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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번째 생일을 맞은 아들에게

by 마테호른

2003년 4월 30일 오후 3시 15분.


내 인생에서 가장 선명하게 멈춰 있는 시간이다.
세월은 많은 것을 흐리게 만들었지만,

그 순간만은 아직도 어제처럼 또렷하다.


너는 세상에 나오기로 한 날보다 열두 날을 더 엄마 뱃속에서 머물렀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도 소식이 없던 시간.

기다림은 점점 길어졌고, 엄마 아빠의 마음은 말없이 조급해졌다.


한편으로는 너다운 첫인사 같기도 했다.

서두르지 않고, 자기만의 시간으로 세상에 오려 했던 아이.


그날 노량진 청화병원 복도는 이상하리만큼 길었다.
하얀 벽, 희미한 소독약 냄새, 분주한 간호사들의 발걸음….


모든 풍경이 긴장 속에 멈춰 있는 듯했다.


나는 복도를 서성였고, 시계를 보았고, 두 손을 모았다.

봄날 오후의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내 마음에는 햇살이 닿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사람이 운다는 것은 슬퍼서만이 아니라, 너무 기뻐도 울 수 있다는 것을.


네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 한가운데 무언가 뜨겁게 차올랐다.

안도감이었고, 감사함이었고, 벅참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목까지 차올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 세상만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잠시 후 처음 본 너는 너무 예뻤다.
조그만 손, 꼭 감긴 눈, 붉은 얼굴, 그리고 우뚝 솟은 코.

그 작은 몸 하나가 어쩌면 그렇게 큰 감동일 수 있는지.


너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심장 깊은 곳에 찾아오는 것이라는 걸.


벌써 24년 전 일이다.
그 작고 연약했던 아이는 이제 어깨가 든든한 청년이 되었다.


내 손가락 하나 꼭 잡고 걷던 아이가,

이제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나이가 되었다.


넘어지며 자전거를 배우던 날, 운동회에서 손 흔들던 모습,

밤늦게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뒷모습, 말없이 고민을 품고 있던 사춘기의 얼굴….

아빠는 네가 자라는 동안 수없이 많은 계절을 함께 지나왔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사실은 네가 자란 만큼 아빠도 자랐다.


너를 통해 책임을 배웠고,
너를 통해 기다림을 배웠고,
너를 통해 사랑은 주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더 크게 만드는 기적이라는 걸 배웠다.


아빠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좋은 말보다 잔소리가 많았고, 표현보다 걱정이 앞섰으며,

사랑하면서도 다정하게 보여주지 못한 날들이 많았다.


지금도 아쉬움은 남는다. 조금 더 웃어줄 걸, 조금 더 믿어줄 걸, 조금 더 안아줄 걸.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빠는 단 한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스물넷의 너는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걸어가고 있다.
앞으로 기쁜 날도 많겠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날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앞서가는 것처럼 보이고,

너만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올 것이다.


그럴 때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꽃은 모두 같은 계절에 피지 않는다.
누군가는 봄에 피고, 누군가는 여름에 피며, 어떤 꽃은 늦가을에 가장 찬란하다.


너는 예정일보다 열두 날 늦게 태어난 아이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가장 좋은 때를 알고 나오는 아이였다.
그러니 지금도 조급해할 이유가 없다.
너의 시간은 늘 너의 방식으로 정확하게 흐르고 있다.


률아,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2003년 4월 30일 오후 3시 15분, 청화병원에서 들려오던 너의 첫 울음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작이었다.


그리고 24년이 지난 오늘,
너는 여전히 아빠 인생의 가장 큰 자랑이다.


사랑한다, 률아.
네가 어디에 있든, 어떤 길을 걷든,
아빠의 마음은 늘 네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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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그곳에서 배웠다. 단 한 줄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그 한 줄을 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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