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집중해버려서
무언가에 너무 몰두해서 화장실 가는 것도 잊어버린 적이 있는가? 때로는 그 일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화장실에 가야겠다는 신호를 제때 알아차리지 못할 때도 있다. (제목을 자극적으로 짓긴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실례할 위기에 처할 만큼 그 일이 그렇게 중요했던 건가? 그렇게 자문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답이 돌아올 때가 많다.
책을 읽느라, 다이어리를 꾸미느라, 게임을 하느라, 영상을 보느라 화장실 신호를 놓치고 있었다니! 성인으로서의 자존감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ADHD는 한국어로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라고 한다. 과잉 행동은 그렇다 치고, 많은 사람들이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유로 스스로 ADHD가 아닌지 의심한다.
하지만 ADHD가 단순히 집중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다.
주의력(Attention)은 특정 자극이나 정보에 의식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관련 없는 자극을 무시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집중력(Concentration)은 주의력의 하위 개념으로, 특정 대상에 주의를 지속적으로 기울이는 능력이다.
주의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조금 더 간단히 이야기 해보자면, 필요할 때 원하는 것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너무 많이 집중해서 그 정도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ADHD인들은 때로 무언가에 너무 집중해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하루에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는 집중력의 크기가 100이라고 해보자. 어떤 ADHD인은 그보다 훨씬 못 미치는 50만큼의 집중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90에 가까운 집중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만약 하루동안 해야 하는 일의 목록이 다음과 같다면, 어떻게 그 집중력을 분배하겠는가?
업무 처리하기
집안일하기
책 한 권 읽기
다이어리 쓰기
(시간이 남는 경우) 게임하기
100의 집중력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략 이런 식으로 계획을 짜지 않을까 싶다.
업무 처리하기 (80)
집안일하기 (5)
책 한 권 읽기 (10)
다이어리 쓰기 (2)
(시간이 남는 경우) 게임하기 (3)
물론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업무에 조금 덜 집중할 수도 있고, 집안일을 하거나 게임을 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싶은 날도 있지만, 대략적으로는 저런 계획을 세울 것 같다.
ADHD인 김자라도 같은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하루를 보냈다.
다이어리 쓰기 (30)
게임하기 (10)
업무 처리하기 (50)
집안일 하기 (0)
책 한 권 읽기 (0)
우선 왜인지 모르겠지만 업무 처리를 하기 전에 다이어리 쓰기부터 시작했다. 전체 집중력은 90이었지만, 다이어리 쓰기에 30이나 되는 집중력을 소비했고, 결국 집안일과 책 읽기는 손도 대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게임하기에 10의 집중력을 소비한 것은 그렇다쳐도, 왜 다이어리 쓰기같은 간단한 task에 30이라는 집중력을 쓰게 된 것일까?
ADHD의 '과몰입' 또는 '과집중(hyperfocus)' 현상은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ADHD는 주의력과 관련이 있는 뇌 부위에서 도파민의 부족 또는 불균형이 원인으로 작용한다. 도파민은 보상, 동기 부여, 흥미 등을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ADHD 환자의 뇌는 이 도파민이 충분히 활성화되지 못해 일상적인 활동에서 쉽게 지루함과 산만함을 느낀다.
이러한 도파민 부족을 보상하기 위해 ADHD 환자의 뇌는 높은 수준의 자극이나 즉각적인 보상을 제공하는 활동을 끊임없이 찾게 된다. 과몰입 현상은 바로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역설적인 현상이다. 즉, 자신이 매우 흥미롭거나 보상이 크다고 느끼는 특정 활동(예: 게임, 창작 활동, 특정 취미)에 몰두할 때, 뇌에서 도파민이 급격하게 분비되면서 평소에는 경험하기 어려운 강렬한 집중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과몰입 상태에서는 주의력이 극도로 좁아져 주변 환경이나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주의력이 '부족'하다기보다는, 특정 대상에 주의력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ADHD의 특징을 보여주는 예시다.
그렇다면 약을 처방받은 김자라는 어떤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1. 집중력 크기의 변화
약 용량이나 상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90이었던 집중력이 95나 100까지 올라가게 된다. 조금이지만 집중력의 총량이 늘어났기 때문에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이 조금 더 생겼다.
약을 먹는다고 해서 집중력이 110이나 120으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ADHD가 아닌 사람이 약을 먹어봤자 전체 100이었던 집중력에는 변화가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 주의력(집중력의 분배능력)의 변화
다이어리를 쓰던 김자라는 문득 이게 그렇게까지 에너지를 많이 쏟을 일인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업무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다이어리 쓰기에는 조금 덜 집중력을 분배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업무 처리하기'라는 task를 먼저 시작하고 최대한의 집중력을 먼저 투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복약을 하는 것이 만사형통은 아니다. 약을 평생 복용한다고 해도 기존의 습관과 행동은 훈련을 통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특히 성인 ADHD라면 유년기에 잘못 잡힌 행동 체계를 뒤엎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적절히 분배하기 위해 훈련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은 인터넷과 서적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으므로 굳이 나열하지는 않겠다.
내가 사용하는 방법을 한 가지 소개하자면, 바로 딴 생각 종이를 곁에 두는 것이다.
준비물은 A4용지 한 장, 또는 노트 한 장이면 충분하다.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나 분량을 정해두고, 딴 생각이 들려고 할 때면 그 생각을 종이에 적는다.
그렇게 하면 스스로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도 있고, 종이에 적으면서 그 생각을 해소할 수 있다. 생각이 더 깊어지기 전에 막을 수 있는 예방책 같은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아깝게 날리지 않고 적어둔 다음, 하고 있는 일이 끝났을 때 마저 생각을 이어갈 수도 있다.
적절한 주의력으로 살 수 있는 그 날까지! 우리 모두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