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혹한 통치술인가, 악의 교사인가
읽는 내내 거북살스럽고 불편하다.
여우의 간교와 사자의 용맹이 어우러진 영웅을 시대가 요구하고..그 영웅은 <짧고 굵은 폭력>으로 일거에 권력을 잡은 후 <가늘고 오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겉으로 드러난 폭정이 아닌 제도화된 폭력으로 어리석은 인민을 살살 잘 다스리라는 내용으로 읽힌다.
인민의 재산과 여자는 손대지 말라는 조언도 친절히 덧붙인다. 돈과 여자만 터치 안 하고 먹고 살 기반만 마련해 주면 인민은 불만이 없단다.
인민에게 무기를 주고 군사를 양성하면 외세의 침입도 막을 수 있고.. 또한 권력에의 향수로 몸부림치는 귀족의 경거망동도 제어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군사학적 혜안도 돋보인다.
일단 잡은 권력을 잘 유지하기 위해 군주는 인민의 지지를 얻는 <공존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민의 지지>라는 대목에서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가 사실은 <공화주의자>라는 의심이 덜컥 든다.
십몇 년 전, 노르웨이에서 일어났던 테러.
캠프장에서 수십 명을 살해한 극우민족주의자인 안데르스 브레이빅이 탐독했던 책 중의 하나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군주론>의 내용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악의 교사>쯤으로 여기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군주론>이 마키아벨리의 의도와는 달리 오독되고, 그 오독된 내용들이 각자의 처지와 입장에 따라 적용, 악용된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나는 궁금하다.
극우민족주의자가 하필이면 왜 <군주론>을 탐독했는지.
혼란스러운 정국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쫓겨나 18년간 망명생활을 하던 메디치 가문이 재집권을 한다.
마키아벨리는 <반메디치>라는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조반니 메디치가 교황이 된 덕분에 대사면으로 풀려난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조반니 메디치>에게 헌정하기 위해 이 책을 쓰다가 종내에는 <로렌조 메디치>로 그 대상을 바꾸어 헌정한다.
헌정사를 쓰면서까지 메디치가의 눈에 들어 다시 정계에 입문하고 싶었던 마키아벨리.
고문과 투옥으로 뽀사지고 피폐해진 몸으로 한 땀 한 땀 잉크 찍어서 책을 썼는데, 마키아벨리의 처절한 구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메디치는 끝내 마키아벨리를 외면한다.
어쩌면 <군주론>이라는 걸출한 책에서 국가 통치술의 모든 것을 전수받았으니 메디치 입장으로서는 마키아벨리가 더는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자기 계발>의 입장에서 얻을 수 있는 팁은, 내가 가진 지식의 전부를 나보다 큰 권력을 지닌 자에게 아낌없이 퍼주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메디치가의 부름을 받아 정계에 다시 진출하고 싶었던 마키아벨리의 소망은 물거품이 됐지만 세상에 <쓸데 없는 일>은 없다고, 이 헌정사는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군주론>은 참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책이다.
한 사회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극과 극으로 읽힐 수 있을 듯도 하다.
만약 우리 사회가 박정희 신화와 전두환의 광기에 휩싸인 사회라면 군주론을 치 떨리는 두려움으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우리 사회가 <바보> 노무현의 선한 의지가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좌절감을 느낄 때라면, 여우의 간계와 사자의 용맹을 지난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십을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도덕적인 덕치로 맹자왈 공자왈 그리스도 가라사대 어쩌고 했던 이전의 도덕정치나 신정정치에 반발하며,
마키아벨리는 긴장과 갈등을 안고 있는 <현실정치>에 천착하여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문자적으로 액면 그대로 읽기에 불편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현실>이 이러하니 살아남으려면 필요악을 행하라.
통치술이든 자기 계발이든 틀린 말은 아닌데..나는 불편하다.
현실이 이러하니 불편해도 적응하라..고도 들린다.
<사실>이라고 해서 모두 <진실>은 아니라고 조용히 뇌까려보는데 당최 무기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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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의 내용의 의외성 때문에 이 책은 마키아벨리의 <일탈>로 여겨지기도 한다는데, 마키아벨리의 이후 저작인 <로마서 논고>를 보면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로마서 논고>를 통해 <군주론>에 대한 재해석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고.
폭력의 조언자며 악의 교사라는 악평도 있고..
엄혹한 통치술로도 읽히고..
바람직한 통치자를 위한 지침서로도 이해되어 정치인들끼리 덕담 얹은 선물용으로 쓰이고..
경영학의 리더십을 가르치는 교본으로 쓰이기도 하고..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 계발서로도 읽히고..
마키아벨리의 처절한 포트폴리오로 평가되기도 하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책.
욕하면서 읽었는데 읽고 나니 생각이 많아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