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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끄적쟁이 Mar 08. 2023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씨줄과 날줄, 사유의 확장 19. 고통의 비밀, 나이듦에 관하여  3부

씨줄과 날줄, 사유의 확장 19. 고통의 비밀, 나이듦에 관하여 3부

(연관성이 있는 2권 이상의 책을 엮어 사유의 폭을 확장하는 이야깃거리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커버사진 출처: 티스토리


[먼저 읽으면 좋은 글]

누구나 어리고 젊었던 적이 있었고 누구나 늙는다

씨줄과 날줄, 사유의 확장 19. 고통의 비밀, 나이듦에 관하여 2부


제4연령기

사람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떠올리기조차 두려운 고민이 생긴다.
내 정신이 먼저 망가질까, 몸이 먼저 망가질까? 아니면 둘이 동시에 맛이 갈까?


노인학에서는 죽음 직전의 마지막 단계를 '제4연령기'라 말한다. 자아의 의지, 정서적 교감, 사회활동을 모두 포기하고 출구 없는 체념의 세계로 넘어가 버리는 나이라는 의미다. 병이 정면으로 쳐들어오는 젊은 시절과 달리 노년기의 병은 기본 신체 기능을 조금씩 떨어뜨리면서 밤손님처럼 몰래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죽음이 가까워 오면 마음부터 시들게 된다. 이렇게 삭아버린 마음의 고통은 몸뚱이를 고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인생이 의미 있고 없고를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 한 사람의 인격체가 살아갈 의미를 확실히 잃었다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으며 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


내 머릿속의 지우개

알츠하이머는 음흉한 안개와 같다. 언제 오는지도 모르게 다가왔다가 물러가고 나서야 모든 게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안개 없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음을 믿을 수 없게 된다.
 - 존 베일리 <아이리스를 위한 노래>


치매 초기의 증상은 워낙 미묘해서 오직 노련한 전문가나 기민한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다. 혼자 엉뚱한 망상에 빠져 있거나 괜히 흥분해서 헛소리하는 사람을 두고 섬망 상태라고 얘기하는데, 나이 불문 누구에게나 발병할 수 있지만 치매가 있는 노인에게 아주 높은 확률로 찾아온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매 중 가장 흔한 유형으로, 서서히 발현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까닭에 첫 증상이 시작되고 여러 해를 넘긴 뒤에야 진단이 내려지곤 한다. 초기에는 징후가 너무나 미세하기에 나이 혹은 부주의 탓으로 돌려지기 십상이다.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치매 환자는 진짜 같은 가짜 현실을 만들어 내곤 한다. 그 증거는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한참 생각하고 디테일에 집착하는 것이다. 희로애락이라는 인간적인 감정 대부분은 어떤 대상에 대한 기억에 의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치매는 기본적인 인간성을 무너뜨리는 병이라 할 수 있다.

기억이 사라져도 눈부셨던 순간의 행복감은 남아있을까?, 출처: JTBC


노인네에겐 노인내가 난다

나는 현관에서부터 악취를 감지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 심할 게 분명했다. 애초에 시나몬의 안내는 필요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각이 나를 환자에게 인도하고 있었다.

노인들이 지내는 방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정들지 않을 것 같은 냄새가 난다. 보통 늙은이 쉰내라고 얘기하는 '노인내'에는 부정적인 편견이 반, 불편한 진실이 반 숨어 있다. 깔끔한 노인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보통 사람들의 냄새와 전혀 다르지 않다. 문제는 나이를 먹을수록 후각은 쇠퇴하는 데 씻는 행위 자체가 노인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노동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는 냄새가 나는 걸 잘 느끼지 못하고, 감지하더라도 힘에 부쳐 심해질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사실 체취 자체는 노년기에 오히려 줄어든다고 한다. 고령 노인들이 더 자주 씻기 편한 환경이 갖춰지면 좋겠다.)

잊고 있던 냄새에 대한 자각은 한 인간의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출처: 기생충


사회적 통증


쇠퇴하는 후각만큼이나 청력 저하도 노인의 기본권 상실과 직결된다. 청력이 떨어지는 노인은 귀가 밝은 노인에 비해 인지장애가 3년쯤 더 빨리 찾아온다고 한다. 일상생활이 불편해지는 것은 물론이요 사회적으로 고립되며 가족 간 갈등 및 의료진과의 의사불통이 잦아진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 우울증, 불안, 편집증이 생기기 십상이다. 이런 것들은 '사회적 통증'이라 부르는데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이 통증을 악화시키거나 만들어내는 것이다.


