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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이 아낀 인재들의 공통점

by 마테호른


서기 200년 5월, 강동의 젊은 군주 손책(孫策)이 죽었다. 광릉 태수 진등(陳登)과의 접전을 앞두고 단도(丹徒)에 머물던 중 얼굴을 피격당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손책의 어린 동생이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손권(孫權)이다.


형의 뒤를 이은 손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우는 것이었다. 계속 울기만 하는 그를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 무열황후(武烈皇后)가 말릴 정도였다. 이 모습만 보면 손권이 매우 유약한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큰 야망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손권의 나이는 겨우 19세에 불과했다. 경쟁자였던 조조가 40세에 천하에 이름을 알렸고, 유비가 50세가 다 되어 겨우 작은 성 하나를 차지한 점을 고려하면, 그의 시작은 매우 빨랐던 셈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의 지지 세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핵심 참모인 장소(張昭)마저 동생 손익(孫翊)이 후계자로 더 낫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의 영(令)이 제대로 설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를 못 미더워하는 이들이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강동을 통째로 바치려고 한 일이 곧 일어났다. 그 주동자는 다름 아닌 그의 사촌 형 손보(孫輔)였다. 손권은 장소와 함께 즉시 그를 심문했지만, 손보는 끝까지 부정했다. 편지를 보여주자, 그제야 몹시 부끄러워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에 손권은 그의 일가와 측근을 모두 죽인 후, 그 역시 유폐시켰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손책의 부하였던 여강 태수 이술(李術)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술은 손권을 애송이로 생각하며 따르지 않았는데,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자 더욱더 교만해졌다. 손권이 그들을 보내 달라고 거듭 요청했지만, 그는 “중모(仲謀, 손권의 자)가 덕이 없는 탓에 자신을 따르는 것”이라며 단박에 거절했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조조의 군대가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손권은 조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엄자사(양주 자사 엄상)는 옛날에 공에게 기용되었으며, 한 주가 임명한 장수였음에도 이술이 해치고 말았습니다. 한나라의 제도를 범한 무도한 그자를 신속히 죽여 없애야 합니다. 이제 이술을 치려는 바, 이는 한편으로는 국조를 위해 흉악한 무리를 없애려 함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장수의 원수를 갚기 위함입니다. … (중략) … 이술은 반드시 거짓을 꾸며 구원을 요청할 것입니다. 명공께서는 아형(阿衡)의 벼슬에 계시면서 해내에서 우러러보고 있으니, 바라건대 집사에게 칙령을 내려 그의 요청을 들어주지 마십시오.

― 《삼국지》 권47 〈오서〉 ‘강표전’ 중에서


조조가 임명한 엄상(嚴象)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술을 친다면서 그를 절대 돕지 말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러고는 곧 이술을 공격했다. 이때 이술은 성문을 닫고, 조조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끝내 조조의 군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써 손권은 첫 친정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물론 비로소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손권은 항상 차선책을 구하고, 일 보 후퇴해서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이인자의 철학’을 실천했다. 또한, 독단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그들과 협의를 통해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했다. 이에 신하의 장점은 존중하고, 단점은 지적하지 않는 유연함을 통해 내부 반발을 잠재우며 수많은 난관을 극복했다. 통합의 리더십을 지녔던 셈이다. 그 결과, 대세를 쥐고 흔들만한 특별한 재능이 없었음에도 삼국의 지도자 중 가장 오랫동안 황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완전한 흰털을 가진 여우는 없다. 그러나 여우 털로 만든 완벽하게 흰옷은 있다. 이는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하다. 여러 사람의 힘을 쓸 수 있다면,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고, 여러 사람의 지혜를 쓸 수만 있다면 성인의 지혜도 두렵지 않다.

― 《삼국지》 권47 〈오서〉 ‘오주전’ 중에서


단, 그가 인재를 등용하는 데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처음부터 아예 쓰지 않았으며, 한 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노숙(魯肅)과 여몽(呂蒙), 제갈근(諸葛瑾), 육손(陸遜)이다. 실례로, 그는 전쟁에서 총사령관을 맡기는 했지만, 모든 권한을 주유(周瑜)에게 주었고, 외교와 병참에 관한 권한은 노숙에게 일임한 후 절대 참견하지 않았다. 또한, 여몽이 병에 걸렸을 때는 조금이라도 몸이 나빠지면 자신이 더 침울해하고, 좋아지면 상을 내렸다. 심지어 그의 집에 몰래 구멍을 내어 병세를 몰래 지켜보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그가 아낀 인재 대부분이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이거나 외부에서 이주한 가문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했다시피, 지지 세력이 약했던 그가 철저히 의도한 것이었다. 그를 반대하던 세력을 제압하려면 어떻게든 친위 세력을 육성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인재 정책에 전혀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방통(龐統)을 등용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방통의 재능을 알아본 노숙이 그를 등용할 것을 요청했지만,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그를 퇴짜 놓았다. 알다시피, 방통은 지략으로 제갈공명과 쌍벽을 이뤘던 인물로, 둘 중 한 명만 데리고 있어도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돌았을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 따라서 그가 만일 방통을 등용했다면 삼국의 역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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