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UBC) 동양철학 교수인 에드워드 슬링거랜드(Edward Slingerland)가 2008년에 출간한 《What Science Offers the Humanities: Integrating Body and Culture》(과학이 인문학에 제공하는 것: 마음과 문화의 통합)를 번역하여 이를 한국어판 《과학과 인문학: 몸과 문화의 통합》(2015)으로 출간했다. 나는 번역 중에 난해하거나 애매한 부분에 대해 질문하는 메일을 슬링거랜드 교수에게 보냈고, 슬링거랜드 교수는 친절한 답변을 보내주었다. 이런 교류로 슬링거랜드 교수와 나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 번역서가 출간될 무렵에 한국어판 서문을 요청하는 메일을 슬링거랜드 교수에게 보냈는데, 이상하게 답 메일이 한동안 오지 않았다. 원래 메일을 보내면 바로바로 답장을 보내는 분이라 이상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 달 뒤에 한국어판 서문을 보내주면서 자신이 최근에 매우 바빴던 사연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당시 그는 2014년에 《Trying Not to Try》라는 일반 대중서를 출간했고, 이 책 홍보를 위해 전 세계를 다니면서 강연 중이었다. 그는 이 책이 고대중국 사상에서 핵심인 ‘무위(無爲)’라는 개념이 주제이고, 이 개념을 인지과학으로 설명하면서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어떻게 무위를 도입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책의 한국어 번역에 관심이 있는지 나에게 물었다. 난 그 당시에 인지언어학 관련 책을 번역 중이었고, 고대중국 사상에 대해 상식 외에 특별한 지식이 없었으며, 인지과학을 통해 무위의 속성을 밝혀서 이를 일반 대중에게 확산하려는 이 책의 기획에 압도되어 번역 의사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알렸다.
몇 년이 지나고 2017년이 되었다. 우연히 프리랜서 번역가인 후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요즘 인지과학이 대세인데 자기랑 그런 부류의 책을 공동 번역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인지언어학 관련 책을 많이 번역했으니, 그 모태가 되는 인지과학 책을 한 권 선정해 달라고 했다. 한참을 고민하다 몇 년 전에 슬링거랜드 교수가 제안한 《Trying Not to Try》가 생각이 났다. 그 책의 내용과 저자인 슬링거랜드 교수와 나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그 책을 후배에게 추천했다. 후배는 단번에 책 내용도 좋고 내가 저자와도 계속 연락이 된다는 점에서 이 책으로 추진해 보자고 했다.
후배는 자기 책을 출간했던 출판사 한 곳에 번역서의 출간을 의뢰했다. 며칠 후 그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국내 에이전시에서 확인해 보니 그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이 이미 한국의 다른 출판사와 계약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발 늦었다고 생각하면서 아쉬움만 달랬다. 그러던 중 갑자기 우리 둘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과연 국내 어느 출판사가 계약했을까? 번역서 출간을 의뢰했던 그 출판사에 알아보니, 국내의 한 거대 출판사였다. 근데 놀라운 점은 저작권료, 즉 선인세가 무려 1만 달러(약 1천2백만 원)였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번역했던 책들의 저작권료는 대부분 1천 달러에서 1천5백 달러 수준이었다. 그 금액에 비하면 내가 보기에는 엄청 비싼 선인세를 그 출판사가 슬링거랜드 교수에게 지급했다. 그 거대 출판사가 선인세로 1만 달러를 지급했다는 것은 그 책의 번역서로 작은 건물 하나 올리겠다는 의중이었다. 그 거대 출판사는 그 책이 그만큼 시장성이 있다고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책이 출간되자마자 바로 저작권 계약을 체결하면서 1만 달러를 바로 지급했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2014년 당시 슬링거랜드가 나에게 그 책 번역을 요청했을 때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 출판사도 건물 하나 올리고, 나 역시 인세로 엄청 많은 돈을 벌었을 것 같다. 이미 지난 일이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이후로 《Trying Not to Try》의 한국어 번역은 잊고 있었다. 그런데 문 듯 그 거대 출판사가 계약한 시점이 2015년이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나 2017년이 되었으니 그 책의 번역서가 출간되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점에서 확인해 보니 아직 출간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상한 것은 그 책의 초고가 완성이 되었고, 출판사에서 내가 아는 전남대학교 동양철학과 교수에게 감수를 맡겼으며, 그 교수도 감수를 끝내고 출판사에 자료를 넘겼다는 것이다. 감수 자료를 넘긴 지도 6개월 정도가 지났다는 것이 그 감수한 교수의 설명이었다. 본인도 책이 나오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다. 그냥 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책에 관한 관심은 다시 희미해졌다.
