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현실을 살아가다
사랑에는 바르게 놓인 퍼즐이 없다
불규칙적이고 불안하고 불완전한 퍼즐 더미에서
퍼즐을 한 조각씩 완성해 나가야 한다
소나무 커피숍에서 블랙커피를 마시며
사소하고 소담하고 소박한 사랑을 꿈꾼다
야외 탁자 옆 보라꽃 떼가
키 낮은 바위 문턱에 앉아
흙살을 파고 있고
실개천에는 노란 유채가 물 떼를 눈꽃처럼 퍼 나르고 있다
커피숍 주변 빈 땅이
잡풀 몇 개 끌어안고 바람을 주워 먹고 있다
밭에는 콩이 있고 잡초가 있어야
버려진 땅이 되지 않는다
아메리카노 몇 잔으로 일상이 훅 지나가도
헤르만 헤세의 알처럼 흰콩을 건져내야 한다
사랑도 때론 수확이 필요하다
사랑도 자유를 꿈꿀 수 있다
사월의 솔나무의 가지는 바슐라르 상상처럼
부분부분 자유롭게 일상을 휘적휘적 대고
몸나무 몸체는 하늘로 일제히 치솟고 있다
사랑은 배려다
텃밭인 사람에게는 씨앗을 착착 뿌려 주고
참숯 속 불판에 고기를 먼저 척척 올려 줘야
마음이 깊어진다
누구든 사랑을 하고 싶어 한다. 2007년에 발매된 김광석의 《인생이야기》라는 앨범에는 주옥같은 김광석 노래도 실려 있지만 자기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그중 세 번째 이야기에서 김광석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환갑 때 연애하고 싶습니다. 로맨스. 그냥 ‘ㄹ’ 자만 들어도 설레죠? 로맨스. 코웃음 치지 마십시요. 뭐 그때까지 정열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뭐 바란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죠 로맨스는. 번개처럼 그렇게 번쩍해 가지고 정신 못 차려야 되는 거죠.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바램입니다. 환갑 때 로맨스.” 김광석은 60인 환갑이 되어서도 사랑을 하고 싶어 한다. 물론 나도 사랑이 하고 싶었고, 사랑도 했다. 그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한다.
우리 시인도 사랑을 꿈꾼다. 시인이 꿈꾸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시인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에는 바르게 놓인 퍼즐이 없다. 퍼즐을 하나씩 맞추어 가면서 사랑을 완성해 나가야 한다. 그 퍼즐을 맞추어 간다고 해서 과연 사랑이 완성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랑에는 정답이 없다. 불규칙하고 불안하고 불완전한 것이 사랑이다. 시인이 원하는 사랑은 완벽한 사랑은 아니다. 소나무가 눈앞에 펼쳐지는 커피숍에서 설탕이나 꿀이 가미되지 않은 블랙커피를 마시면서 사랑을 꿈꾼다. 그 사랑은 블랙커피를 닮은 작고 소박한 사랑이다.
커피숍 바깥의 야외 탁자 옆에는 보라꽃이 피어 있다. 그것도 한두 송이가 아니라 떼로 피어 있다. 그곳은 보라꽃에게는 자기 집이다. 보라꽃의 집에는 바위 문턱이 있고, 보라꽃은 그 문턱에 피어 있다. 보라꽃은 수동적으로 흙 속에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흙살을 파는 능동적 주체이다. 폭이 좁은 작은 개천에서는 물 위에 노란 유채가 떠다니고 있다. 노란 유채 역시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 존재이다. 노란 유채가 물 위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물 떼를 눈꽃처럼 퍼 나르고 있는 것이다. 보라꽃과 노란 유채의 활동성과 적극성은 정답이 없는 사랑을 추구하고 꿈꾸는 시인을 닮았다.
