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작 Oct 29. 2023

17년 만의 조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J언니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나를 17년 전 그날로 데려다 놓았다.

제법 옷차림이 두툼했던 계절, 우리는 방송국 휴게실 한편에 서서 누가 들을세라 조심조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대화를 나눈다기보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언니의 말에 순종적인 태도를 취했다. 사회 초년생이자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나에게 퇴사를 앞둔 J언니는 산 같은 존재였다.


"너, 내가 왜 이 일 그만두는 줄 알아?"

J언니는 담배를 하나 피워 물며, 방송국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목표는 교양 프로그램 작가가 아니라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야. 그래서 서울로 가려고. 나는 중학교 때부터 글을 써왔기 때문에 자신 있어. 꼭 성공할 거야."


그때까지 나는 자신의 미래에 이토록 확신에 차있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에 J언니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경이롭게 다가왔다. J언니는 내가 자신의 후임으로 방송국에 들어왔지만, '네가 너무 아는 것이 없어서 걱정'이라며 가는 날까지 날 걱정했고, 진심으로  '이 길이 너에게 맞는 길인지 고민해 보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나는 글이라고는 써본 적도 없는 데다 내게 맡겨진 임무가 자료조사임에도 인터넷 검색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뒤늦게서야 작가실 언니들은 내가 방송 프로그램 모니터 요원으로 면접을 봤다가 그 자리에서 면접관이 '신문방송학과니까 자료조사 한 번 해보지'라고 해서 작가실에 오게 됐다는 걸 알았고, 내가 일을 잘 못하는 이유를 이해(!)해주었다.


나는 J언니의 말과 작가언니들의 눈빛에 오기가 생겨 날을 새 가며 아이템을 찾았고, 선배들의 원고를 필사했다. 그렇게 자료조사에서 보조 작가가 된 후, 입봉 제안을 받게 되자 조금 더 큰 곳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기야 J언니처럼 서울로 가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구성작가 구인 광고를 뒤적거리며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이메일로 이력서나 포트폴리오를 보내면 되지만, 그때는 직접 들고 찾아가야 했기에 나는 일하고 있는 방송국에 말도 하지 않고 서울로 향했다.


부모님께서는 서울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나의 결심에 현실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며 절대 안 된다고 만류하셨지만 되든 안 되든 일단 부딪혀보고 싶었다. 나는 그동안 썼던 방송 원고 중 그나마 괜찮은 것과 이력서를 들고 방송국 근처에 있는 외주 업체의 문을 두드렸다. 내 기억으로 이곳은 아침에 하는 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외주 업체였던 것 같은데, 들어서자마자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 만큼 뭔가 불편한 냉기가 느껴졌다.


피곤에 절어 있는 표정으로 컴퓨터 화면만 보고 있는 작가와 며칠 씻지 못한 듯 초췌한 몰골로 앉으라고 권하는 피디. 나는 피디에게 준비해 온 서류를 보여줬지만,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며 바로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말에 그만 겁이 나서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둘러대고 서둘러 그곳을 나왔다. 방송가의 각박함과 고단함이 그 작은 사무실 안에 응축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나는 별 성과도 없이 집에 가는 게 아쉬워서, 오랜만에 J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이뤘는지, 서울의 구성 작가는 어떤 대우를 받는지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언니의 목소리는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다. 몸이 아파서 만나지 못하겠다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걱정이 됐지만, 찾아가는 것도 예의는 아닐 것 같아 고속버스 터미널로 발길을 돌렸다.


그 후 J언니와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고, 내 기억 속에서도 언니의 존재는 잊혀 갔다.

그런데 몇 달 전 남편에게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새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작가님을 한 분 소개받았는데, 이야기 끝에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마침 내 생각이 나서 '제 아내도 000 방송국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이름이 000입니다'라고 말했더니 그 작가님이 너무 놀라 한동안 말을 못 하더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 남편에게 그 작가의 이름을 듣자마자 입이 쩍 벌어져서 다물어지지 않았다. J언니와의 인연이 이렇게 다시 이어질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인생은 회전목마라더니, 돌고 돌아 다시금 만나게 된 우연이 너무 신기했다. 남편은 J언니의 번호를 알려주며 한번 통화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듣게 된 언니의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는데,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것도 변함없었다.


"그동안 힘들지 않았어?? 0 피디님은 일밖에 모르는 것 같던데. 애들도 혼자 다 키웠지?"


J언니와 통화하며 역시 이 바닥을 아는 사람이라 질문이 허를 찌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언니와의 대화는 17년이란 공백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나는 오래전 확신에 차 있던 언니의 목소리를 떠올렸고, 언니는 지금 생활에 만족하는지 물었다.


"나? 아직은 아니야. 성공하려면 멀었어.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서 몸도 아프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어."


J언니는 꿈꾸던 대작가가 되지 못했다고 한탄했지만, 이미 남편에게 언니의 커리어를 들은 터라, 충분히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정말 멋지다고 말해주었다. 드라마를 대표하는 메인작가에 이름만 올리지 못했을 뿐, 이미 언니는 전 국민이 푹 빠져서 봤던 여러 드라마에서 핵심 역할을 했고, 어린이 영화,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본을 쓰는 작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언니의 앞날을 응원한다고 말했고, 꼭 건강부터 챙기길 바란다며 통화를 마쳤다. 나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