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음악과 술의 주술적 힘
여행은 서너 잔의 술에 취할 때 그 맛이 배가 된다
바삭 마른 영광굴비가 고추장에 뒤범벅된
잘 익은 햇살을 골라 먹던
법성포 한정식이 떠오르고
여름 복어가 제 배때기에 달라붙은
노란 희망을 포로 떠
찰기가 촬촬 혀를 감싸 쥐던
진해 횟집이 떠오르고
이스라엘 창만 가게 청양 수프에
고향 게살 맛이 푹 녹여 흐르던
기억이 떠오르고
여행은 먼 곳부터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다
스위스 호수길을 트래킹 하며
만 가지의 생각에
몇 개의 마음을 골라낼지
핀란드 라플란드 오로라 하늘을 보며
내 남은 생에 무슨 기억을 남길지
내 몸을 들여다보고
쿠바 해변가에 재즈를
틀어놓고 노을 맥주를 들이켜고 싶다
유튜브를 통해 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인 김영수 역사학자의 사마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이 강의에서 그는 사마천과 그의 아버지 사마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마천은 그의 아버지 사마담과 할아버지까지 모두 역사학자였다.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역사에 깊은 관심을 키웠다고 한다. 특히 사마담은 어린 사마천에게 중국 전역으로 여행을 보냈다. 중국이라는 큰 땅을 모두 여행하려면 한두 달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김영수 교수의 말로는 아버지의 권유로 여행을 떠난 사마천은 거의 3년간 중국 전역을 여행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영수 교수는 이처럼 장기간의 여행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이 사마천이 《사기》라는 걸작을 집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러면서 여행이 참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사마천이 아버지의 권유로 이루어진 긴 여행 때문에 걸작을 집필할 수 있었다는 말에 나도 동의했지만, 그 영향은 간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자체가 아니라 여행으로 자식인 사마천이 아버지의 그늘과 잔소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난 그 이후로 우리 아들도 이성으로 똘똘 뭉쳐진 기성세대인 아버지라는 나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은 현실의 압박에서 벗어날 기회를 준다. 학생이라면 여행 중에 부모님의 간섭에서 벗어날 기회가 생기게 된다. 내가 있는 바로 여기가 편리성의 관점에서 가장 좋은 곳이긴 하지만, 현시점(here and now)은 반복되는 곳이므로 지겨움을 줄 수도 있다. 현시점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서 그 새로운 곳의 기운을 받는 것이 여행이다. 새로운 기운을 받기 위해 우리 몸에 새로운 기운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러한 기운은 그곳에서 먹는 음식으로 생길 수 있다. 시인은 법성포로 여행을 간다. 법성포는 전남 영광군에 자리 잡은 천연의 항구이다. 그곳에서 영광굴비가 나오는 한정식집에서 식사한다. 바싹 마른 영광굴비가 고추장에 뒤범벅되어 나왔다. 영광굴비는 좋은 햇빛에 오랫동안 말려서 만든다. 영광굴비 한 마리에 얼마나 좋은 햇살이 묻어 있을지 상상해 보자. 그러한 영광굴비를 먹는다는 것은 천연의 햇살을 풍부하게 먹는 것과 같다. 우리 몸에 햇살이 수북이 쌓이는 느낌이다.
시인은 해마다 4월에 벚꽃축제가 열리는 경상남도 진해로 여행을 간다. 여름철에 복어회를 잘하는 곳이 진해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진해를 찾은 것이다. 싱싱한 여름 복어의 배에 노란색이 물들어 있다. 싱싱함의 표상인 이 노란색이 시인에게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 횟집의 북어 회는 특별한 점이 있다. 보통 복어회는 아주 얇게 포를 뜬다. 그러다 보니 양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러한 복어회는 냉동한 상태에서 매우 얇게 쓴 것이다. 이 진해의 횟집에서는 복어를 냉동하지 않고 바로 회로 뜬다. 바로 잡은 복어는 단백질이 너무 많아 아무리 좋은 칼을 사용해도 얇게 포를 뜰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집의 복어회는 보통 복어회보다 5배 정도는 더 두껍다. 그리고 얼마나 찰기가 많은지 복어회가 담긴 접시를 뒤집어도 한 점도 떨어지지 않고 접시에 붙어 있을 정도이다. 시인은 찰기 넘치는 노란 뱃살의 희망으로 가득 한 복어회를 몸에 넣는다. 그는 찰기와 희망을 이곳에서 얻어 간다.
우리 시인의 여행은 먼 곳을 우선으로 한다. 먼 곳이란 해외를 말한다. 먼 곳인 해외를 충분히 여행한 뒤 가까운 국내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한다. 평생 먼 곳을 여행해도 다 다녀보지 못할 만큼 이 세계는 넓다. 먼저 시인은 스위스로 여행을 간다. 스위스 호수 길을 따라 트래킹을 한다. 트래킹 중에 온갖 잡생각이 다 든다. 여행 전에 현실에서 느꼈던 만 가지 생각을 이곳 스위스로 여행 오면서 함께 모셔왔던 모양이다. 여행지에서는 모든 근심 걱정을 다 잊고 그냥 새로운 환경에서 즐기다 가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냥 즐기다 돌아간다고 해서 그 많던 걱정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시인은 현명하다. 스위스에 와서 수많은 문제점을 반추하고 되새기면서 몇 가지 결정적 생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분석과 해석에 도움을 얻고자 몸을 움직이는 트래킹에 의지한다. 몸의 움직임으로 뇌가 활성화되어 이성적 사고가 적절히 작동한다.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으로 몇 가지 생각을 해결책으로 마음에 담아둔다. 우리 시인은 이젠 그 해결책을 갖고 현실로 돌아가 좀 더 정리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은 핀란드로 여행을 간다. 라플란드에서 오로라 하늘을 본다. 그 하늘에 수많은 별이 비친다. 그 별들을 보면서 저 하늘은 뭔가를 남겼다고 하면서 부러워한다. 자신도 남은 생에 무슨 기억을 남길지 생각에 잠긴다. 시인은 기억을 머릿속에 남기고 싶은 것이 아니다. 마음속이 아니다. 마음속 기억은 그 용량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영구성이 떨어진다. 시인은 자신의 기억을 체화하고 싶어 한다. 몸이 기억하도록 체화하려 한다. 그래서 시인은 기억을 생각하면서 자기 몸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몸에 기억을 체화해서 영원히 그것이 사라지지 않게 하고 싶은 것이다.
여행의 핵심은 술이다. 현실을 떠난 새로운 곳은 이성이 아닌 감정과 느낌이 충만하다. 여행을 가는 목적은 모든 잡념을 잊고 현재의 느낌을 그냥 느끼고 싶어서 일 것이다. 느낌을 느끼고 감정을 더욱 충만하게 하려면 여행지에서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현실의 이성을 지우기 위해 몇 가지 요인이 더 필요하다. 그것은 음악과 술이다. 시인은 쿠바 해변에서 재즈를 틀어놓고 맥주를 마신다. 쿠바 해변이라는 이국적인 땅,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즉흥적 음악인 재즈, 인간의 이성을 담당하는 전전두엽피질이라는 뇌 부위의 작동을 일시 정지시키는 술! 이 삼인조는 오로지 시인만을 위한 것이다. 시인의 감정과 느낌을 위한 것이다. 이제 시인은 주술적 기분으로 천국의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