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만이 허락된 외출

아이와 함께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이 왜 소비의 공간뿐이었는지


한참을 걷고 나서야 발길이 향한 곳은 결국 백화점이었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안고 번화가를 돌아다닐 수는 있어도, 실제로 머무를 수 있는 곳은 백화점뿐이었다. 그곳에는 적어도 수유실이 있고, 기저귀를 갈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잠시 앉아 숨을 고를 만한 자리가 있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인프라가 그나마 갖춰진 곳이었다.


나는 아이를 안고 자동문을 지나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며 바깥의 소음이 한 겹 걸러졌다. 차 소리와 매연, 거리의 분주함 대신 시원한 공기와 정돈된 조명이 맞아주었다. 그 순간 느꼈다. 아기를 데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도시 안에서도 어떤 공간은 갑자기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되고, 어떤 공간은 ‘지나칠 수밖에 없는 곳’이 된다는 것을.


백화점 안을 천천히 돌면서도 마음 한편은 씁쓸했다. 나는 쇼핑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소비를 즐기러 온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이와 함께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역할을 하는 공간이 거의 백화점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육아를 하는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와 숨을 돌릴 수 있는 장소가 소비 공간에만 기대고 있다는 건, 어쩌면 사회가 육아를 대하는 방식 그 자체를 보여주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 순간 오래전 들었던 어떤 말이 떠올랐다. 육아휴직에 들어가기 전, 회사에서 누군가 무심하게 던졌던 말이었다.

“남편들은 일하는데 여자들은 아이랑 백화점에서 논다.”

그때의 나는 그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아주 조금은 그런가 보다 하고 스쳐 들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참 부끄럽다. 직접 아이를 데리고 도시를 돌아다녀 보니 알겠더라. 그건 ‘백화점에서 논다’가 아니라 ‘백화점에서만 버틸 수 있다’에 가까운 말이었다. 집 안에만 있으면 너무 답답하고, 밖으로 나오면 아이와 함께 쉴 수 있는 곳이 거의 없고, 그나마 기저귀를 갈 수 있고 잠시라도 숨을 돌릴 수 있는 곳이 백화점뿐이니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날 나는 백화점 안을 이 층 저 층 천천히 걸었다. 아이는 내 품 안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낯선 불빛과 사람들을 바라봤다. 유리창에 비친 불빛,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는 사람들, 매장 밖에 전시된 형형색색의 물건들. 아이 눈에는 그것들이 다 어떤 풍경으로 보였을까. 나는 잠깐 벤치에 앉아 쉬고 싶었고, 뭐라도 사 먹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편히 쉬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외출은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긴장감이 있다. 지금은 조용해도 언제 울지 모르고, 배가 고플 수도 있고, 갑자기 졸릴 수도 있다. 어른 혼자라면 잠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쉬어갈 수 있는 시간도, 아이와 함께일 때는 늘 반쯤 긴장한 상태로 보내게 된다. 몸은 의자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계속 출구와 화장실, 수유실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게 육아 외출의 본질이었다. 쉬러 나왔지만, 사실은 조금도 완전히 쉬지 못하는 시간.


나는 문득 아내 생각을 했다. 아내는 이런 시간을 얼마나 많이 혼자 견뎌왔을까. 집 밖으로 한 번 나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계산이 필요한데, 그동안 나는 그것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했을까. 아이와 함께 외출하는 일이 ‘엄마가 아이 데리고 잠깐 나갔다 오는 일’ 정도로 보였다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시선이었다. 육아는 집 안에서만 힘든 게 아니었다. 오히려 집 밖으로 한 걸음 나가는 순간부터 더 많은 긴장과 판단과 눈치가 시작되는 일이었다.


백화점 안을 몇 바퀴 돌고 나자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있었다. 원래 계획은 아내가 끝날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를 다시 품 안에 단단히 안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바깥으로 나가니 서면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처음 도착했을 때의 설렘은 이미 조금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다른 감정이 남아 있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는 감정, 그리고 그 세계가 생각보다 훨씬 불편하게 짜여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다는 감정이었다.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아이를 한 번 내려다봤다. 아이는 이미 조금 지쳤는지 조용히 기대어 있었다. 나는 괜히 아이의 등을 한 번 더 토닥였다. 그날 외출은 거창한 사건이 있었던 날은 아니었다. 길을 잃은 것도 아니고, 큰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어쩌면 그날 나는 단순히 아이와 첫 나들이를 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안고 사는 사람의 눈으로 도시를 처음 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전까지는 몰랐다. 길의 턱이 얼마나 높은지, 화장실 안에 아이를 눕힐 자리가 있는지 없는지,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우는 일이 부모에게 얼마나 큰 압박이 되는지,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당연한 공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혀 열려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이를 낳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아이를 안은 뒤에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가끔 그날을 떠올린다. 동네를 벗어나 처음으로 서면까지 갔던 날, 사람들의 시선과 낯선 친절, 그리고 갈 곳 없는 막막함 끝에 결국 백화점으로 들어가던 그날을. 그 기억은 내게 육아의 피로를 떠올리게 하기보다, 육아가 한 사람의 시야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준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아이를 안고 나가면 전혀 다른 도시가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육아는 개인의 체력이나 성실함만으로 버티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한 도시가 얼마나 아이와 부모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따라, 누군가의 하루는 훨씬 덜 지치거나 훨씬 더 외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그날의 첫 나들이는 그래서 오래 남았다. 아이와 함께 처음 멀리 나간 날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처음으로 ‘육아하는 사람의 세계’를 바깥에서 마주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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