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 같은 스마트 시대를 대표하는 제품으로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노트북이 있다. 많은 기업이 이런 제품을 만들고 있고, 같은 기업이지만 같은 제품에 대해 다양한 제품군을 구축하고 있다. 스마트폰에 국한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스마트폰은 아이폰과 갤럭시폰이다. 난 개인적으로 아이폰을 좋아하고,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아이폰을 바꾸는 스타일이다. 그렇다고 아이폰의 기능을 온전히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보통 사람들과 별반 차이 없이 전화, 문자, 카카오톡, 자료 검색 등이 전부이다. 아이폰 사용자는 흔히 아이폰의 카메라 성능과 그 감성 때문에 아이폰을 고집하는데, 사실 난 아이폰으로 사진도 잘 찍지 않는다. 메모용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고작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왜 아이폰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난 특별히 대답을 못 한다. 왜냐하면 특별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만지고 싶고, 보기 좋아서 좋아하는 것뿐이니 말이다.
애플 제품은 기술 시장에서 항상 인기를 얻는 옵션으로서, 나를 비롯해 전 세계 많은 사람은 아이폰(iPhone), 아이패드(iPad), 아이팟(iPod)을 선택한다. 사람들에게 이런 제품에서 ‘i’가 뭘 가리키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internet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틀린 대답은 아니다. 하지만 이 외 다른 것도 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는 1998년 아이맥(iMac) 출시 행사에서 ‘i’가 internet, individual, instruct, inform, inspire’의 첫 글자를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모두 애플 제품에 어울리는 표현들이다. 그런데 그는 ‘i’가 인칭대명사 ‘I’를 가리킨다고도 말했다.
나는 iPhone에서 ‘i’가 인칭대명사 ‘I’라는 것에 국한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iPhone은 ‘내 폰’이라는 뜻의 my Phone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소유격 대명사 my가 맞지만, 주격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스티브 잡스가 애플 제품에서 추구하는 창의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my Phone에서 iPhone이라는 독창적인 제품명을 만들기 위해 세 가지 규칙이 위반되었다. 하나는 소유격 대신 주격을 사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문자 대신 소문자를 사용한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띄어쓰기 오류이다.
‘나’라는 한 개인을 강조하는 애플 제품은 낭만주의(romanticism)를 생각나게 한다. 역사적으로 18세기말에 촉발되어 불과 19세기까지 펼쳐진 예술/문화 운동인 낭만주의는 인간의 주관적 느낌과 정서, 열정, 공포, 우울 등을 되살리고 해방하려 했다. 또한 인습과 전통으로부터 개인적 해방과 자유를 추구했으며, 숭고함과 같은 우리 인간의 새로운 미적 체험을 탐구하는 등 갖가지 신비로운 결합을 시도했다. 그리고 낭만주의는 개인의 예술적 천재성과 일반적인 개인성, 자기주장, 자기표현을 찬양했다.
낭만주의는 합리주의와 객관성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고, 낭만주의와 IT 기술은 상반되는 느낌이 든다. 전자기술 장치에는 낭만적인 것이라곤 전혀 없고, 오히려 낭만주의를 배척하는 과학 지향적 세계관에 부합한 듯하다. 많은 사람은 낭만주의와 기술을 정반대되는 것으로 본다. ‘기계’의 뉘앙스를 가진 기술은 소원하고, 건조하며, 생명이 없고, 사랑도 없다. 따라서 기술과 기계는 열정, 사랑, 그리고 자유와 자기표현, 자연, 영성, 진정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낭만적 영혼이 바라고 갈망하는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IT 기술 장치의 사용 측면에서는 낭만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아이폰은 의사소통의 도구이지만, 우리는 이런 아이폰을 ‘사랑’한다. 우리는 아이폰과 한시라도 떨어져 있는 것을 참지 못한다. 손에 쥐고 있든 호주머니나 가방에 넣고 다니든, 아이폰과의 거리를 좁히지 않으면서 친밀감을 유지한다. 기술이 조금만 더 발전하면 아이폰을 몸속에 넣고 싶은 사람들까지 나올지 모를 일이다. 아이폰을 생 폰으로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보호용 케이스는 말할 것도 없고, 예쁜 케이스를 끼워 내 아이폰을 꾸미기까지 한다. 애플에서 판매하는 아이폰 관련 액세서리의 가격도 어마어마하다. 가죽 케이스든 투명 케이스든 케이스의 가격은 7, 8만 원 정도이고, 전원과 케이블도 타제품에 비해 비싸며, 에어팟이라는 무선 이어폰 가격도 고가에 해당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애완견에게 많은 돈을 투자하듯이, 아이폰 사용자는 사랑하는 아이폰을 위해 이런 고가의 제품에 과감히 돈을 투자한다. 아이폰은 애완견과 같은 수준에 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아이폰을 항상 들여다본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Narcissus)가 연못을 들여다보듯이 말이다. 우리는 아이폰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으면서 지식도 쌓고, 내 생각이나 자신을 표현하면서 글도 적고, 나의 일상을 담은 사진도 올린다. 은행 업무도 아이폰으로 하고, 보험료 청구도 아이폰을 통해서 한다. 이 아이폰 때문에 은행과 보험사라는 타인과 직접적인 대면을 할 필요 없고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내 기억의 일부도 아이폰에 저장되어 있다. 이런 아이폰은 이제 확장된 인지 또는 분산 인지가 되었다. 분산 인지는 인지 활동과 문제해결이 개인의 마음을 넘어 아이폰과 같은 인공물에 걸쳐 분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 인간은 다양한 종류의 인공물로 뇌 구조, 인지 과정, 감각 능력 같은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생리적 지능을 증강하도록 진화상 설계되었다. 우리는 뇌에서만 인지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폰과 같은 인공물에도 인지 활동을 위탁한다. 이제 아이폰을 잃어버리는 것은 인지 활동의 주체인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에 맞먹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아이폰과 관련해 기술낭만주의(technoromanticism)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기술과 낭만주의를 매끄럽게 융합시킨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낭만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기술 부분에서도 낭만주의자이다. 우리는 낭만주의를 아이폰으로 물질화한 것이다.
