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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May 25. 2024

생태인문학을 향한 발걸음

《물의 아이들》이 인지언어학을 만나다

우리나라 대학을 비롯해 전 세계의 대학은 인문학부, 이학부, 공학부, 예술학부, 체육학부처럼 여러 단과대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다양한 전공 분야가 어울려 하나의 대학을 형성한다는 대학 설립의 취지에 따른 것이다. 어울림과 통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전공 분야가 이처럼 세분화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문제는 형식적으로는 대학이 통합된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인류학, 예술사, 비교문학과 민족문학, 철학, 종교학 같은 인문학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캠퍼스 건너편의 신축 건물에 있는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동료 교수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자신들의 연구만 하면서 살아간다. 인문학자들은 자연과학에 대해 거의 모르거나 아무것도 모른다. 자연과학 교수들도 건너편의 낡은 건물에서 인문학 교수들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하고 심지어는 그런 연구에는 관심도 없다. 심할 때는 인문학 교수와 자연과학 교수는 자신만의 연구만 중요시하고 다른 분야에서 진행되는 연구는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즉,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융합과 통섭을 이루지 못해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대학 캠퍼스 내의 현실이다. 이런 대학의 비(非)통합 현상을 안타깝게 여기면 서 캐나다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의 동양철학 교수 에드워 드 슬링거랜드(Edward Slingerland, 1968~ )는 현재 전 세계의 대학을 ‘진 정한 대학(true university)’이 아닌 ‘이중적 대학(biversity)’이라고 부른다. 진정한 대학은 대학 캠퍼스 내 서로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전문지식을 교환하고 공동 연구에 참여하면서 학제성(interdisciplinarity)을 추구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중적 대학에서는 이러한 학제성 추구에 관심이 없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이중성도 심각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연구가 이 루어지는 인문학 내의 어문학부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이어진다. 인문학 과 자연과학은 멀리 떨어진 서로 다른 건물에서 연구가 이루어지므로 이 들 분야의 교수들이 서로 만남과 대화가 부족할 수 있는 것은 일정 부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동일한 어문학부 소속으로 같은 건물에 연구실이 있 는 교수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특히 같은 학과의 언어학 교수와 문학 교수는 학과 차원의 공식 행사에서는 서로 만나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지만, 각자의 연구 분야에 대해서는 그렇게 적극적인 공동 활 동을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언어학 교수는 문학 교수의 전공이 무엇 인지는 알지만, 그 전공에서 진행되는 연구 자체에 큰 관심이 없다. 문학 교수도 언어학 교수의 연구에 대해 그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언어학과 문학은 같은 학과로 분류되어 있지만, 동료 교수들 간에도 학술적 교류는 거의 없고 엄격한 경계를 긋고 각자의 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경계선을 넘는 연구를 대학원 학생이 진행한다면 두 분야의 교수들로부터 이상할 정도로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고 학생은 어디에서 어떻게 논문지도를 받을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일어난다. 에드워드 슬링거랜드 교수가 추구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이 이루어지는 ‘진정한 대학’으로 가기 위한 첫걸음은 인문학 내에서, 특히 어문학부 내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문학 작품을 생태언어학적 관점과 인지언어학적 방법론에 기반하여 분석함으로써 어문학 내의 학문적 통섭을 추구하려는 작은 발걸음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문학 텍스트에 내포된 생태적 의미를 언어적으로 구조화하고, 생태적 가치관을 실현하는 언어의 중요성과 역할을 확인하면서 생태인문학(ecological hummanities) 연구의 출발점을 제시한다. 이 연구의 주요 특징은 개념적 은유, 개념적 혼성, 범주화 체계와 현저성 등의 인지언어학적 분석 도구를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문학 텍스트를 바라보는 다채로운 시각과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책은 《물의 아이들》이라는 영국 소설과 이탈리아 문학 《신곡》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작품 간의 영향 관계를 더 넓은 시야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창구도 제공한다.


생태 위기가 날로 심각해지고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아와 세계를 생태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가치관의 형성이다. 이 책에서 진행하는 생태인문학적 논의가 학문 간의 경계를 허물고 조화와 융합을 모색하는 연구 방향으로의 전환에 있어 중요한 초석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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