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맡겨진 소녀'를 읽고
시와 닮은 소설을 읽었다.
90쪽이 채 안 되는 짤막한 분량.
제한된 길이에 단련된 시인들처럼,
클레어 키건은 '애쓴 흔적을 들어내는 데 많은 공을 들이는' 작가다.
풋내기들이 섣불리 흉내 내면 뻘소리가 돼버리지만
대가들은 글과 글 사이의 빈 공간마저도 분위기와 감정을 담아낸다.
이번에 산 책들 중 가장 얇은 책이라 먼저 집어 들었지만 온전히 이해하는데 500쪽이 넘는 책 보다 오래 걸렸다. 독자의 지력을 믿고 최대한 함축적으로 쓴다는 키건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고, 이건 좋은 시를 읽을 때도 이따금 경험했던 일이다.
맡겨진 소녀는 이적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란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다시 나는 홀로 남겨진 거고
모든 추억들은 버리는 거고
역시 나는 자격이 없는 거지
거짓말, 음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하지만
응당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게
가장 불행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사랑받고 다정하게 대해지는 게 아픔으로 묘사된다.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따스함을 겪어보지 못한
아이에게는 마치 '처음 만난 불'과 같다.
따뜻하지만 너무 다가가면 데이지 않을까 걱정스런.
내가 아빠인 입장에서 바라보건대,
주인공 소녀에게 아빠란 존재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없는 존재였다가
한 철의 여름 동안 갑작스레 나타났다.
그게 같은 '아빠'가 아니었지만.
책을 읽고 곰곰이 '부모'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태어나게 해 준 생물학적 의미는 '부모'라는 단어를 채우는데 몇 %에 해당할까. 분명한 건 아무리 내 아이라도 조건 없는 사랑을 충분히 건네지 않았다면 100% '부모'라 부르긴 힘들 것이다. 적어도 아이의 마음속에선.
'킨셀라 아주머니는 노란 비누와 세수수건, 머리빗을 준다. 물건을 하나하나 모으면서 나는 우리가 함께한 나날을, 우리가 물건을 샀던 곳과 이따금 나누었던 대화를, 그리고 거의 항상 빛나고 있던 태양을 떠올린다.' - 맡겨진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