누군가 집배원이 오는지 안 오는지로 요일을 짐작하고 24시간 중 대부분을 자는 데 쓴다면, 십중팔구 그의 일상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고 어느 누구와도 말 섞을 일 없는 고독한 날들의 연속일 것이다. 말하자면 사망예정자 대기실에 머무는 셈이다.


죽음보다 못한

차갑게 식은 오줌물로 흥건한 기저귀를 며칠째 차고 누워 있는 그녀에게, 만약 내가 그녀의 입장이라면 순간의 절망적 현실에 마음이 휩쓸려 나중에 후회할 판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죽음보다 나쁜 상태로 일컫는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한다.

1) 변실금과 요실금

2) 아침에 혼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

3) 24시간 간병 필요

4) 영양공급 튜브 삽입 필요

5) 호흡보조 튜브 삽입 필요

6) 하루 24시간 착란 상태


삶의 막바지 어느 순간, 의학 치료가 환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하고 의미 없는 시간만 연장시키는 때가 온다. 노인 자신은 일분일초가 불행하지만, 자신을 걱정하고 지지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생각해 끈기 있게 버텨 내는 순간이다.


인간답게 물러날 권리


이제 이것도 안 되네.

그는 슬픈 듯 덧붙였다.

나는 이제 맘대로 자살도 못 하나 보오.


똑같이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누군가는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을 간절히 바랄 때 다른 누군가는 내 집에서 맘 편히 있는 쪽을 택한다. 후자도 당연히 살기를 원한다. 다만, 병원에 갇혀 하루 24시간 약에 절어 있는 방식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의 가치관에 따르면 그건 살아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 살면서 이룰 것들을 다 이뤘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어떤 것일지 뻔히 예상될 때, 인간답게 물러날 시점을 스스로 정할 수 있게 허용해야 할까? 만약 허락한다면 목숨을 부지시키는 치료를 받지 않는, 이른바 '수동적 안락사'까지 일까, 아니면 끝이 가까운 게 분명한 이들이 당장 생을 끝내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조치하는 '능동적 안락사'도 용인해야 할까?


법전에 명시된 존엄사의 대상은 예상 수명이 6개월 이내인 시한부 환자로, 정신이 또렷해 논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면서 신체 건강이 안락사 약물을 스스로 투약할 수 있을 만큼은 양호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세상을 살 만큼 살아 본 노인 삶의 만족도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 하나는 사회 참여(즉, 인간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즉, 삶의 목적)다. 이 둘과 단절된 채, 내 몸뚱이, 내게 일어나는 일, 나아가 인생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된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은 치료를 빙자한 폭력일 수 있다.


그는 의사들에게 자신의 뜻을 확실하게 못 박는다. 자신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살 만큼 오래 살았다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느냐가 아니라 하루든 한 달이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라고 말이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순간을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에 쏟아붓기를 원했다.


정해진 정답은 없다. 환자 자신과 가족이 내리는 결정이 가장 정답에 가까울 뿐이다.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그런데 신기한 게, 초상나기 일보직전의 그 와중에도 집 안은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가족이 총출동해 온전히 현재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당시 집에 남겨 두고 온 배우자나 내팽개치고 온 직장 일에 대한 걱정은 티끌만큼도 우리의 안중에 없었다. 우리가 거기에 있는 게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졌다.


누군가에게는 전 세계가 생활공간이겠지만 4연령기 어르신들에게는 자기 집, 심하면 침대 한쪽이 온 우주다. 그들에게 가장 큰 소망이라고 해봐야 가끔 바깥공기 한번 쐬는 게 고작이다. 자유롭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건강했던 시절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게 단 하루라도 말이다.

지금 그들이 목말라하는 것은 삶의 목적, 의미, 

그리고 

.

.

.

.

.

선택할 기회이다.


내게 생과 사를 직시하고 반추할 담대함이 있었다면,
우리 아이들을 다르게 키우고... 죽어 가는 것도, 죽는 것도 삶의 일부임을
인정할 수 있었을 텐데.-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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