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혈서’를 써야만 했던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자살은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왔다. … 모든 것이 다 하나도 무섭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 가운데에도 이 ‘죽을 수도 없는 실망’은 가장 큰 좌표에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희망한다. …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 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서문 중에서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뒤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모르는 것은, 내 재주도 모자라겠지만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여남은 개쯤 써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2천 점에서 30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31년, 32년 일에서 용대가리를 떡 꺼내어놓고 하도 야단해서 뱀 꼬랑지는커녕 쥐 꼬랑지도 못 달고 그만두니 서운하다. 깜박 신문이라는 답답한 조건을 잊어버린 것도 실수지만 이태준, 박태원 두 형이 끔찍이도 편을 들어준 데는 절한다.
첨(籤, 간단히 적거나 표하여서 붙이는 작은 쪽지) ─ 이것은 내 새 길의 암시요, 앞으로 제 아무에게도 굴하지 않겠지만 호령하여도 에코 ─가 없는 무인지경은 딱하다. 다시는 이런 ─ 물론 다시는 무슨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고, 우선 그만둔다. 한동안 조용하게 공부나 하고 딴은 정신병이나 고치겠다.”
─ 이 상, <산묵집 ─ 오감도 작자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