이런 물질적 낭만주의 시대에 아이폰 화면을 낭만적으로 들여다보면서 우리 자신만 보고 주변의 현실을 놓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나르시스라는 목동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르시스는 여러 요정의 구애를 받을 정도로 매우 잘생겼다. 하루는 양 떼를 몰고 거닐다 연못에 다다른 나르시스는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은 세상에서 처음 보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나르시스가 그 얼굴을 만지고 싶어 손을 집어넣으면 파문에 흔들리다가 사라지고, 잔잔해지면 또다시 나타나곤 했다.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모습이 자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 얼굴과 깊은 사랑에 빠진다. 결국 나르시스는 그 모습을 따라 물속으로 들어가 숨을 거두고 만다.
오늘날의 우리가 아이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현상을 나르시스가 물속을 하염없이 보면서 자기도취에 빠져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현상에 비교하는 것은 분명히 과장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하면 우리는 죽음까지는 아닐지라도 잃을 것이 분명 많을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사랑하는 가족의 애정이 깃든 접촉을 잃을 수 있고, 친한 친구들과의 유익한 대화도, 책을 보면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시간도, 외부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좋은 건강도 잃을 수 있다.
이런 나의 걱정에 반문하면서, 우리가 아이폰을 통해 소셜 미디어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철저한 개인 중심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소셜 미디어 활동은 진정한 의미에서 낭만주의의 모습이 아니다. 오늘날 소셜 미디어와 더불어 사는 우리는 ‘사회의 사람’이다. 낭만주의자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실제로 사회의 사람을 경멸했다. 이런 사람은 외모에만 신경을 쓰고 늘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속적인 확인을 필요로 하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만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는 나 자신만 봐도 내가 올린 글에 몇 명이나 ‘라이킷’했는지에 관심을 두고, 또 조회수는 몇 명이나 되는지에 신경을 쓰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상대방의 ‘좋아요’와 ‘엄지척’을 너무 좋아한다. 이 ‘좋아요’의 숫자와 방문자 숫자가 블로그나 유튜브로 수익을 창출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냥 나도 모르게 ‘좋아요’의 지배를 받고 사는 듯하다. 연인 관계에 있는 남자가 자기 여자친구의 친구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 그것을 우연히 알게 된 그 여자친구는 남자친구에게 왜 자기 친구가 올린 인물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냐고 따지면서, 그 친구가 그렇게 좋으면 자기 말고 그 친구랑 사귀라고 투덜댄다. 이처럼 ‘좋아요’는 연인 사이에서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기술낭만주의 시대에서 기술 발전은 누구도 멈춰 세울 수는 없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리고 국가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IT 기술은 현재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수준까지 발전할 것이다. 이 시대는 기술의 시대이지만, 이 기술의 시대로 인해 낭만주의 시대이기도 하다. 기술과 낭만주의는 이제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융합되어 있다. 기술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지만, 낭만주의는 내 개인의 것이므로 내 의지가 동원될 수 있다. 낭만주의에서 찾을 수 있는 진정성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도록 뭔가 할 수 있는 길이 우리 각자에게 열려 있을 것이다. 무엇의 진정성이고 무엇의 아름다움인지는 나도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개인마다 진정성과 아름다움의 대상은 있을 것이다. 이 기술낭만주의 시대에 나만의 진정성과 나만의 아름다움을 놓지 않은 나만의 삶을 추구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