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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소설 점수는 몇 점?

‘시대의 혈서’를 써야만 했던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by 마테호른


이상은 당시 유행하던 사실주의나 계급주의 문학과는 전혀 다른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로 남다른 개성을 발휘했다. 지금이야 그를 시대를 앞서간 문학 천재로 인정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는 미친 사람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혹자는 그의 소설을 보고 59점이라는 낮은 점수를 매기기도 했다.




◆ 비평가 김문집이 매긴 이상의 소설 점수는 59점


이상. 그는 건축가이면서 그림을 그리고, 시와 소설을 썼던 다재다능한 예술가로 식민지 시대 도시에 사는 지식인으로서 느끼는 억압과 우울, 그리고 신문물에 대한 문화적 경도를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감성으로 담아냈다.

하지만 몇몇 동료 작가를 제외한 대부분 사람은 그의 글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친 사람의 헛소리라거나 어린아이의 말장난쯤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심지어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에서는 “족보에 없는 비평가 김문집 선생이 내 소설에 59점이라는 좀 참담한 채점을 해 놓으셨다. 59점이면 낙제다”라며 비참한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족보에 없는 비평가 김문집 선생이 내 소설에 59점이라는 좀 참담한 채점을 해놓으셨다. 59점이면 낙제다. 한 끗만 더 했더라면…… 그러니까 서울말로 ‘낙제 첫 찌’다. 나는 참담했습니다.”


결국, 시대를 앞선 예리한 문학적 촉수와 세련된 문체는 기실 이상의 장점이 아닌 아픔이자 고통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그의 글에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기쁨과 행복, 즐거움보다는 역설과 위트, 독설과 비애, 권태가 가득하다.


1930년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발표한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자살은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왔다. … 모든 것이 다 하나도 무섭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 가운데에도 이 ‘죽을 수도 없는 실망’은 가장 큰 좌표에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희망한다. …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 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서문 중에서


◆ “태어나서 우리 문학사를 50년 앞당겼고, 죽어서 우리 문학사를 50년 후퇴시킨 존재”


이상. 그는 우리 근대문학사가 낳은 불세출의 시인이요, 소설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의 글은 매우 기괴하고 낯설다. 그 출현 이전 이후에도 그와 같은 글을 쓰는 문인은 없었다. 그러니 80여 년 전 그의 글을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 역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이 그의 글을 가리켜 ‘정신이상자의 잠꼬대’나 ‘어린아이의 유치한 말장난’으로 치부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그를 죽이겠다며 신문사에 항의한 사람도 있었다.


이런 세간의 평가에 관해 이상 자신은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실험 시 <오감도>의 신문연재가 중단된 후 그는 ‘오감도 작자의 말’이라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뒤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모르는 것은, 내 재주도 모자라겠지만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여남은 개쯤 써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2천 점에서 30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31년, 32년 일에서 용대가리를 떡 꺼내어놓고 하도 야단해서 뱀 꼬랑지는커녕 쥐 꼬랑지도 못 달고 그만두니 서운하다. 깜박 신문이라는 답답한 조건을 잊어버린 것도 실수지만 이태준, 박태원 두 형이 끔찍이도 편을 들어준 데는 절한다.
첨(籤, 간단히 적거나 표하여서 붙이는 작은 쪽지) ─ 이것은 내 새 길의 암시요, 앞으로 제 아무에게도 굴하지 않겠지만 호령하여도 에코 ─가 없는 무인지경은 딱하다. 다시는 이런 ─ 물론 다시는 무슨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고, 우선 그만둔다. 한동안 조용하게 공부나 하고 딴은 정신병이나 고치겠다.”

─ 이 상, <산묵집 ─ 오감도 작자의 말> 중에서


이렇듯 그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절망하고, 거울 속 자신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그런 그를 가리켜 시인 김기림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상은 오늘의 환경과 종족의 무지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상은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그는 현대라는 커다란 파선(破船)에서 떨어져 표랑하던 너무나 처참한 선체(船體) 조각이었다.”


다행히 동료 작가들의 평가는 세간의 평가와 크게 달랐다.


“태어나서 우리 문학사를 50년 앞당겼고, 죽어서 우리 문학사를 50년 후퇴시켰다고 말해도 될 존재”
─ 시인 김기림

“인류가 있은 이후 가장 슬픈 소설을 쓴 사람!”
─ 시인 박용철



▲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던 이상(앞줄 왼쪽). 오른쪽은 시인 김소운, 뒷줄 안경 쓴 이는 소설가 박태원(영화감독 봉준호의 외조부)



‘시대의 혈서’를 써야만 했던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는 ‘천재’다. 그러나 26년 7개월이라는 짧은 삶은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자신을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라고 했던 그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절망했고, 거울 속 자신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심지어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쓰기도 했다.


“일세의 귀재 이상은 그 통성의 대작 〈종생기〉 일편을 남기고 일천구백삼십칠 년 정축 삼월 삼일 미시 여기 백일(白日) 아래서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끝맺고 문득 卒하다.”




▲ 거울 속 자신과 끊임없이 싸웠던 불세출의 문인 이상의 삶과 문학을 담은 <이상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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