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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 가장 저평가된 인물

by 마테호른


“제갈량보다 뛰어난 책사”



책략에 실수가 없고, 사태의 변화를 꿰뚫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한 인물을 두고 한 말이다. 《삼국지》 강의로 유명한 중국의 역사학자 리중텐(易中天) 역시 그를 가리켜 “제갈량보다 뛰어난 책사”라고 치켜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처세에 매우 능해 난세를 살면서도 천수를 누린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과연, 그 주인공은 누구일까.

조조의 책사 가후(賈詡)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가후는 시대를 꿰뚫는 혜안과 정도(正道)를 주장하며, 위나라 제일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나서야 할 때가 아니면 절대 나서지 않았고, 논공행상 역시 전혀 다투지 않았다. 출세에 관심 없어서가 아니었다. 큰 권력을 노리기에는 약점이 너무 많았다.


우선, 그는 조조에게 있어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았다. 조조에게 귀의하기 전 동탁(董卓)의 사위인 우보(牛輔)의 참모이자,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수(張繡)의 모사로 활동하던 중 조조의 군대를 두 번이나 대파했을 뿐만 아니라 조조의 장남 조앙(曹昻)과 조카 조안민(曹安民), 호위 장수 전위(典韋)가 그의 계략에 휘말려 죽었다. 심지어 조조 역시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에게 원한을 품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놀라운 것은 그를 대한 조조의 태도다. 유재시거를 중요시한 군주답게 조조는 그의 과거 행적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심지어 절대 열세였던 원소와의 관도대전에서 누군가가 원소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약점을 알리는 일이 일어나자, 대부분 가후를 의심했지만, 조조만은 예외였다. 이때 조조는 편지를 보지도 않고 불살라버렸다. 그만큼 그를 신뢰했다.


문제는 조조 사후에도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조조의 후계자인 셋째 아들 조비(曹丕)는 사소한 원한조차 기억할 만큼 냉혹한 인물이었고, 일단 눈 밖에 나면 공훈이나 재능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가후의 장수 중 하나를 여러 번 핍박하다가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후만은 끝까지 죽이지 않았다.


그런 조비를 황제로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가후였다. 그는 조조의 정실이 아닌 계비인 변 씨의 소생으로 장남 조앙과 차남 조삭(曹鑠)에 이은 셋째 아들이었다. 그런데 조앙이 전쟁에서 죽고, 몸이 약했던 조삭마저 병사한 후 그들의 생모인 유 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변 씨가 제1 황후가 되면서 그 역시 자연스럽게 조조의 적장자가 되었다. 하지만 조조는 그가 아닌 성격이 밝고 글재주가 뛰어난 조식(曹植, 조비의 둘째 동생)을 후계자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또다시 후계 경쟁에서 밀려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가후였다.


어느 날, 조조가 자신의 후계자로 조비와 조식 중 누가 낫겠냐고 물었다. 가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딴청을 부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조조가 그 이유를 묻자, 가후가 말했다.
“잠시, 원소와 유표의 아들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 《삼국지》 권10 〈위서〉 ‘가후전’ 중에서


원소와 유표는 장자에게 권력을 계승하지 않아서 나중에 권력 다툼이 일어난 경우였다. 직설적인 표현 대신 침묵과 비유로 둘러댔지만, 가후의 말은 곧 “권력은 장자에게 물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한 것이었다. 비록 조비가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지만, 앞날을 생각하며 그의 편을 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비는, 결국 조조의 뒤를 이어 위나라의 황제가 되었다. 그가 바로 위나라를 창업한 문제(文帝, 사실 위나라의 첫 번째 황제지만, 아버지 조조를 초대 황제로 추존했다)다.




조조의 적벽대전을 반대한 《삼국지》 최고의 전략가


역사를 보면 제때 진퇴를 결정하지 못해서 개인은 물론 나라가 쇠락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삼국지》의 적벽대전이다.


