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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rce Mar 24. 2021

책 <걷기의 인문학>

나는 걷는 사람이라 인생을 바꾸어버린걸까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취향도 확고해진 편이고(나이 들며 좋은 점이다) 좋아할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도 생겼다. 그렇게 좋아하는 종류의 책을 읽다보니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 리베카 솔닛이 걷는걸 좋아하는구나, 걸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썼나 생각하면서, 아마 4년전  책을 샀던것 같다. 시기를 기억하는 이유는, 서울에선  근처 책방에서 책을 사곤 했는데 초기에는 책방지기님께서 책을 비닐로 싸두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은  그대로, ‘걷기’, 혹은 ‘보행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같은데, 우리 사회에 보행이 생기게  이유를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돌아본다. 가벼운 여행 에세이인줄 알고 시작했는데 철학, 문학, 인문학, 역사 강의에  가깝다.

나는 언제나 걸어서   있는 마음에 드는 카페, 식당, 소품 가게, 공원들이 있는 동네를 좋아했다. 그런 동네를 품은 도시를 좋아했다.  도시로 치자면 파리, 로마, 샌프란시스코를 좋아하고 작은 동네를 떠올리면, 서울의 한남, 서촌, 망원, 파리의 마레지구, 로마의 트라스테베르, 후쿠오카의 케고, 오테몬, 도쿄의 나카메구로 같은 곳들이다. 왜인지는 설명할수 없었거나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책을 읽으며 이유를   있었다.

주거지인 곳에서 걸어서 친구를 만나러가고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있는, ‘공적 생활 영위할  있는 곳을 ‘도시’(샌프란시스코, 로마, 파리 )라고 한다면 그와 반대로 , 쇼핑몰, 직장과 같은 목적지를 운전하여 이동하는 곳을 ‘교외화 곳이라고 부른다(1970 처음으로 인구 과반수가 교외에 살고 있다는 미국 인구조사 결과가 나온다). 특히 책에서 지리학자 리처드 워커는 도시성을 “조밀함, 공적 생활, 세계시민적 뒤섞임, 표현의 자유가 불분명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도시성과 자동차는 여러모로 적대적이다. 또한 운전자 도시란 엄밀한 의미에서 도시라기보다 사적 실내공간들 사이를 왕복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역기능적 교외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동차들이 공간의 분산과 사유화를 조장함에 따라 쇼핑가 대신 쇼핑몰이 들어서게 되고, 공공장소는 아스팔트의 바다에  있는 건물이 되고, 도시 설계는 한갓 교통공학이 된다.” 이어서 솔닛은 다음과 같이 샌프란시스코를 정의한다. “예전부터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가장 유럽적인 도시라고 불렸다. 무슨 뜻일까 생각해보면, 미국에서 대부분의 도시들은 점점 교외의 확장판(공공장소에서 걸어 다니는 보행자들의 상호작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 공간 사이의 거리를 이동하는 운전자들의 상호작용 차단을 위해서 면밀하게 통제, 분할, 구획되어 있는 장소)으로 변해가는데 비해,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고 길거리에 활기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는 직접 부딪히는 공간으로서의 도시 개념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다른 한편으로는 돈벌이가 아닌 삶을 살아가는 화가들과 시인들과 사회적/정치적 급진주의자들의 전통(젠트리피케이션의 위험 앞에 놓여 있는 전통) 통해 대부분의 미국 도시와는 다른 시간적/공간적 우선순위를 시사하는 듯하다.”

미드 ‘위기의 주부들같은 곳에 나오는 교외는, 도시에서 한두시간 떨어진 곳에 중상류층의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는 곳이다. 아침이면 도시로, 혹은  지역의 대학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집을 나선다. 보통 주택가를 따라 집들이 주욱 늘어서있기 때문에 카페나 식당, 식료품 가게 혹은 공원을 가려면 짧은 거리지만 차를 타고 나서야 한다. 교외는 산업혁명의 결과물로서, 맨체스터에서 제대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교외는 맨체스터와 미들랜드 북부에서부터 확산되어 현대적 삶을 철저히 파편화한 산업혁명의 산물이다. 공장 체제가 본격화되고 빈민층이 임노동 계급이  , 일터와 가정은 극단적으로 분리되었다. 숙련공의 복잡한 작업이 비숙련공의 단순 반복 작업(기계의 시중을 드는 작업)으로 잘게 쪼개짐에 따라 노동  자체가 파편화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1830년대에 맨체스터 제조업자들이 최초의 대규모 교외 거주지를 건설했던 것은 자기네 손으로 만들어낸 도시에서 탈출해서 자기네 계급으 가정생활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런던의 복음주의 기독교도들이 유혹을 피하기 위해서 교외로 떠났다면, 맨체스터의 제조업자들은 불쾌와 위험을 피하기 위해 교외로 떠났다.  불쾌와 위험이란 산업공해, 잘못 만들어진 도시의 더러운 공기와 불량한 위생, 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비참한 노동자들의 위협적 몰골이었다.”

교외라는 것은, 산업혁명의 정신을 갖고 태어난 곳이고 그래서 물질주의, 자본주의를 가장  보여주는 현신이라고 볼수도 있을 것이다. 설명할  없지만, 어쩐지 나는 잠실, 판교와 같은 곳에 관심이 가질 않았는데 이런 이유들이 무의식중에 와닿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이를 키우기 좋은 장소라는 것에는 완전히 동의하고 이건 다른 이야기에서 다시 해야   같다) 샌프란시스코 혹은 파리를 여행하면 ‘내가 혹은 내가 속한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정확히는, , , 좋은 직장)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하듯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래서  도시들이 매력을 가지는 것일테다. 평일에 휴가를 내고 회사 건물만 벗어나 한남, 성수동을 가도 그런 기분을 느낄  있지만 자기가 사는  보다는 멀리 떨어져 주의가 환기된 곳에서 진실을 깨닫는게  쉬우니까.

