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의 수업으로 구성된 한국사 통사 과정을 한 달 안에 끝내겠다고 하자, 5학년 학생들의 원성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매주 한 번씩 하던 수업을 갑자기 세 번으로 늘린 데다 오전 열 시에 시작한다고 하니 이 상황이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았을 겁니다. 방학 때는 늦잠 좀 자면서 쉬려고 했다는 둥, 한국사를 왜 해야 하냐는 둥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구석기 시대부터 한국의 근현대사까지 역사적인 흐름을 알려주고 싶은 저의 바람과 방학 동안 아이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걱정인 어머님들의 고민을 동시에 해결해줄 방법은 더 자주 만나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아우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몇 마디 덧붙였습니다.
“샘이 하나는 확실히 약속할 수 있어요. 수업이 늘어난 만큼 읽어야 할 책도 더 많아졌지만, 역사를 알면 나라를 생각하는 여러분의 마음과 자세는 지금과 다를 거예요.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함께 수업하면서 느껴보도록 해요.”
영화에 나오는 대사 같아 당황한 건지, 평소와 다르게 제 눈빛이 비장해 보였는지 학생들의 불만이 순식간에 잦아들었습니다. 잠깐의 정적 후, 우려 섞인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호기심을 품은 표정도 눈에 띄었습니다. 2학기 때부터 학교에서 역사를 배운다는 사실에 사뭇 긴장했던 아이들도 마음이 한결 놓인 듯 보였습니다.
수업에 자신감을 내비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사는 지루하다며 투덜대던 아이들도 막상 수업에 들어가면 달라진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세계를 떨게 한 몽골군을 고려는 어떻게 막아냈는지, 사도 세자의 이름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있는지, ‘일본’ 하면 부정적인 생각부터 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로 수업을 시작하면, 아이들은 금세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귀를 쫑긋했습니다.
아이들의 이런 모습은 역사에 문외한이었던 제가 역사애호가로 거듭난 과정과 흡사합니다. 한우리 교사를 하기 전까지는 저 역시 역사 관련 책은 외면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한우리 교사를 하며 다양한 책을 접하자 자연스레 배경지식이 쌓였고, 역사적 사건을 다룬 책이나 영화를 찾아볼 정도가 되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통사 과정을 스터디한 후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박물관을 가보고 싶다는 바람까지 생겼습니다. 인류의 발자취가 곧 나의 뿌리라는 생각이 새삼 든 까닭이었습니다.
방학이 시작되고, 5학년 아이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교실에 들어섰습니다. 엉덩이가 의자에 닿자마자 “졸려요” “언제 끝나요” “집 가고 싶어요”라는 아우성 3종 세트가 튀어나왔지만,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온전히 저에게 집중해주었습니다. 선사시대에는 숙제가 없어서 좋았겠다는 한 친구의 엉뚱한 생각이 수업에 웃음을 더했고, 삼국을 호령했던 왕들의 별명을 지을 땐 업적과 이름을 줄임말로 표현하느라 다들 고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알아가는 즐거움 끝에는 그날 배운 내용을 마인드맵으로 정리하는 독후 활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초반에는 마인드맵 작성 방법을 몰라 제 도움이 필요했지만, 수업 횟수가 더해질수록 개성 있는 마인드맵이 완성되었습니다. 주요 사건과 특징을 간략하게 담아내는 건 물론 연상되는 이미지를 그려주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열두 번의 여정을 마치던 날. 책거리로 떡볶이를 먹으며 아이들에게 수업을 마친 소감을 물었습니다. 대부분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다는 말로 포문을 열었지만, 한명 한명 발표할 때마다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한국사에 관심이 0%였는데 50%가 되었어요. 앞으로 더 책을 많이 읽어야겠어요.”
“우리나라의 과거 모습과 경제 발전 과정을 알게 되니 지식이 많이 쌓인 것 같아요.”
“한국사는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재미있었어요. 우리나라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고,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라도 나만 즐거운 수업은 아니었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아이들의 말을 들으니 안도감과 함께 뿌듯함이 밀려왔습니다. 아우성 3종 세트를 외쳤던 아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슴 아픈 역사에 공감해 주었고, 우리가 일궈낸 성장에 자긍심을 느꼈습니다. 제가 바라던 것도 바로 이런 ‘역사에 진심’ 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아이들과 수업한 내용을 어머님들께 보내드렸을 때입니다. 다른 아이들의 소감 발표에 미소만 지을 뿐, 자기 생각은 내비치지 않았던 아이의 어머님께 답문이 왔습니다.
‘선생님, 한국사 수업한 날이면 아이가 집에 와서 재미있게 이야기해주곤 했어요. 수업이 참 좋았대요. 앞으로 아이와 박물관에도 자주 가보려고요. 그동안 애쓰셨어요. 감사해요’
무엇보다 아이가 집에서 재미있게 이야기했다는 부분이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제가 준비한 수업이 아이들에서 그치지 않고 물결처럼 또 다른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고마웠습니다. 한여름의 무더위처럼 뜨거웠던 우리들의 한국사 수업. 역사에 진심을 보여준 아이들 덕분에 저도 한층 성장한 시간이었습니다.
** 이 글은 한우리독서토론논술에서 발간하는 교육 매거진 '한우리에듀레터' 및 '한우리독서토론논술 공식 블로그'에도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