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있어 ‘명함’만큼 일목요연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방법은 없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명함이 없으면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특히 비즈니스 문제로 사람을 만날 때 명함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면 큰 실수를 하는 셈이다. 그 때문에 기업에서는 신입사원들의 비즈니스 매너 교육 항목으로 명함 에티켓 교육을 빼놓지 않는다.
직장인이라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한두 번쯤 교육받거나 들어봤을 것이다.
☞ 명함은 항상 명함 지갑에 넣어 깨끗하게 보관하고, 꺼내기 쉬운 곳에 넣어둔다.
☞ 명함은 서서 주고받는 것이 매너이며, 먼저 자기 소개를 간단히 한 후에 건네야 한다.
☞ 명함은 오른손으로 건네고, 왼쪽 손바닥으로 받는다.
☞ 상대의 명함은 두 손으로 꼭 잡고 봐야 하며, 장난을 치거나, 훼손해서는 절대 안 된다.
친구 관계에서도 명함은 요긴하게 쓰인다. 졸업 후 처음 만나거나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다시 만나면 으레 “명함 하나 줘봐”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곤 한다. 그동안 뭘 하면서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애매한 경우, 명함만큼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유용한 도구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명함이 생기는 순간, 회사가 내가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는 것이다. 특히 직장 경력이 오래될수록 ‘명함=나’라는 공식을 세우고,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명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과연, 그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
700~8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태어난 사람들)의 퇴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그들의 명함 역시 사라졌다. 20~30년간 술도 되고, 밥도 되었던 명함이 한순간에 효력을 잃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내밀 것이 없다. 회사에 속한 사람이 아닌 한 개인으로서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표현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간 명함 속에 묻혀 있던 자신의 정체성이 이제야 겨우 만천하에 드러났건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직장을 그만 뒀다면, 이제 직장인이 아닌 한 개인으로서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그나마 준비된 퇴직이라면 금세 추스르고, 새길을 찾을 수 있지만, 준비 없는 퇴직이라면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퇴직 후에도 여전히 명함을 갖고 싶어 한다.
사실 명함 하나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문제는 명함에 들어갈 내용이다. 이름 석 자만 달랑 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자신을 설명하는 문구를 넣을 수도 없다.
명함 없이도 나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명함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방송에 나오는 전문가들을 보라. 그들에게 직접 명함을 받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처럼 될 필요까지는 없지만, 최소한 내가 몸담은 회사나 업계에서 이름만 대면 “아, 그 사람!”이라고 알 정도는 되어야 한다.
명함 없이 나를 말할 수 있으려면 직장에 있을 때 회사라는 브랜드 안에서 자기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 자신을 어떻게 브랜딩 할 것인지 고민하고, 계획하며,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은퇴를 앞둔 30~40대라면 더욱더 그래야만 한다. 이제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