커피숍 주변 빈 땅에 잡풀이 자라고 바람이 불고 있다. 빈 땅 역시 수동적 존재로 머물지 않는다. 잡풀을 끌어안고 바람을 주워 먹는 능동성을 보인다. 빈 땅은 행동하는 주체이므로 절대 버려진 땅이 되지 않는다. 그 땅에는 콩도 있고 잡초도 있다. 생산성을 대표하는 콩이 있고 생산성을 저해하는 잡초가 있다. 콩과 잡초의 대립이 형성되므로 수확의 개념이 성립된다. 빈 땅에서 자란 콩과 잡초 중에서 콩만 수확하듯이, 사랑도 때론 수확이 필요하다. 사랑의 수확에 대립되는 요소는 무엇일까? 사랑은 꿈이라고 했으니 그 대립 요인은 현실일 것이다. 사랑과 현실은 치열하게 대립된다. 그러한 대립 중 수확한 사랑은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것이 된다.
사월의 솔나무 가지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일상’을 휘적휘적 대고, 솔나무의 몸통은 ‘하늘’로 일제히 치솟고 있다. 일상은 현실이고 하늘은 꿈을 대표한다. 솔나무라는 한 개체 중에서 가지라는 부분은 현실의 삶에서 투쟁하며 살아가지만, 몸통은 꿈을 꾸며 살아간다. 사랑도 솔나무의 몸통처럼 하늘로 치솟아 꿈을 꿀 수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 솔나무의 가지는 시인 그 자체이다. 시인은 현실에서 살아가지만 사랑을 꿈꾸는 것이다.
텃밭에 씨앗을 착착 뿌려 줘야 한다. 참숯 속 불판에는 고기를 척척 올려 줘야 한다. 씨앗이 자라 싱싱한 야채가 피어나고, 불판에 올린 고기는 먹기 좋게 익는다. 싱싱한 야채에 잘 익은 큼직한 고기 한 점 입에 넣으면 세상 부러운 것 없다는 듯이 감탄사가 절로 난다. 이런 순간을 다른 사람과 나무면 서로의 마음이 깊어진다. 씨앗을 뿌리는 것과 고기를 불판에 올리는 것을 시인은 배려로 본다. 상대방에게 배려하면 그에 대한 대가가 수반되듯이, 씨앗 뿌리기와 고기 올림의 배려는 결국은 싱싱한 야채와 잘 익은 고기를 대가로 내놓는다. 시인은 사랑도 배려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배려하면, 그에 대한 보상이 나온다. 그 보상을 받은 나는 또 배려한다. 상대방도 나에게 배려를 하면 나는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뭔가 보상을 해주고, 보상을 받은 그 사람은 또 나에게 배려를 한다. 나를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은 나에게 해 주는 상호적 배려로 서로의 마음이 깊어지는 것이다.
우리 시인은 꿈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했지만 난 현실로서의 사랑을 말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지금 사랑을 하라고 권한다면, 난 솔직히 자신이 없다. 물론 난 결혼을 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혼 여부라는 도덕성 문제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 사랑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난 수업 시간에 영어 전치사 in이 나오면 지루한 수업을 조금이나마 유쾌하게 하려고 칠판에 He falls in love with her라는 예문을 적는다. 그러고는 학생들에게 이 문장에서 그녀와 사랑에 빠진 ‘그’라는 사람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드냐고 묻는다. 학생들 대부분은 ‘부럽다’, ‘좋겠다’ 등의 대답을 내놓는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난 학생들에게 나는 그 사람이 ‘참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허걱’하는 표정을 짓는다. 어떻게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에 ‘불쌍’이라는 불경한 말을 할 수 있냐는 듯한 표정이다. 난 내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전치사 in으로 설명을 한다. 전치사 in 뒤에 나오는 명사는 긍정의 뉘앙스를 가진 것보다는 부정의 뉘앙스를 갖는다는 것을 예문을 들어 설명한다. be in trouble(곤경에 처한다), be in ruins(폐허가 된다), be in liquor(술에 취한다), be in a rage(격노한다), be in confusion(혼란스럽다), be in excitement(흥분한다), be in debt(빚을 진다)를 칠판에 적는다. 그러면서 fall in love(사랑에 빠진다)도 같은 뉘앙스라고 말한다. 물론 be in good health(건강하다), be in good order(정돈된다). be in full blossom(꽃이 만발한다)처럼 긍정의 뉘앙스를 가진 명사도 in 뒤에 나온다. 하지만 난 의도적으로 이런 긍정의 표현은 설명하지 않는다. 난 사랑의 부정성에 대한 내 논리를 정당화해야 하니깐! 나는 학생들에게 동사 fall의 의미도 생각하게 한다. 이 동사가 ‘떨어지다, 낙하한다’를 의미한다는 것을 학생들은 다 알고 있기에 내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우리말 속담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 사랑이 눈물을 나게 하는 씨앗이니, 사랑을 하면 눈에 피눈물 난다는 뜻이다. 