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 거진항 밤불들이 겨울 바다와
거칠게 다투고 있다
숨을 다 드러내고 내장을 다 내주고
명태 건조대에 몸 껍데기까지 다 내어 줘도
고독하다
내 몸의 반은 마르고 반은 젖고
겨울 찬 바람이 내 살을 베어내고
햇살이 지독하게 마음을 부풀려도
고독이 깊다
밥 친구가 없어 외로울 때면 미자 누나네 코다리집에 간다
국물이 붉다
속뼈를 바르고 가위로 웃자란 마음의 지느러미를 자르고
속살이 부서지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동치미 국물은 여름날 녹두비처럼 맑푸르다
코다리를 다 먹고 문을 나서면
매운 고독이 삭 가신다
이 시의 주제는 고독이다. 고독은 인간이면 누구나 간직하며 더불어 사는 대표적인 감정이다. 이는 떼어버리고 싶지만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한다. 이성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성을 통해 나와 주변 세상의 관계를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면서 삶을 살 수 있다. 이러한 이성의 작용에서는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특히 고독이라는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나의 제한된 자원을 나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합리적으로 계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고독감을 느낄까? 이는 우리 인간이 혼자가 아닌 여럿이 어울려 지내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같이 어울릴 대상이 없고, 이 현시점의 삶을 같이 살아갈 동반자나 친구가 없을 때 우린 고독감을 느낀다. 이성의 차원에서는 고독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에겐 자원도 충분하고 사회적 지위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상태이다. 사실 동료도 있고 식구도 있어 사회를 이루고 살지만, 가끔 고독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회적 상황에서도 고독감을 느끼는 이유는 다양하다. 내가 믿었던 친구가 나에게 잠시라도 등을 돌릴 때, 직장 동료들이 나를 공적이고 사무적인 대상으로만 여길 때가 그 이유일 수 있다. 이성의 차원에서 고독함이 없어야 하고, 사회적 차원에서도 무리 지어 삶을 살기 때문에 역시 고독함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도 고독함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문제인 듯하다.
지금 우리 시인은 다른 모든 사람처럼 고독감을 느낀다. 시인만의 고독감 해소 방식이 이 시에 잘 소개되고 있다. 그 해소법은 코다리찜을 먹는 것이다. 코다리찜을 먹는 것도 정답이지만 100점짜리 정답은 아니다. 그 정답은 ‘미자 누나’가 운영하는 코다리찜 전문 식당에서 코다리찜을 먹는 것이다. 인간이 고독감을 사라지게 하는 데는 음식도 한몫하지만, 더 큰 역할은 주변 사람에게 있다. 고독할 때 우린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같이 있고자 한다. 그러면서 같이 식사하거나 술을 한잔하면서 진지하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고독감을 해소하려 한다. 우리 시인은 음식과 사람을 동시에 해결한다. 시인이 단골손님이라서 그 사장님을 누나라고 부른다. 시인에게 그 누나는 미자 누나이다. 친하고 가족 같은 미자 누나의 음식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그 음식을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결국 이 시의 제목 ‘미자 누나네 코다리찜을 먹으며’는 ‘시인의 고독 해소법’이다.
코다리찜의 핵심 재료는 바짝 말린 명태이다. 현재 고독함을 느끼는 시인은 코다리찜에 사용되는 명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이동해 지금의 공간도 아니고 현재의 시간도 아닌 강원도 고성 거진항의 겨울 풍경을 묘사한다. 이 거진항은 명태를 건조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이다. 어둠 속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등대의 불빛은 차가운 겨울 바다와 거칠게 다투고 있다. 명태를 말리는 것은 전쟁이다. 마르지 않으려는 명태가 있고, 명태를 말리려는 자연환경이 있다. 이 둘 간의 전쟁이 곧 벌어질 것이다. 이런 전운은 첫 연에서 밤불과 겨울 바다의 거친 다툼에서 묘사된다.
살아 있던 명태는 숨을 거두었다. 명태는 자기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던 숨을 다 드러내었다. 속에 있던 내장도 다 내주었다. 명태 건조대에 몸 껍데기까지 다 내어 주었다. 결국 명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내준 것이다. 숨과 내장과 껍데기! 이 모든 것을 내 걸고 명태는 자연과 맞서 싸운다. 이 전투의 결과는 정해져 있다. 명태의 완벽한 패배이다. 모든 것을 내 걸고 싸웠지만 패배한 명태는 결국 고독하다.
