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Benjamin Moser (2019)
1. Oh Susan, 예술, 문화, 인류, 그리고 희망
Susan Sontag (1933-2004)
1950년대 미국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2004년 타계할 때까지 수많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수잔 손택. 당시 프랑스 파리 같은 유럽의 도시보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흔하지 않던 시기였던 미국 20세기 한가운데, 아름다우면서도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손택의 등장은 그야말로 남성 작가 중심으로 돌아가던 미국 문단에 혁명과도 같은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녀를 단지 미국의 "여성" 작가 또는 "여성" 비평가로 한정 지을 수 없을 것 같다. 여성, 작가, 퀴어, 엄마, 아내, 교수, 학자, 비평가, 유태인계 미국인, 영화감독, 싱글맘, 철학자, 레즈비언, 사회 활동가, 시나리오 작가. 그녀를 수식하는 이름들은 많았지만 어떤 하나의 레이블도 그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녀는 여성을 지지하면서도 페미니스트로 불리는 것을 거부했으며, 동성도 이성만큼 사랑하는 양성애자였지만 동성애자인 것을 부인했으며, 동성애자들과 아름다움에 대해 글을 썼으면서도 동성애자들"만"을 옹호하지 않았다. 그녀는 보편을 택했고, 인류와 문화와 아름다움에 대해 예찬했으며, 예술에서 인류의 희망을 찾았다. "타인"들의 생각과 몸짓과 고통을 "더 보고, 더 듣고, 더 느끼"려고 했으며, 철학과 글쓰기를 통해 무너져 내린 삶과 문화 그리고 인류에 숨을 불어넣으려고 애썼다.
물론, 글도 많이 쓸수록 많은 오타가 나듯이, 그녀가 뛰어들었던 다양한 경험들은 착오와 실수 그리고 비난을 초래했다. 어떤 것은 미성숙함으로, 어떤 것은 편견과 오지랖으로, 어떤 것은 변덕으로, 그녀의 명성에 흠집을 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이라 이성적으로 판단되는 것은 주저 없이 지적하고 비난했으며, 규탄해야 할 것을 두려움 없이 나섰다. 미국 아니 세계사회 문화 논쟁의 중심에 늘 그녀가 있었다.
2. 편견에 반대하다
그렇지만 그녀의 전기 (biography)를 읽고 읽기 전보다 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읽는 도중, 그녀에 대한 많은 정보가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고, 어떤 정보는 정확하게 입력도 되었지만, 또 그대로 출력되어 백지만 남은 기분도 들었다. ephemerality "덧없음"이라는 단어가 페이지 속에서 바다 위 부표처럼 시시 때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확실함은 불확실함이었고,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추측, 또는 그녀 자신의 추정일 수도 있었다. 이 전기를 쓴 저자 Benjamin Mosers의 시선과 관심의 정도에 따라 그녀에 대한 해석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커다란 스펙트럼을 낳기도 했다. 나는 무엇을 아는 걸까. 무엇을 알고자 했으며 무엇을 알아야 했을까. 그녀의 일기를 엿보고 이렇게 저렇게 퍼즐을 맞추듯 그녀의 인생을 해석해 보는 것은, 어쩌면 죽은 그녀를 해부대에 올려놓고 병명을 가려내기 위한 난도질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불투명성. 이렇게 세세하고 꼼꼼한 전기가, 여기저기서 수집한 증거와 정보들로 촘촘하게 엮은 전기는, 그녀에 대해 거의 많은 것을 보여주고 알려주고 있지만, 나는 정작 그녀가 꿈꿨던 삶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맑고 투명한 단어로 설명할 수가 없다. 기사, 에세이, 논문, 수상 경력 등, 그녀가 눈에 보이게 성취한 것들은 꽤 정확하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말하고 쓴 이야기들을 여러 키워드로 분류하여 수없이 나열해 보아도, 일기장과 편지들의 내용으로 그녀의 심리 상태를 헤아려 보아도, 그것들은 그녀가 자라난 배경과 식성만큼 딱 떨어지는 말로 도무지 정리할 수 없다.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살아있을 적에도 그녀는 한 번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적이 없었던 것을. 속내가 담긴 "일기"와 "편지"라고 해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진실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녀의 강해 보이는 얼굴과 단단하면서도 오만한 태도 뒤에는 툭하면 움츠려드는 애정 결핍의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녀 안에서는 늘 소크라테스와 니체/스피노자가 대치하다가 서로의 몸과 엉겨 붙어 혼란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인간의 도덕적 기본 소양을 삶의 토대로 삼으면서도, 도덕과 윤리라는 강박에 시달렸으면서도, 때로는 비도덕적이었던 사람. 아들을 목숨보다 사랑했지만 아들보다 자신의 지적 탐구와 감각적 경험을 더 우선했던 사람.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유아풀의 물처럼 따뜻해지던 사람.