학생들의 공감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난 마지막 비수를 꽂는다. 파리가 먹다 남은 소주병에 빠지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 이 파리의 운명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음을 모두 다 직감한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내 설명을 들은 학생들은 사랑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결혼이다. 우리 학생들은 머릿속에서 그럼 결혼은 어떻게 되는 거지라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난 사랑은 하지 말고 결혼만 하라고 한다. 학생들은 아직 어리다 보니 그게 가능하냐는 표정들이다. 그래서 난 아주 무미건조하게 모든 조건을 미리 고려한 중매를 통해 결혼하라고 하다. 학생들은 이제 웃는다. 최종적으로 난 사랑하는 시간에 열심히 책 읽으면서 공부하고, 결혼은 중매로 하라고 말한다.
물론 내가 이렇게 사랑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결혼은 중매를 통해서 하라고 해서 내 말을 그대로 따를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거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래서 난 이렇게 특별한 의미도 없는 농담을 통해 사랑과 결혼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이 어떻게든 의지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내가 사랑을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고, 하지 않으려고 다짐한다고 해서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포함한 모든 정서와 감정은 인간의 사고를 초월한다.
우리는 보통 사랑을 어떻게 하는가? 먼저 남과 여가 존재한다. 특정 상황에서 그 두 남녀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중에 썸을 탄다. 썸을 타다 누군가 먼저 고백하면서 사랑의 하루가 시작된다. 이렇게 사랑이 얼마간 지속되면서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사랑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 감정이다 보니 남녀는 서로에게 다소 소홀하게 되는 시기가 온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의 설렘과 짜릿함은 서서히 줄어들고 어느 시점이 되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사랑의 감정이 한창일 때 결혼할 수도 있고, 그 감정이 서서히 줄어드는 시점의 언저리에 결혼할 수도 있고, 사랑의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지만 책임감 때문에 결혼할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사랑의 감정이 식어서 이를 극복하지 못해 이별을 할 수도 있다. 또는 너무 사랑하지만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해 서로를 위해 이별하는 때도 있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라고 말하면서 헤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사랑은 여러 사건으로 이루어진 긴 시나리오 속의 한 특정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흔히 서로 사귀자고 합의한 첫날부터 그 감정이 시들해지기 전까지만 사랑이라고 본다. 또 어떤 사람은 결혼까지 이어져야 사랑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별은 사랑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 이별은 아프고, 때로는 증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난 사랑이 남과 여의 존재에서부터 결혼 혹은 이별까지의 전체 시나리오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긴 ‘사랑’ 시나리오에서 한 특정 부분이 사랑이라는 전체를 대표하는 환유적 사랑 해석이 아닌, 전체 시나리오 자체가 사랑이라는 것이 내 의견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큰 것이다. 한 부분으로 쪼개고 분석할 수 없는 숭고한 것이다. 그런 전체로서 숭고함 그 자체인 사랑을 우리 인간들은 쪼개어 환유적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별의 슬픔도 사랑이므로 혹여 어떤 이유에서든 이별한 연인이 있다면 그 또한 사랑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잘 극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사랑 중에 싸워 서로 삐진 상태의 연인들도 그 또한 사랑이라 생각하고 잘 극복해 행복한 사랑 유지해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