그런 와중에 2017년 6월 23일 아침 9시에 슬링거랜드 교수에게서 메일이 왔다. 《Trying Not to Try》의 한국어 번역서를 국내 한 출판사에서 출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출판사가 마음을 바꿔 책 출간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추천하는 출판사가 있으면 그 출판사에서 출간하고 내가 그 책 번역을 맡아주면 어떠냐고 했다.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라 일반 대중서이므로 독자도 많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하고는 싶지만 기존 국내 출판사에서 선인세 계약을 1만 달러에 했다고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내가 아는 출판사에서는 그 금액으로 계약할 곳이 없다고 전했다. 그러자 슬링거랜드 교수는 자기는 이미 1만 달러의 선인세를 받았으므로 선인세에 대한 추가 욕심은 더는 없다고 했다. 그냥 계약에 필요한 명목론적 금액만 지불하고 계약을 하도록 자기 에이전시에 말해 놓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국내 어떤 출판사가 이 책 번역서 출간을 맡아 줄지 고민도 하지 않고 무조건 하겠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슬링거랜드 교수의 에이전시 담당자에게서 메일이 왔고, 선인세 5백 달러에 계약하자고 했다. 나는 이 책의 번역서 출간을 맡아 줄 출판사를 아직 정하지 않은 상태라서, 국내 출판사와의 좀 더 매끄러운 계약 성사를 위해 선인세를 좀 더 낮추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슬링거랜드 교수와 주고받았던 선인세 관련 메일을 그 담당자에게 전달하면서 명목상의 금액이니 3백 달러에 계약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저자인 슬링거랜드 교수에게 한 번 더 확인하겠다고 했고, 슬링거랜드 교수도 최종적으로 그 금액에 오케이를 해 주면서 선인세는 3백 달러로 정해졌다.
난 선인세 3백 달러라는 무기를 들고 몇 군데의 출판사에 번역서 출간제안서를 보냈다. 모두 별 반응이 없었다. 번역서 출간이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는 사업이 아니라는 것이 그런 출판사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도서출판 고반에서 관심을 보였다. 그 출판사의 대표님은 동양철학을 전공하셨고, 그쪽 계열의 책을 매우 좋아하시는 분이었다. 책 내용도 동양철학인데, 그 동양철학을 인지과학 관점에서 살핀다는 것이 신기했다고 하면서 번역서 출간을 결정하신 것이다. 드디어 2017년 7월에 도서출판 고반에서 한국어판 저작권 계약을 체결하고, 번역 작업과 출간 작업에 들어갔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2018년 9월 17일 도서출판 고반에서 이 책의 한국어판을 《애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책이 출간되고 나서 출판사 대표님과 식사를 하면서 이 책이 이런 사연으로 결국 고반에서 출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때 대표님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럼 잘만하면 우리가 건물 하나 올릴 수 있겠네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나도 웃으며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고, 건물 하나 올리면 그 건물 구석에 작은 내 작업실 하나 마련해 달라는 농담을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평범한 판매 실적이었다. 그나마 다음 해 세종도서 교양부문에서 우수도서로 선정되는 결과는 만들어내었다.
많이 돌아오긴 했지만 결국 나는 슬링거랜드 교수의 《Trying Not to Try》를 《애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로 구현시켰다. 그리고 이 책 출간 후 나의 사고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실 변화라기보다는 내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것이 자리를 잡아갔다고 하는 편이 맞는 말이겠다. 그렇다, 나는 《애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라는 책으로 나의 모습을 다듬어갔던 것이다.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내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