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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가장 허무한 죽음의 주인공

by 마테호른


추한 외모 때문에 번번이 퇴짜 맞은 ‘봉추’


많은 사람이 본질과 형상을 구분하지 못한 채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곤 한다. 공자 역시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 크게 실수한 적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속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다. 일의 결과가 나온 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는 그와 같은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겉모습이 아닌 능력이나 품성 같은 본질을 들여다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어린 시절 박둔(樸鈍)해서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한 인물을 두고 한 말이다. ‘박둔하다’라는 것은 칼이나 검이 무딘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날카롭고 번뜩이지 못하다’라는 뜻이다. 즉, 머리가 영리하지 않고, 행동 역시 민첩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호감 있어 보일 리 없다.


그런가 하면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에서 그 인물을 이렇게 묘사했다.


까만 눈썹이 보기 싫게 붙어있고, 얼굴은 검고 덕지덕지했으며, 수염이 볼품없고, 난쟁이처럼 작았다.



이런 외모 때문에 그는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번번이 퇴짜 맞아야 했다. 하지만 그의 진가를 단번에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스승 사마휘(司馬徽)였다.


조조에게 패한 유비가 유표(劉表)에게 의지하고 있을 때였다. 유표는 황실의 종친인 유비를 처음에는 형제처럼 대했다. 하지만 유비에게 귀의하는 사람이 많아지며 점점 그의 세력이 커지자 결국 그를 두려워하며 견제했다. 그러던 중 유표의 처남 채모(蔡瑁)가 유비를 죽이려고 한 일이 일어났다. 이때 유비는 겨우 탈출해서 한 지방으로 달아났는데, 한 목동이 그를 알아보고 자기 스승에게 데려갔다. 그 스승이 바로 ‘수경선생(水鏡先生)’으로 불리던 사마휘였다.


수경선생이 말했다.
“공이 그런 수난을 당하는 것은 곁에 쓸 만한 인재가 없기 때문이오.”
현덕공이 대답했다.
“비록 큰 세력은 아니지만, 저에게도 관우, 장비, 조운 같은 인재가 있습니다.”
“관우나 장비, 조운은 분명 만 명의 적을 능히 당해낼 만한 장수들이지만, 그들을 지휘할 군사(軍師)가 없잖소.”
“몸을 굽혀서 그런 사람을 찾고 있지만,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수경 선생이 말하기를,
“이곳 형주에 천하의 기재들이 모여 있으니 잘 찾아보시오.”
그 말에 현덕공이 되물었다.
“천하의 기재란 누구를 이르는 말입니까?”
“와룡과 봉추 같은 인재를 얻어야 하오. 그들 중 한 명만 얻어도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인 현덕공이 되물었다.
“와룡과 봉추가 누구입니까?”
그러자 수경 선생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좋지, 좋아.”

― 《삼국지연의》 중에서


알다시피, 복룡(伏龍)이란 ‘숨어 있는 용’이라는 뜻으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인재’를 말하며, 봉추(鳳雛)는 ‘봉황의 새끼’로 ‘지략이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사마휘는 그들이 누구인지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스스로 알아내라는 것이었다.


그 후 제갈량이 복룡임을 안 유비는 그의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아간 끝에 그를 군사로 삼을 수 있었지만, 봉추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사마휘가 말한 봉추는 과연 누구일까. 봉추는 바로 앞서 말한 볼품없는 외모 때문에 번번이 퇴짜를 맞은 바로 그 인물로, 그의 이름은 ‘방통(龐統)’이었다. 하지만 유비는 그 역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추한 외모 때문에 손권에게 차인 방통이 노숙의 추천장을 가지고 찾아갔지만, 보자마자 뇌양현(耒陽縣)이라는 작은 고을의 현령으로 임명해 멀찌감치 쫓아버렸다. 때마침 사마휘 밑에서 함께 공부했던 제갈량은 지방 순시를 떠나고 없었다. 결국, 외모 때문에 유비에게마저 인정받지 못한 방통은 고을 일은 돌보지 않고 백 일 동안 술만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소문을 들은 장비가 씩씩거리며 찾아왔다.


