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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향기마을 Jul 21. 2022

엄마의 보물 상자

진정한 애도는 마음껏 그리워하기 



'시간이라는 기차'


 그날은 가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하늘도 계절 따라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계신 방엔 일요일 아침 평온한 햇살이 가득했다. 

 창밖 베란다엔 붉은 고려 담쟁이 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아름다웠다. 


 하지만 난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오랜 병환으로 누워 계시던 엄마의 자리를 보지 않으려고 나도 모르게 한쪽 어깨가 굳었다. 


 시간이라는 기차를 타고 정차역까지 쭉 흘러가듯 언제나 힘들었던 기억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엄마와 함께 살듯이 남겨진 옷들과 사진들, 함께 덮었던 이불과 여러 소소한 물건들까지 소중히 여기며 지내셨다. 

 





'상자를 열고'


 아침부터 막내가 교복으로 입는 셔츠에 단추가 없어져서 맞는 것을 찾느라 여기저기 뒤지고 있었다. 

 막내는 한참을 뒤져도 마땅한 게 없자 가만히 앉아 생각하더니 갑자기 아버지 방문을 덜컥 열고 들어갔다. 


“할아버지. 할머니 반짇고리 어딨어요?” 

 순간 나는 아! 하고 탄성을 내며 막내를 따라 들어갔다.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장롱 깊숙이서 묵직한 엄마의 반짇고리 바구니를 꺼내셨다. 


 받아 든 막내의 손으로 먼지를 닦아내고 뚜껑을 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셋은 머리를 맞댄 채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정말 낡고 오래된 물건들... 손가위, 보풀 가위, 송곳, 여러 크기의 여성 옷 걸 고리 상자, 여러 굵기의 바늘들과 바늘꽂이, 찢어진 골무에 색 색깔의 크고 작은 실패들, 그리고 다양한 크기와 모양, 색깔별로 모아 놓은 단추 주머니까지… 


 그날 우리 세 사람은 함께 앉아 마치 옛 여인들의 인생을 바늘 이야기로 들여다보듯 지나가 버린 엄마의 시간을 꿈처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신기하게도 더 이상 어깨가 무겁지도 않고 방 안 가득 찬 포근한 기운에 눈가만 달아올랐다. 


 단추 주머니를 열고 한쪽에 쏟아 원하는 것을 찾고 다시 넣으려는데 바구니 바닥 한쪽에 작은 종이쪽지가 고이 접혀 끼워져 있는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풀어 보니 흐려진 글씨로 

<엄마. 저를 10살까지 똑똑하고 건강하게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버이날을 맞이해서->라고 씌어 있고, 

그 아래에는 <그래 나도 안다. 너 똑똑한 거… 고맙다>라는 눈에 익은 엄마의 글씨가 나타났다. 


 아! 내가 선물한 거였구나.  






'참을 수 없는 그리움'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기억들이 눈앞에 가득 차올랐다.    


 도대체 그게 언제였나. 


 용돈을 모아 주머니에 담아 들고 동생 손을 잡은 채 시장을 누비며 이불집을 찾았고, 미리 봐 두었던 것보다 좀 더 큰 반짇고리 바구니를 사고, 기특하다시며 몇 가지 실패와 바늘꽂이를 넣어 주시던 나이 든 아주머니와의 장면들이 묻어둔 기억 저편에서 흘러나와 참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나를 흐느끼게 했다.  


 아버지도 나도 엄마가 오랜 병환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니, 돌아가신 후에도 서로의 고단했던 마음을 편하게 꺼내 본 적이 없었다.  


 효녀라는 말을 듣기도 싫었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스스로 아픈 엄마를 돌보게 되었고, 그전에 이미 어린 아들들의 엄마였으며 첫눈에 반해 사랑해버린 한 남자의 아내였다. 


 밖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옷을 갈아입을 여유도 없이 엄마를 살펴야 했고, 저녁 준비를 하고 아이들 학교 숙제와 준비물을 챙겨서 재우고 난 후에야 내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 허다했다.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내일 수업을 준비하면서 다가올 아침을 바라보는 일은 마치 곧 시작될 전투를 준비하는 전사의 심정으로 장비를 챙기는 비장함과 다를 바 없었다. 


 당황한 막내는 울음에 북받친 나를 말없이 안아주었고 아버지는 묽은 눈물을 닦아내며 창가에 걸린 붉은 담쟁이만 바라보았다. 


 




'진정한 애도'




 막내가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이걸 왜 그렇게 깊이 숨겨두셨어요? 원래 자리는 거기 아니잖아요.”  

 “네 엄마가 뭣 모르고 버릴까 봐 그랬다.”  


 그날 나는 그동안 피하고만 싶었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아픈 엄마만큼이나 무겁게 멈춘 시간에 눌려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았는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의 고통을 기억하는 전우처럼 마음이 아플까 봐 내색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너무나 버거웠던 자신의 마음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립기 전에 생각하기 싫었고 추억을 꺼내기 전에 몸부터 괴로운 것을 어쩌지 못한 채 여러 해가 지나 오늘까지 온 거였다.  


 요즘은 아무리 추운 날이어도 아버지가 외출하시고 나면 창문을 열고 햇볕 같은 바람을 들이며 큰 숨을 쉰다. 그리고 엄마가 남긴 물건들에 미소 담긴 눈길 한 번 보내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젠 엄마 냄새도 목소리도 어렴풋하지만, 마음껏 그리워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도가 아닐까...  


 나는 인제야 제법 내 마음에 드는 엄마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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