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윈 후 마더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김유정
김유정은 탁월한 작가였지만, 사랑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살아생전 두 명의 여자를 짝사랑했다. 1926년 가을, 휘문고보 3학년 때 공중목욕탕에서 나오는 박녹주를 보고 첫눈에 반한 그는 그녀를 2년여 동안일방적으로 쫓아다니며 고백했지만 거절당했다. 또한, 죽기 10개월 전 1936년 <여성> 5월호에 ‘그분들의 결혼플랜-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라는 제목으로 나란히 글을 썼던 박봉자를 연모해 30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과연, 그가 두 여성에게 이렇게 집착했던 이유는 뭘까.
김유정은 빼어난 문학작품을 다수 남긴 반면,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스물아홉 살이란 나이에 삶을 마치고 말았다. 불우하다고 말할 수밖에.
1930년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낙향한 그는 형의 집 사랑채를 이용해 야학을 운영했다. 그러나 곧 불에 타 마을 청년들과 함께 ‘금병의숙(야학당)’을 짓게 된다. 금병산에서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가 직접 건물을 지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그는 당시 춘원 이광수가 벌이던 브나로드 운동의 영향을 받아 문맹 퇴치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현재 그곳에는 김유정 문학촌이 들어서 있어 많은 사람에게 그의 문학 정신을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작 그의 손때 묻은 유품은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죽자 그와 친한 친구 사이였던 소설가 안회남이 전집을 내준다는 이유를 대며 유품을 모아놓은 보따리를 가져간 후 월북했기 때문이다.
안회남은 그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유정이 남기고 간 것, 많은 유고와 연애편지를 쓰다 둔 것과 일기, 좌우명, 사진, 책 이런 것들을 전부 내가 보관하여 가지고 있는데, 한 가지 없어진 것이 있다. 그것은 다만 한 장 있던 그의 어머니 사진이다.”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윈 김유정은 항상 어머니 사진을 가슴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사진 역시 김유정이 가슴에 품고 간 것은 아닐까.
그의 일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는 평생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이에 일곱 살 연상의 유부녀 박녹주를 짝사랑해서 쫓아다녔는가 하면, 같은 잡지에 글이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시인 박용철의 여동생 박봉자에게 무려 30여 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술에 의지하며 방황의 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소설 <생의 반려>를 보면 주인공이 “난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소리치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이는 실상 그의 내면에 숨죽이고 있던 그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있었기 때문이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모두의 축복 속에서 살아왔지만 결국에는 쓸쓸하게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김유정. 당시 폐병을 앓고 있던 시인 이상이 찾아와 동반 자살을 제의했지만, 그는 내년 봄에도 소설을 쓰겠다며 끝까지 삶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먹고 싶은 것도 먹지 못한 채 결국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죽기 11일 전 절친한 벗이자, 휘문고보 동기생인 소설가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 <필승전(‘필승’은 안회남의 본명)>에 당시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흥망)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 (중략) …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해다오. 요즘 나는 가끔 울면서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일뿐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 친구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 <필승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