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되려면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배려란 ‘마음을 써서 보살피고 도와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존경받는 리더십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용인술의 핵심은 자기 능력을 정확히 알고, 자기보다 재능 있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딱 부합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한 고조 유방(劉邦)이다. 유방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제후나 귀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런 그가 황제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진시황에 이어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할 수 있었던 데는 소하(蕭何), 한신(韓信), 장량(張良) 같은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중용했기 때문이다.
진나라 말기, 영웅호걸을 자처하는 이들이 중국 전역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들 중 두 사람이 마지막까지 자웅을 겨루었다. 서초패왕 항우(項羽)와 저잣거리 건달 출신의 유방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항우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항우와 비교해서 유방은 모든 면에서 절대 열세였다. 출신에서부터 외모, 능력, 군사력은 물론 전투 능력까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용장인 항우와는 비교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했다. 하지만 천하를 차지한 것은 항우가 아닌 유방이었다.
통일 후 황제가 된 유방이 공신들과 연회를 베풀었다.
유방이 가운데 앉고, 일등 공신인 소하와 한신, 장량이 그 옆에 앉았다. 이를 본 한 신하가 스승에게 물었다.
“소하, 한신, 장량은 모두 능력이 뛰어나지만, 정작 유방은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니고 저들처럼 능력이 출중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들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까?”
“수레가 무거운 짐을 싣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 줄 아느냐?”
“튼튼한 바큇살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똑같은 바큇살을 쓰고도 힘의 차이가 나는 줄 아느냐?”
“…….”
“수레바퀴는 바큇살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살과 살 사이의 공간 역시 매우 중요하다. 튼튼한 살이라도 그 공간이 엉성하면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바퀴를 만드는 비법은 그 살과 살의 공간에 균형을 잡는 장인의 능력에 있다. 저 중에서 누가 그 장인에 해당하겠느냐?”
“그러면 스승님, 장인은 어떻게 바퀴의 살과 살 사이의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까?”
“햇빛을 봐라. 햇빛은 온갖 나무와 풀, 그리고 꽃을 키운다. 유방이 바로 그런 햇볕이자, 장인이다. 모든 부하가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어 일하게 하고, 그들이 이룬 공은 모두 돌려줌으로써 화합을 끌어내는 것이다.”
― 《정관정요(貞觀政要)》 중에서
오불여(吾不如). 유방의 용인술을 말할 때 자주 쓰는 말로, “나는 누구보다 못하다”라는 뜻이다. 지나친 애주가에, 속이 매우 좁고, 질투심이 많았던 유방은 자신의 약점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나아가 그것이 천하를 제패하는 데 있어 불리하게 작용할 것임을 알고 각 분야의 인재를 찾아서 자신의 약점을 철저히 보완했다. 즉, 자존심을 버림으로써 인재를 끌어모으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했다.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과 용인술에 있어서 만큼은 그가 항우보다 훨씬 뛰어났던 셈이다.
말했다시피, 유방은 항우와 애당초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렇다 할 배경은 물론 재산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이름조차 분명치 않다. 실례로, 《사기》와 《한서(漢書)》에도 ‘유방’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내용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저 성이 유 씨며, 이름은 계(季)라고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역시 거의 불리지 않고, 그저 ‘유 씨네 막내’ 정도로 통용되었다. 즉위 후에야 ‘유방’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그 역시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만큼 낯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출신 성분에도 리더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아랫사람의 됨됨이를 한눈에 파악할 줄 아는 뛰어난 안목, 쓴소리를 들을 줄 아는 열린 귀, 함께 고생한 이들과 공과를 나눌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방의 가장 큰 장점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것이었다. 항우가 용맹으로 기세를 떨칠 때 그는 따뜻한 포용력으로 민심을 얻었다. 그 결과, 항우와의 싸움에서 항상 패하면서도 부하들의 도움으로 매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비판 역시 경청할 줄 알았다. 듣기 싫은 소리를 했다고 해서 사람을 마구 죽인 항우와는 정반대였다. 그러니 시간이 흐를수록 항우가 아닌 그의 곁에 인재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했다.
반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닌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역시 대부분 권력자가 그랬듯이, 황제 즉위 후 생사고락을 함께한 개국 공신을 숙청했다. 엄청난 시련과 난관을 이기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지만, 점점 커지는 그들의 세력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듯, 유방에 대한 중국인들의 평가 역시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인정이라고는 없는 잔인무도한 사람”이라는 말에서부터 “봉건 황제 중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다. 그만큼 그에 대한 호불호는 극명하게 나뉜다.
그런가 하면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유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선견지명이 있고, 영향력 있는 정치인은 로마 제국을 세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다.”
카이사르는 로마 1,000년 왕정의 기틀을 닦았고, 유방은 한 왕조 2,000년의 기반을 닦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로마는 한때 세계를 제패한 위대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국가도, 민족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역사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반면, 한 왕조는 유방에 의해 건국된 후 당(唐)·송(宋)·명(明) 등을 거치면서 한(漢)족 중심의 역사를 2,000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다. 물론 한나라는 400여 년 만에 망했지만, 오늘날 중국인들이 자신을 ‘한족(漢族)’이라고 칭하며 스스로 한나라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도 이루지 못한 것으로, 한나라에 이르러 중국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음을 방증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 고조 유방은 오늘날 중국의 국가적 문화 정체성을 만들어낸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