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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Jul 12. 2023

ChatGPT와 인공지능을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현재까지 우리 인간이 달성한 기술 발전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ChatGPT가 지금 이 사회에서 화두이다. 이를 반기면서 그 활용 방법을 다양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영어 학습, 코딩, 사업계획서 작성 등에서 ChatGPT의 활용성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불신을 하는 사람들도 흔하게 볼 수 있다. 후자의 사람들은 실제로 ChatGPT에게 질문을 해 보고, 나온 답변을 분석해 보니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가짜 뉴스까지 담겨 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래서 자기는 ChatGPT를 믿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확신에 찬 표정을 짓는다. 대학교수들은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면, 학생들이 ChatGPT를 활용해 과제를 제출한다고 걱정과 우려의 말을 한다. 


기술 발전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현대인만은 아니었다. 기원전 469년 무렵에 태어나 기원전 399년에 사망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인 《파이드로스》(The Phaedrus)에서 글쓰기의 발명을 애석하게 여긴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종이에 적어두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으면 기억력이 쇠약해지고, 마음은 시들고 위축된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 소크라테스의 한탄은 지나친 것 같다. 정말로 글쓰기가 발명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는가? 그렇지 않다. 글쓰기는 인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글쓰기는 문화적·과학적·철학적·역사적 지식의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문명이 그들 선대의 업적을 기반으로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글쓰기는 교육의 민주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글쓰기를 통해 지식이 선택된 소수에 국한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교육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글쓰기로 인해 거래를 문서화하고, 재고를 기록하고, 서면 계약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되어 상업과 무역이 크게 촉진되었다. 이외에도 글쓰기는 복잡한 사회 발달과 과학적 지식의 발전 및 기술 혁신에 큰 역할을 했으며, 우리가 복잡하고 정교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소크라테스는 글쓰기의 이러한 장점을 간과했던 것 같다.


윌리엄 리(William Lee; ?~1610)의 이야기에도 기술 발전에 대한 우려가 담긴 사연이 있다. 윌리엄 리는 16세기 후반에 살았던 영국 성직자로서, 세계 최초로 뜨개질 기계를 발명했다. 이 기계를 사용하게 되면 뜨개질하는 사람들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는 윌리엄 리의 뜨개질 기계에 특허를 내주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거절당한 윌리엄 리는 프랑스 왕(위그노 앙리 4세)이 기꺼이 특허를 내줄 것임을 알았고 곧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 기계는 뜨개질 의류를 만드는 일을 부분적으로 자동화했고, 지금도 약간 변형된 형태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산업혁명 시기인 1800년대의 영국에서도 기술 발전에 우려를 표한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기계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은 근로자 집단인 러다이트(Luddite)였다. 이들 러다이트는 증기 기관 하나가 1,000명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주장하면서 공장의 기계를 부수면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후 근로자의 일자리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새로운 성격의 일자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사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멈추지 않으며, 멈출 수도 없다. 아니, 기술 발전은 현재만의 현상이 아니라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의 먼 조상은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를 만들어 사용했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약 100만 년 전 구석기시대 초기 인류가 만들어 사용한 독특한 선사시대 도구이다. 이 도구는 처음 발견된 프랑스의 생트-아슐(Saint-Acheul) 유적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도끼는 동물 도살, 식물 재료 가공, 목공에 사용되는 효과적인 다용도 절단 도구로서 ‘구석기판 맥가이버칼’이라 할 정도였다. 날카로운 모서리는 썰고 베는 데 사용하고, 뾰족한 끝은 구멍을 뚫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주먹도끼의 넓은 바닥은 잡고 두드리는 도구로 사용했다. 그 이후로, 인류는 수많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기술은 주변 세상과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번화한 시내 중심가를 돌아다니기만 해도 이를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타고 먼 곳을 빠르게 이동하고, 스마트폰으로 필요한 정보를 수시로 검색하고 찾는다. 100만 년 전 우리 조상들이 주먹도끼로 생존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헤치며 살아갔듯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스마트폰이라는 기술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결국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오늘날의 스마트폰은 같은 것이었다. 순수하고 매개되지 않은 형태의 환경과 상호 작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자연인’조차 사실은 기술을 사용해 생존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기술 생태계에서 숨 쉬며 사는 것이다.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스마트폰(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askpang/9698204096)

그렇다면 왜 우리 인간이라는 종은 기술을 사용할까?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은 육체적으로, 생리적으로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 약한 신체 능력을 갖추고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뼈와 근육이 단련되어 강한 듯하지만 결국 나이가 들면서 신체 능력은 약해진다. 또한 인간의 신체 능력은 한계가 있다. 우리는 너무 무겁지 않은 어느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상자만 들 수 있고, 호흡이 너무 가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만 달릴 수 있으며, 특정한 거리에서만 상대방이 나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약한 신체 능력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증강하는 것은 거대한 도전인 이 세상과 환경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우리의 신체 능력을 증강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연습과 훈련이다. 축구선수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기동성을 놀라울 정도로 크게 향상시킨다. 와인 전문가는 수많은 종류의 와인의 맛을 보는 경험과 연습을 통해 맛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하는 능력을 향상시킨다. 다른 하나는 기술과 도구 사용이다. 우리는 망치를 사용하면 돌을 깨거나 못을 박는 능력이 향상되고, 가위를 사용하면 종이나 천을 절단하는 능력이 향상된다. 안경은 내장된 시각 장치인 눈의 기능 저하를 보충해 준다. 자동차는 짧은 시간에 먼 거리를 갈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크게 향상시켜 준다. 