교외화 곳에 산다는 것은 차를 타고 직장과 학교에 가고 도서관에 가며 쇼핑몰에 가는 일이다. 목적한 곳을 차로 이동하는 사적 생활만으로 이루어진 삶은 결국 공적 생활을 방해한다. 내가 아는 세계만 경험할  밖에 없다. 책에 언급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시디롬 백과사전 광고 “당신은  백과사전을 들추어보기 위해 억수 같은 빗속에서 한참을 걸어가야 했지만, 당신의 자녀는 클릭과 드래그면 됩니다.” 교외의 아이가 가진 선택지를 알려준다. “이제 도서관은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어졌고, 어른들은 아이가  거리를 걷게 하지도 않는다. 학교까지 걸어가는 ,   세대에 걸쳐 아이가 세상을 배우는 첫발이었던 일도 이제 점점 흔치 않은 경험이 되어가고 있다. 교외가 일상 사유화를 촉발하고 자동차가 일상 사유화를 강화했다면, 텔레비전, 전화, PC, 인터넷은 일상 사유화를 완성한다. 세상으로 걸어 나갈 필요가 점점 없어지니, 공적 영역이 퇴보하고 사회 조건이 악화될  맞서기보다는 물러서게 된다.” 나는 교외가 살기에는 혹은 방문하기에 매력이 없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산업혁명 속에서 탄생한  태생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  개별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생각 조차 시작하기 어렵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다니던 회사가 강남에서 경기 근교로 이전하며 통근버스를 타고 다닌 적이 있다. 아침 6 40분이면   통근버스에 오른다. 버스를 타고, 잠이 오지 않는, 멀미로 책읽기도 어려운  시간을 때우려 의미 없는 SNS 배회했다. 정확히 1시간 후면 회사 앞에 버스가 도착했고 회사 건물로 들어가면 퇴근할 때까지 밖을 볼수 없는 날이 많았다. 겨울이면 아직 동트기  깜깜한 새벽 버스에 올랐고 정시 퇴근한다고 해도 어두운 저녁에 집앞에 도착했다. 하루동안   앞에 보이는 풍경은 깜깜한 거리, 버스 , 버스에서 내려 회사 건물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뒷통수, 그리고 집이 다인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생활 속에 즐거움이 없던 것도 아니었고, 괴로운 일이라는 생각도 없었지만, 뭔가 주객이 전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안정적이고 좋은 삶이었지만 지금보다 물질적으로 부족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아침 시간을 누리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떠나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던 것도  이유  하나이다.) 지금 직장을 떠나면 물질적으로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부족해서 지금 주말에 누리는 만큼의 여유도 누리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고, 그럼 지금 직장에의 만족으로 이어져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어느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도 괜찮잖아, 하는 식의 들뜸, 혼돈, 무의미, 허무에 자주 빠지곤 했다.  책을 읽으며,  정말 전형적인 현대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군, 생각했다(누군들 아니겠냐만).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삶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원치 않았고, 다른 대안을 찾고 싶었던 내가 떠올랐다.

인간의 비인간화, 타인이 정해준 목적을 따라가는 , 그러니까 아마도 획일화된 자본주의 같은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점처럼 모여 만든 곳이 도시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렇게 애초에 거창하게 생각하고 나의 삶에 의문을 가진것도 아니고,  스스로 나는 현실감각으로 점철된 인간이라고 생각하므로  거대한 자본주의 속에 나사 하나가 되고 싶지 않다고해서 저항의 의미로 그에 반하는 삶의 태도를 정하겠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삶의 우선순위를 내가 정하는 삶을 살고 싶다. 욜로라든가 유유자적하는 삶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치열한 삶을 원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하고, 주어진 시간들을 떼우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원하는 방식으로 촘촘히 채우는 . 아침은 좋아하는 빵과 커피를 마실 시간이 주어지고, 일을 하고, 아이와 남편과 요리를 하고 식사하는 에너지가 남아 있는 .
 
인간은 기계의 속도를 따르기 시작했고, 인간의 속도는 이제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말이, 기계가 없던 때를 추억하는 순진한 글로 읽히지는 않길 바란다. SNS 통해 앉아서도 지구 반대편의 일을   있게 되었고 여러 정치적인 일에 가담할수도 있게 되었다. 비행기와 자동차 그리고 세탁기  많은 기계들이 인간에게 안락함과  많은 자유의 가능성(그렇다 가능성이다.) 안겨주었다. 다만 우리 사회가 기계 덕택에 생기는 여유 시간을 여가에 쓰기보다는 생산성을 높이는데 쓰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색으로서의 공간, 모임으로서의 공간, 여가로서의 공간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아마 내가 파리, 로마, 샌프란시스코를 걸으며 좋아했던 것은 아마  곳에서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한 흥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스스로 사회의 기준에 자로 잰듯 맞추어 살았던 치열했던 삶에서   떨어진  시점에, 솔닛의 걷기에 대한  여정은  많은 질문과 다른 시점을 가져다주었다. 언제나 다른 그의 글과 마찬가지로.

어제의 산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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