알다시피, 적벽대전은 손권과 유비가 연합해서 급속히 세력을 팽창하던 조조에 맞선 전투로 관도대전, 이릉대전과 함께 《삼국지》 3대 전투로 꼽히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누구도 조조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던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천하 통일을 꿈꾸던 조조의 야망은 좌절되고 말았다.


서기 208년 6월, 원소와 그 잔당을 모두 처리하고 승상이 된 조조는 9월에 형주를 점령한 후 강동마저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적벽대전의 시작이었다. 이때 가후는 유일하게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덕으로 다스리면 결국 형주도, 손권도 주공에게 머리를 숙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그의 조언을 무시하고, 100만 대군을 휘몰아쳐 강공을 펼쳤다가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만일 이때 조조가 가후의 말을 들었다면 죽기 전에 천하 통일을 달성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만큼 조조에게 있어 적벽대전은 뼈아픈 패배였다.


그런 가후를 나관중은 일개 군사 전략가로 철저히 격하시켰다. 이는 그의 출신 배경 때문이었다. 가후가 태어난 서량(西涼) 예부터 강(羌)족과 흉노족의 고장이었다. 그러니 중화주의 사관에 젖은 나관중에게 가후는 오랑캐의 후예와도 같았다. 더욱이 그는 나관중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조조의 모사였다. 이것이 바로 나관중이 가후는 철저히 낮추고, 실제로 없던 전투까지 만들어내면서 제갈량을 《삼국지》 최고 전략가로 신격화한 이유다.


반면,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가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지혜를 논하려고 하는 자는 가후에게 왔다.


아닌 게 아니라, 《삼국지》를 보면 가후는 대부분 중요한 사건의 배후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그만큼 그는 통찰력을 지닌 《삼국지》 최고의 전략가였다. 하지만 여느 책사처럼 권력을 탐하고 누리기보다는 고개 숙이고 지내야만 했다. 여섯 번이나 주군을 바꾸었다는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매번 책사로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했다.




6명의 군주를 섬긴 기회주의자 혹은 처세의 달인


제갈량, 순욱 같은 《삼국지》의 주류 책사들과 가후를 비교할 때 가장 대비되는 점은 능동성이다. 제갈량과 순욱 같은 이들이 나아갈 방향을 미리 잡고 실천했다면, 가후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야 비로소 거기에 맞는 계책을 세웠다. 그만큼 가후는 철저히 피동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데도 그가 비난받는 이유는 동탁과 이각의 폭정을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동탁이 낙양에 갓 입성했을 때 그 휘하에는 고작 3천여 명의 병력밖에 없었다. 그런 동탁에게 야밤에 몰래 낙양을 빠져나간 뒤 낮에 다시 서량에서 북을 울리며 입성하게 하는 계책을 내놓은 이가 바로 가후였다. 또한, 동탁 사후 그의 무장이었던 이각과 곽사에게 왕윤(王允)과 맞서 싸우라고 조언한 것 역시 그였다. 이각과 곽사는 어린 헌제를 보좌하는 왕윤이 무서워서 줄행랑쳤던 인물로 만일 가후가 아니었더라면 후한은 멸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가후는 순욱이나 노숙처럼 명문가 출신도 아닐뿐더러 변방 중의 변방 출신의 흙수저였다. 더욱이 이사람 저사람 옮겨 다니며 권력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다. 당연히 당시 대부분 사람이 그를 시기하고 무시했다. 그러다 보니 피동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이에 자신의 재능을 다른 이들이 시기하거나 경계심을 품지 않도록 항상 말을 삼갔고, 가능한 한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며, 자식의 혼인 역시 권세가와 맺지 않았다. 철저히 비주류의 삶을 산 셈이다.


이런 그를 ‘기회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부정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진수 역시 그의 그 점을 높이 평가하며, 순욱, 순유와 함께 그를 조조의 가장 뛰어난 책사로 꼽았다.


가후는 오직 자기 능력만으로 난세를 헤쳐 나갔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난세에 살아남는 처세에서는 그를 넘어설 만한 이가 없다. 비록 한 명의 군주를 모시는 충성심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능력과 처세에 있어서만은 누구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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