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사극에서 왜 신하들이 임금한테 ‘종묘사직을 생각하시옵소서’라고 말하는 줄 알아?”
“당연히 알지, 종묘는 왕실의 조상을 모신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의 신과 제사를 지내는 신을 말하니까, 왕이 결정을 잘못 내리면 신들의 화를 면치 못할 거라고 해서 그런 말이 나온 거잖아.”
“이야, 진짜 당신은 모르는 게 없다......”
나에게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내가 남편 앞에서 지적 우월감을 느끼다니. 정말이지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남편은 나보다 열 살이 더 많다. 공부도 많이 했다. 발자취를 남긴 대학과 대학원이 네 곳이나 된다.(졸업한 곳은 한 곳 뿐이다) 저마다 전공도 다르다. 게다가 인생에 우여곡절도 상당하다. 가수가 되기 위해 십 년 동안 밴드를 이끌었고 음악에 푹 빠져 살았다. 그때 별별 아르바이트를 다 해보았다는데 직장을 갖겠다고 마음먹은 후 입사지원서를 낸 곳만 백여 군데에 이른다. 그러다 무슨 영화 제목처럼 백한 번째 지원서를 낸 곳에서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그곳이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다. 남편은 이곳에 십 팔 년째 뼈를 묻고 있다.
남편을 처음 만난 곳은 작가 면접을 보기 위해 찾아간 방송국이었다. 그는 몇 명의 피디들과 함께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었고 나는 몇 명의 지원자들과 나란히 앉아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중에 들으니 나에게 제일 낮은 점수를 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별 ‘임팩트’를 느끼지 못했다나. 다른 심사위원들은 모두 나에게 좋은 점수를 줬다 하니, 그때 남편은 보는 눈이 없었던 것 같다.
그 후 우리는 같은 프로그램에서 작가와 피디로 다시 만났다. 당시에 나는 ‘아이디어 좋다’, ‘일 잘한다’는 평을 듣곤 했는데 남편에게 보여준 구성안과 원고는 단번에 오케이 되는 법이 없었다. 남편은 엄청나게 깐깐하고 꼼꼼했다. 뭐 하나 대충 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가 밉기보다 고마웠다. 늘 존댓말로 친절하고 따뜻하게 긍정의 언어를 사용하며 내가 바로잡아야 할 부분을 알려줬다. 그래도 그때까지 우리 사이는 그저 팀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한 건, 어쩌다 남편의 차를 타게 되면서였다. 시동을 걸면, 늘 처음 들어보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궁금해서 어떤 노래냐고 물으면 뮤지션과 곡에 대한 고차원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평론가 같기도 하고 디제이 같기도 했다. 가수를 한 사람이라 그런지 음악에 조예가 상당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넷, 그토록 똑똑한 남자를 현실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남편 덕분에 ‘DEPAPEPE’, ‘U2’, ‘콜드플레이’ 같은 밴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후 자연스럽게 나도 그들의 음악을 찾아 듣게 되었다.
1년 남짓 연애한 후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서 남편의 똑똑함은 종종 독이 되었다. 나는 이른 나이에 육아맘이 된 터라 만날 친구 하나 없었는데 남편은 회사 일에 치여 집에 오면 잠만 잤다. 워낙 밤샘 작업이 많은 직업이니 이해는 하지만, 휴가 계획도 잡기 어려울 만큼 바쁘게 사는 남편을 보자 모든 게 갑갑했다. 내 마음을 풀어낼 방법은 수다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편을 붙잡고 얘기 좀 할라치면, 그는 지친 얼굴로 스마트폰을 보며 영혼 없이 대꾸했다. 내가 뭘 좀 물을 땐 지루하리만치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모습이 마치 나를 가르치려는 듯 보였다.
내 안에 남편을 향한 불만이 쌓여갈 즈음, 남편 역시 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러자 남편의 말투는 전과 다르게 퉁명스러워졌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용건이 뭐냐고, 핵심만 말하라고 인상을 찌푸렸다. 결혼 생활에 대해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남편에게 더는 기대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에 입술을 꽉 물었다. 노년을 함께 보내지 않는 미래도 그려 보았다. 때마침 사춘기에 접어든 큰 아이도 멋대로 행동해 주었다. 내 행복은 남편도 자식도 아닌 나에게서 찾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비로소 내가 나를 보게 되자,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대학 이후 처음으로 구인 사이트를 드나들었다. 그러다 찾게 된 직업이 두 아이의 학업과도 관련이 있는 독서지도사였다. 아이들 책은 꿰고 있는 데다, 소일거리로 가늘고 길게 글을 쓰고 있던 터라 당장 시작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이 서른일곱에 강의를 들으며 독서지도사 과정 밟았다.
경제적 자립을 목표로 이 일을 시작한 덕분에(!) 오픈과 동시에 코로나가 터졌지만 주춤하지 않았다. 6세부터 중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책을 읽어야 했지만 일할 수 있어 즐거웠다. 내가 학생의 부모라면 어떤 교육을 원할지 고민했고, 수업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학생 수가 늘어가는 건 물론, 나의 배경 지식이 어마어마하게 쌓여갔다. 사회, 과학, 철학, 역사 등 모든 분야를 두루두루 알게 되었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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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경쟁력을 갖게 되는 이 시대에, 눈으로 읽는 데서 나아가 학생들과 책 내용을 복기하고 그 안에 담긴 주제를 이야기하며 글로 정리해 나가자 저자의 지식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자가 오랫동안 써 내려간 글을 단 몇 분, 몇 시간 만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정도였다.
지식의 인풋과 아웃풋이 나를 점점 근사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남편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남편도 교양 프로그램을 만들어 온 터라 어떤 박물관에 데려다 놔도 해설가 뺨칠 정도인데, 남편은 모르는 것을 나는 아는 그런 순간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자 내 안에 움츠리고 있던 자신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마음이 독서와 수업으로 이어져 매사 열정적인 사람으로 거듭났다. 남편은 나를 보고 일 중독자라며 혀를 내둘렀다. 내가 남편에게 자주 했던 말인데 남편에게 듣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노년에 혼자 여행이나 다니며 남편과 자식에 대한 걱정 없이 살고 싶던 바람이 사그라들었다. 일을 해보니, 나에게 짜증스럽게 말하던 남편의 당시 상황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나야 교육서비스업을 하는 개인사업자니 학생, 학부모와의 관계만 신경 쓰면 되지만 남편은 직장 선배부터 팀장, 부장, 사장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돌아보면 그런 부분을 일찍이 이해하지 못한 점이 미안하기도 하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고 남편과 아이가 원망스러웠던 시간이 오히려 나에게 집중하도록 했고 내면을 더 단단하게 해 주었다. 그 덕에 일이 바쁘면 며칠 동안 전화 한 통 없는 남편도, 시험 때만 되면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아이도 잔잔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개성이 다른 학생들과 소통하는 데에도 점점 도가 트여서 아이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내 감정이 휘둘리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이러니 요즘 학생들이 거만한 얼굴로 기쁨에 젖어 외치는 한 마디를 따라 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