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누트 과제 아카이브 - 3
그리움은 늘 남은 자의 몫이다. 떠난 이들은 뒤돌아 보지 않는다. 오직 출발에 마음이 부풀어 지난 시간을 삶의 자양분 정도로 여기거나, 돌리고 싶지 않은 실수로 치부할 뿐. 별도 없이 맑은 겨울밤. 계절이 우주의 중력을 따라 끝으로 기울면, 난 그들이 일어난 자리에 앉아 지난 세월을 좇는다.
2년 전만 해도 나의 연말은 세 사람과 함께였다. 나의 남편과 그의 죽마고우 J, 그리고 내 소꿉친구 L. 여느 또래처럼 L과 나는 각자 대학에 들어가면서 잠시 데면데면한 적이 있는데, 그때 L은 런던 유학생 J와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나 역시 다른 무리를 더 가까이할 때에 남편을 만났다. L과 내가, 그리고 남편과 J가 이전보다 한층 더 깊은 관계가 된 건, ‘나의 절친 애인이 알고 보니 내 연인의 베프’라는 운명의 연결고리 덕분이었다.
우리는 4년 간 꼭 붙어 지냈다. 눈물 나게 아픈 성장통도, 가족이 던지는 매서운 화살도 우리의 대화 안에선 물렁하게 녹은 얼음처럼 작아졌다. 우리 중 어느 둘이 다투면 나머지 둘이 나서서 중재했다. 한쪽씩 따로 만나 묻고, 듣고, 설득하고.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이 둘이 서로를 품으면 나도 행복하겠다고.
우리에게 연말은 조금 더 특별했다. 새해의 종이 울리기 5일 전, 크리스마스 이틀 후에 내 남편의 생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꿈에 꿈을 더하고, 허황되지만 그럴 싸한 미래를 수놓으며 그 시간을 채웠다. 각자 가정을 이루면 휴가 날을 맞춰 같이 여행 다니자고, 두 집을 이어 중간에 공유 공간을 둔 ‘땅콩 집’을 만들어 살아도 좋겠다고.
상상의 자리엔 늘 계피 스틱을 올린, 뜨끈한 뱅쇼가 있었다. 안주가 샤퀴테리나 스모크 치즈, 담백한 당근 케이크로 바뀌어도 음료는 변하는 법이 없었다. 과일 주스와 다를 것 없는 칵테일 한 모금만 마셔도 온몸이 레드 와인처럼 변하는 남편과 L의 체질 탓에. 술자리치곤 말짱하고 또렷한 정신인 채, 우리 얼굴은 간절(間節)을 앓는 아기처럼 미열에 달떴다. 그때 우리는 언젠가 닿을 내일을 그리며, 이 관계가 영원할 것처럼 발갛게 웃었다.
건너편 두 자리가 비어있는 지금 생각해 보면, J와 L이 싸울 때마다 내가 지킨 건 따로 있었다. 닳고 닳아 너덜해진 자아를 말끔히 꿰어주는 관계를 잃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 사실 나는 그들의 안위가 아니라 악착같이 나의 안식을 사수했다.
한 해의 끝 무렵엔 어김없이 그들을 떠올린다. 이전보다 더 씩씩하게 각자의 길을 걷는 둘을 응원하며, 그것을 동지애라고 나를 속이며, 한편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나의 평안을 아쉬워하며. 12월 밤, 나는 이 공백 앞에 앉아 갈라진 인연을 그리워한다. 서서히 멀어져 다시는 붙을 수 없는 그 인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