을 띠게 된다. 내 몸과 내 마음이 너무 무르지도 않고 너무 텁텁하지도 않으려면 규칙적으로 하루에 하나의 쿠퍼스를 마시면 된다. 적당한 규칙에 따른 쿠퍼스 섭취는 묵직한 자아를 만들어준다. 시인은 매일 아침 운동으로 골프 연습장을 가서 두 박스 정도 묵직하게 스윙하고 온다. 꾸준한 스윙 동작은 굳은 내 몸과 내 내장을 유연하게 풀어준다. 유연해진 내 몸은 결국 유연한 내 마음으로 연결된다. 내가 유연함을 유지하려면 내 자아가 묵직해야 한다. 묵직함 속에서 유연함이 나올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은 아침 골프 운동으로 묵직한 자아를 갖추게 된다.


나의 자아를 수식하는 형용사의 순서는 고정될 필요는 없다. 어떨 때는 시집이, 어떨 때는 사랑이, 어떨 때는 돈이, 어떨 때는 여행이, 어떨 때는 골프 운동이 나의 자아 가장 가까이 위치할 수 있다. 영문법에서는 형용사의 어순이 고정되어 있지만, 우리 삶의 형용사 어순은 영문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 유연함을 잃지 않도록 상황과 맥락에 따라 내 자아를 수식하는 형용사들을 언제나 재배치할 수 있는 나만의 규칙을 수시로 세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