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태원’이 김유정에게 사과한 이유

by 마테호른




◆ ‘모던보이’의 상징, 구보 박태원과 ‘촌뜨기’ 김유정의 만남과 우정


어쩌면 한국 문단의 최고 전성기는 1930년대가 아니었을까. 소설과 비평 분야에 경향문학을 내세운 <카프>가 있었고, 시에는 정지용과 박용철, 김영랑이 중심이 된 순수문학이 있었다. 여기에 탄탄하고, 새로운 실험 정신으로 무장한 채 순수예술을 지향했던 <구인회>가 혜성같이 나타났다. 이상을 필두로, 김기림, 김유정, 박태원 등이 바로 그들이다.


<구인회>는 1933년 8월 김기림,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정지용, 이무영이 순수 문학을 표방해 만든 모임이었으나, 이효석과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이 탈퇴하고 박태원, 이상, 박팔양, 김유정, 김환태가 새롭게 합류했다. 비록 구성원은 바뀌었지만, 회원 수는 항상 9명을 유지했다.

김유정과 박태원의 인연 역시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두 사람은 겉모습만큼이나 글쓰기는 방식도 달랐다. 박태원이 당시 ‘모던보이’의 상징과 같았던 최신 유행의 헤어스타일에 안경을 착용하는 등 세련된 서울 남자였다면, 김유정은 언제나 흰 두루마기 차림에 부스스한 머리로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골 남자를 연상하게 했다. 글쓰기 역시 박태원이 도시를 무대로 한 지식인의 삶을 주로 다루었지만, 김유정은 특유의 토속적인 정감을 바탕으로 우리 이웃의 삶을 풍자와 해학을 통해 엮어냈다. 다만, 두 사람의 성격은 어느 정도 비슷했다. 튀는 것을 싫어하고, 마음속의 생각을 밖으로 잘 꺼내지 않는, 특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했다. 어쩌면 그것이 두 사람을 더 가깝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documentTitle_4897278761599471860815.jpg ▲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김유정과 박태원. 두 사람은 많은 점이 달랐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성격만은 닮았었다.


박태원은 <유정과 나>라는 글에서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가 유정과 처음으로 안 것은 그가 그의 제 이작(二作)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 바로 그 뒤의 일이다. 그러니까 1933년 가을이나 겨울이 아니었던가 싶다.

하룻밤, 그는 회남(소설가 안회남)과 함께 다옥정(茶屋町)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때 그들은 미취(微醉, 술이 조금 취함)를 띄고 있었다. 그래, 우리가 초면 인사를 할 때 그가 술 냄새가 날 것을 두려워해서 손으로 입을 거의 가리고 말하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러한 것에도 유정의 성격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는 그만큼이나 남을 대하기 어려워하고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타고난 성격만은 아닌 듯싶다. 그는 불행에 익숙하였고, 늘 몸에 돈을 지니지 못하였으므로 어느 틈엔가 남에 대하여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ㅡ 박태원, <유정과 나> 중에서


image_2321945841599474982556.jpg ▲ 구인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문인들. 사진 오른쪽 맨 위부터 이상, 김기림, 박태원, 김유정. ⓒ 이미지 출처 ㅡ <월간조선>



◆ 김유정의 죽음에 “벗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럽고, 죄스럽다”라고 했던 박태원


그런 김유정이 갑작스럽게 죽자, 박태원은 “벗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럽고, 죄스럽다”라며 김유정에 대한 미안함을 고백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꺼내며, 오히려 자신이 유정에게 위로받았노라고 말한다.


유정은 술을 잘하였다. 그의 병에 술이 크게 해로울 것은 새삼스레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생활이 외롭고 또 슬펐던 유정은 기회만 있으면 거의 술에 취하였다.

언제나 가난한 그는 또 곧잘 밤을 새워가며 원고를 쓴다.

“김 형, 돈도 돈이지만 몸을 아끼셔야지요. 그렇게 무리하면…”

우리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몸을 아끼기 전에 우선 그만큼이나 몇 원의 돈이 긴요(緊要, 급히 필요함)하였던 것이다.