강원도 고성 거진항에서 명태의 모습은 현실에서 시인의 모습으로 투사된다. 시인 몸의 반은 마르고 반은 젖어 있다. 인간의 몸은 70%에 가까운 수치로 물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는 성인보다 수분 비율이 더 높고, 신생아는 수분이 80%에 가깝다고 한다. 연령대가 점점 올라갈수록 몸 안에서 수분은 더 줄어든다. 연령대가 높은 노인의 경우 수분이 50% 미만이 사례도 있다고 한다. 결국 인간의 몸에 수분이 50%인 것은 건강상 위험한 상황이다. 현재 시인의 몸 상태가 이 정도이다. 설상가상으로 겨울의 찬 바람이 시인의 살을 베어낸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따뜻한 햇살이 시인의 마음을 부풀려준다. 차가운 겨울과의 싸움이므로, 시인의 지원군인 햇살은 지독하게 시인의 마음을 부풀려준다. 이 전투의 결과는 시인의 패배로 운명지어졌다. 시인의 몸에는 수분이 절반뿐이라 몸 상태가 엉망이고, 겨울의 바람도 살을 에는듯한 차가운 바람이다. 이런 패배의 결과로 시인은 고독하다.
자연이라는 같은 적에게 패배한 명태의 운명과 시인의 운명이 참으로 닮았다. 이제 명태와 시인은 같은 처지라 동병상련한다. 밥 친구가 없어 외로움을 느낀 시인은 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 친구는 자기와 같은 처지인 명태이다. 명태가 있는 곳은 시인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미자 누나가 운영하는 코다리찜 식당이다. 미자 누나는 테이블에 붉은 국물을 내온다. 미자 누나가 코다리찜을 먹기 좋게 손질해 준다. 속 뼈를 바르고, 가위로 코다리의 지느러미를 자른다. 이젠 코다리의 속살은 부서지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시인의 코앞에 펼쳐져 있다. 시인은 코다리의 지느러미를 쓸데없이 보통 이상으로 많이 자라 연약하게 된 마음에 비유한다. 여기에서의 마음은 이성이다.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서 이성인 마음은 불필요하다. 코다리의 지느러미를 미자 누나가 잘라 버렸으니, 시인도 자신의 거추장스러운 이성의 작동을 잠시 멈춰 세웠다. 이젠 마음과 이성이 없는 순수하고 따뜻한 연민과 공감이 등장한다. 매운 코다리찜을 먹으면서 동치미 국물로 매운 느낌을 여름날 녹두 비처럼 맑고 푸르게 만들었다. 50%뿐이던 시인 몸속의 수분이 이 시원한 동치미 국물로 어느 정도 보충되어 시인의 몸 상태가 적당한 안정감을 찾는다. 코다리를 다 먹고 문을 나서면 시인의 매운 고독은 삭 가신다. 이렇게 시인은 시인만의 방식으로 시인만의 고독을 잠재운다.
우리가 어떤 힘든 상황에 부닥쳐 힘들 때 나만 그런 상황에 부닥친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 힘듦은 가중된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런 힘든 상황은 나만 겪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거의 모두 비슷한 힘든 상황에 놓여 고통을 느끼는 듯하다. 어쩌면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 인간성의 조건은 우리 인간이 거의 비슷한 신체화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거의 비슷한 몸적 구조를 갖추고 있으므로, 몸을 통해 전이되는 심적 감정과 사고방식도 비슷하게 구축된다. 내가 고독하다고 해서 이 고독이 나만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힘들어진다. 어떤 사유를 하는 사람이든, 어떤 사회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잠시의 고독감을 느낀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고독감은 일종의 감정이다. 모든 종류의 감정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일시적이지 영구적인 속성이 아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면 그 감정이 줄어들고 결국 사라진다. 어떤 좋은 일로 행복하지만, 그 행복은 잠시의 순간일 뿐이다. 고독이나 슬픔이라는 부정적 감정도 마찬가지로 일시적이다. 나만 고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고독을 포함한 모든 감정이 일시적이고 곧 사라진다는 사실, 이 두 가지 고독의 성질을 생각하면서 이 삶에서 고군분투하면서 살아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