장비가 말했다.
“왜 일하지 않는 것이오?”
방통이 말했다.
“내가 일했는지 안 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아시오?”
그러고는 부하에게 일거리를 가지고 오라고 하더니 반나절 만에 깔끔하게 처리했다. 이에 깜짝 놀란 장비가 사죄하자, 방통은 그제야 노숙의 추천장을 보여주었다.
“왜 이걸 진작 보여주지 않았소?”
장비가 묻자, 방통이 말했다.
“내 능력만으로 인정받고 싶었소.”
뒤늦게 장비에게 이 사실을 들은 현덕공은 곧장 그를 불러 사과했다. 그리고 이 일을 뒤늦게 알게 된 제갈량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큰 새를 좁은 조롱에 가두면 갑갑해서 죽고 맙니다. 방통은 겨우 백 리의 좁은 땅을 다스릴 만큼 작은 인재가 절대 아닙니다.”
그제야 현덕공은 그를 부군사로 삼았다.

― 《삼국지》 권37 〈촉서〉 ‘방통전’ 중에서


그렇게 해서 유비는 복룡과 봉추를 다 얻을 수 있었다.




끝내 대붕(大鵬)이 되지 못한 새끼봉황

방통은 인물평을 잘했다. 또한, 잘못된 점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만큼 성격이 곧고 직선적이었다. 문제는 그것에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윗사람을 자주 불편하게 했다. 한마디로 처세술이 부족했던 셈이다. 이는 그가 출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도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익주 원정길에서 방통이 탄 말이 갑자기 날뛰면서 그를 땅에 팽개치자, 유비가 자기가 타던 백마를 방통에게 줬는데, 이것이 적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장임은 모든 궁노수에게 백마 탄 장수만 집중해서 쏘라고 지시했다.
“유비만 잡으면 우리가 이긴다.”
그때 진군하던 방통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군사에게 물었다.
“이곳 지명이 무엇인가?”
“낙봉파(落鳳坡)라고 합니다.”
“뭐라? 내 별호(別號, 본이름 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가 봉추인데, 낙봉파라니…. 이롭지 않다. 즉시 후퇴하라!”
그러나 이미 늦었다. 큰 포 소리가 나더니 그를 향해 화살이 비 오듯 날아왔다.

― 《삼국지》 권37 〈촉서〉 ‘방통전’ 중에서


봉추는 그렇게 허무하게 갔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6세였다.

방통의 죽음은 그저 참모 한 명의 죽음이 아니었다. 방통을 잃음으로써 유비는 관우와 형주마저 잃으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유비는 와룡, 봉추를 다 얻었지만, 천하 제패에 실패했다. 방통 역시 지닌 재주를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날개가 꺾이고 말았다. 새끼봉황에서 끝내 대붕(大鵬)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한 것이다. 이에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방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인물 평가와 경학(經學), 책모가 뛰어나 형주 사람들은 그를 ‘고아하고 준수한 사람(高俊)’이라 했다. 위나라의 신하들과 비교하자면 순욱에 비길 만하다.

― 《삼국지》 제37권 〈촉서〉 ‘방통전’ 중에서


방통. 그의 책략은 절묘했고, 술수는 날렵했다. 또한, 그는 남에게 얽매이거나 구속되지 않는 ‘척당불기(倜儻不羈,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매이지 않는다’라는 뜻)’의 삶을 살았다. 그런 그가 있었기에 유비는 천하삼분의 대업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변화를 중시해서 인의(仁義)를 경시했다는 비판을 듣는다. 변화에도 한계가 있어야 정도(正道)로 돌아갈 수 있는데, 오직 새로움만 추구했기 때문이다. 만일 방통이 그렇게 빨리 죽지 않았다면 유비와 촉나라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생각건대, 외교와 군사를 봉추 방통이 맡고, 내치를 와룡 제갈량이 맡았더라면 삼국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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