그런 유정에게 나는 결코 좋은 벗이 아니었다. 벗이라고 하기조차 죄스럽게 그에게 충실하지 못하였다.


과연, 박태원은 무엇이 그렇게 끝내 미안했을까. 김유정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살뜰히 건네지 못한 것을 후회한 것은 아닐까. 김유정의 부고를 받은 후 그가 쓴 <유정군과 엽서>를 보면 그 이유를 얼핏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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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하순의 일이었던가 싶다. 당시 나는 몸이 성치 않은 아내를 위해 잠시 성북동 미륵당(彌勒堂)에 방 하나를 빌렸다. 옹색하기는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여서 나는 모처럼 문밖에 나간 몸으로도 한가로울 수 없이 쌀과 나무를 얻기 위해 밤낮을 도와 <천변풍경> 제1회 분을 초(炒, 필요한 부분만 뽑아서 적음)하였다.

원고를 가지고 문 안으로 들어와 조선일보사 앞에 이르렀을 때 나는 뜻하지 않게 회남과 유정을 그곳에서 만났다.

“아, 박 형, 안녕하섰에요?”

인사할 때 얼굴에 진정 반가운 빛이 넘치고, 이를테면 ‘수줍음’을 품은 젊은 여인과 같이 약간 몸을 꼬기까지 하는 것이 지금도 적력(的歷, 또렷또렷해 분명함)하게 내 망막 위에 남아 있는 유정의 인상 중 하나다.

우리는 참말 그때 만난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동행이 또 한 분 있었고, 나는 나대로 바빴으므로 잠시 길 위에 선 채 몇 마디 말을 나누고는 그대로 헤어졌다.

그러한 뒤 며칠 지나 일찍이 내게 서신을 보낸 일이 없는 유정에게서 다음과 같은 엽서가 왔다.

날사이 안녕하십니까.

박 형! 혹시 요즘 우울하시지 않으십니까? 《조선일보》사 앞에서 뵈었을 때 형은 마치 딱한 생각을 하는 사람의 풍모였습니다. 물론 저의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나, 만에 일이라도 그럴 리가 없기를 바랍니다.

제가 생각건대, 형은 그렇게 크게 우울하실 필요는 없을 듯싶습니다. 만일 저에게 형이 지니신 그것과 같은 재질이 있고, 명망이 있고, 전도가 있고, 그리고 건강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일는지요. 5, 6월호에서 형의 창작을 못 봄은 너무나 섭섭한 일입니다. <거리>, <악마>의 그다음을 기다립니다.

ㅡ 김유정 재배(再拜)

그날의 나는 그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작 후의 피로가 있었고 또 그 작품은 청탁을 받은 원고가 아니었으므로 그날 즉시 고료를 받아 오는 것에 성공할지 못할지 그러한 것이 자못 마음에 걱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요만한 ‘우울’이 유정의 마음을 그만큼이나 애달프게 한 것은 나로서 이를테면 하나의 죄악이다. 물론 나는 그가 말한 바와 같이 뛰어난 재질이 있지도 못하고, 명망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전도가 가히 양양하다고 할 것도 못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건강’이─ 그가 항상 그렇게나 바라고 부러워하여 마지않은 ‘건강’이 내게는 있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 아닌가. 나는 허약하고 또 위장에는 병까지 가지고 있는 몸이나, 그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혹은 부러워하기에 족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내가 ─ 그만큼이나 행복 된 내가 그에게 우울한 얼굴을 보였다는 것이 그로서는 괘씸하기조차 하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유정의 부고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이 이때의 일이었다.

만만하게 지낼 곳도 없이, 늘 빈곤에 쪼들리며, 눈을 들어 앞길을 바랄 때 오직 어둠만을 보았을 유정─. 한 편의 작품을 낼 때마다 작가적 명성을 더해 가고, 온 문단의 촉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을 그였으나, 그러한 것으로 그는 마음에 ‘밝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가 병든 자리에서 신음하면서도 작가적 충동에서보다는 좀 더 현실적 욕구로 인해 잡지사가 요구하는 대로 창작을, 수필을, 잡문을 써온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은 어둡다.

ㅡ 박태원, <유정군과 엽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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