사실 첫 번째 방법은 신체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연습과 훈련 외에 기술과 도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기술과 도구를 개발하여 우리 삶에 활용하는 성향은 우리의 진화 역사에서 일어난 두 가지 전환점에서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기술적 성향은 우리가 접하거나 우연히 발견한 재료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면서, 그 재료가 우리 인간에게 행위를 유발하는 의미있는 정보를 추가로 발견하는 탐구 성향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막대기를 만지작거리면서 낚싯대가 될 수 있는 막대기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다. 두 번째 기술적 성향은 뒷다리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물건을 살펴보면서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손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손이 자유롭다는 것은, 상황에 맞게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능력이 상당히 증폭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점점 더 능숙하고 기발하게 물건을 다룰 수 있는 우리 인간은 다른 유인원에게는 필적할 수 없는 정도로 우리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고, 노동력을 절약하고 지능을 확장하는 수많은 도구와 장치를 우리 세계에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떨어진 나뭇가지가 있으면 그것을 지팡이로 사용해 가파른 언덕을 쉽게 오를 수 있다. 더 길고 두껍지만 탄력이 좋은 나뭇가지가 있으면, 그것을 짚고 도약해 도랑을 뛰어넘을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재료와 물건을 교묘하게 활용하는 사람이 되도록 진화했고, 우리 자신의 타고난 신체 능력을 몇 배까지 향상시킬 수 있다. 


기술 개발과 기술 사용에 대한 성향은 진화를 통해 우리에게 장착된 타고난 성향이다. 사실 인간을 포함해 다른 유기체도 이런 기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소라게는 소라껍데기를 발견하고 그 껍질에서 산다. 그러다 덩치가 커지면 기존의 소라껍데기를 버리고 밖으로 나와 소라껍데기 없이 취약한 채로 잠시 지낸 뒤에 다시 더 큰 소라껍데기로 들어가 생활한다. 소라껍데기를 발견해서 사용하는 게는 그 소라껍데기와 하나의 정체성을 확립해서 ‘게+소라껍데기’이 된다. 거미는 거미줄을 치고, ‘거미+줄’은 거미에게 먹이를 주는 똑똑한 장치 역할을 한다. 거미줄은 실제로 거미 자신의 분비물로 구성되어 있고, 거미와 거미줄은 함께 매끄럽게 작동한다. 비버는 댐을 짓고, 그 댐은 연못을 형성하며, 그 연못은 비버의 삶에 유리한 서식지를 제공한다. 비버는 환경을 만들고, 환경은 비버를 만든다. 즉, ‘비버+댐’이다. 이런 유기체에게 있어서 이들이 만든 ‘기술’은 해당 유기체와 별개가 아니라 그것의 불가분한 부분이다. 이런 기술이 없다면 이런 유기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기체가 자신의 한계를 보충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은 유기체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소라게(출처: https://pixabay.com/photos/terrestrial-hermit-crab-animal-shell-1000857/)

우리 인간이 이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기술은 인간과 별개가 아니라 인간 몸과 뇌의 확장된 부분이다. 즉, ‘인간’과 ‘기술’이 아니라 ‘인간+기술’이다. 인간이 만들고 사용하는 기술은 인간이 부수적으로 사용되는 수단이 아니라, 결국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결정적 부분이다. 소라게가 소라껍데기 없이 생존하지 못하고, 거미가 거미줄 없이 생존하지 못하며, 비버가 댐 없이 생존하지 못하듯이, 우리 인간도 기술 없이는 생존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기술은 우리의 먼 조상이 약 100만 년 전에 사용했던 주먹도끼가 될 수도 있고, 소크라테스가 우려했던 글쓰기가 될 수도 있고, 자연인이 사용하는 톱이나 칼일 수도 있고, 브런치 작가들이 매일 곁에 두고 사용하는 노트북일 수도 있고, 현대인들 모두 곁에 없으면 걱정하고 심지어는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하는 스마트폰일 수도 있고, 최근에 더욱 활성화되고 있는 ChatGPT나 인공지능일 수도 있다. 이런 기술은 인간 정체성의 한 부분이므로, 이 부분을 억지로 무리해서 우리에게서 떼어 낼 수 없다. 기술을 떼 내는 것은 우리 살점을 몸에서 떼 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ChatGPT나 인공지능을 멀리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기술은 받아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기술은 곧 우리의 몸이자 우리의 뇌이다. 인간이 몸에서 벗어날 수 없고, 우리의 뇌를 우리 몸에서 분리할 수 없듯이, 우리는 기술을 우리에게서 분리할 수 없다. 기술을 분리하고자 한다면, 따끔거리고 힘든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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