해석이 불가능한 사람. 하지만 이것은 그녀에 대해 어떤 해석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어떤 편견도 불가능하게 했다. 그녀가 쓴 <해석에 반대하다>라는 글은 어쩌면 그런 그녀 자신을 바탕으로 쓰게 된 글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알지도, 보지도, 만지지도 못한 그녀를 오로지 이 전기와 그녀가 쓴 글들에 의존해 그녀를 해석 아니 평가와 판단을 하려고 했던 나 자신을 돌아본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앎의 시도가, 해석이, 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기 위한 상냥한 발걸음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러한 내 욕망을 좋게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젊은 날의 손택을 보면, 머리는 너무 똑똑했지만, 감성이 지성을 따라가지 못하여 어떤 안쓰러운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최고의 지성을 지녔지만, 감성적으론 미성숙한, 그래서 인간관계가 서툰, 성급하고 당돌하고 오만하지만 겁 많고 순진하고 해맑은 아이 같은 사람. 그래서 그녀 곁에서 마음고생을 해도 그녀를 아이처럼 아낄 수밖에 없었다는 친구들과 지인들의 이야기가 더러 보인다.
자신을 마치 "타인"처럼 바라보고 성찰했던 그녀는 그 불균형을 일찌감치 인지했다.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했던 흔적들이 안쓰러울 정도로 그녀의 삶에 쉼 없이 남겨져 있지만, 그녀의 삶은 이성적 분석과 감각적 갈망, 뜨거운 추구와 차가운 부정, 열정적인 옹호와 냉정한 거부 사이를 오가며 불꽃 일으키는 위태로운 마찰 그 자체로 보인다.
3. 타인의 고통을 본다는 것은: 바람이 불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손택
격변의 세기였던 20세기를 관통했던 사람으로, 늘 움직이고 변화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그녀의 일대기는 굵직굵직했던 역사적 사건들과 비례할 수 있을 만큼 풍성한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손택의 업적은 위기에 빠진 인간의 존엄성과 예술을 지키려는 그녀의 즉각적인 응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가 보여준 용감하고 담대한 행동에서 "예술은 자유"라는 믿음과 문화에 대한 그녀의 확고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술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라면, 예술을 위한 것이라면, 예술이 그리고 예술가가 위험에 직면했다면 그래서 고통받고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목소리를 냈다. 예술과 문화에 고통과 위기의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는 온몸을 다해 바스락거렸다.
첫 번째 응답:
손택은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와 같은 원칙을 고수하는 세계작가 협회 국제 PEN (Poets, Playwrights, Editors, Essayists, and Novelists) 클럽의 미국 본부 회장직을 1987년부터 맡기 시작했다. 손택은, 얼마 지나지 않은 1988년, 서울에서 열린 PEN 컨퍼런스에서 이산하 시인의 필화 사실을 절감하고 (이산하 시인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 <한라산>이라는 장편서사시를 써서 구속됐다) 노태우 정권에 시인의 석방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석방요구는 끝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손택은 PEN 작가들의 국경 없는 연대를 세계에 그리고 한국에 보여주었다. 한국인인 나는 그녀의 행동에 깊이 감동받는다. 이산하 시인이 그로부터 12년의 시간이 지난 2000년 출국금지가 풀려 손택과의 만남을 시도했지만, 손택은 투병 중이었고 그녀가 결국 2004년 세상을 뜨게 되면서 둘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산하 시인 필화 사건과 그가 절필하고 힘겹게 살아온 삶, 고문과 옥살이 트라우마로 점철된 인생, 얼마 전 다시 집필을 시작했으나 홀로 외롭게 암투병하고 있는 그의 현재 상황이.. 그가 산 역사가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부당함에 맞서고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용감한 자들이 한다. 용기라는 단어는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아주 흔한 단어가 되었지만, 결코 아무나 지닐 수 없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왜 그리도 진실을 알리는 것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목숨과 인생을 걸만큼 힘든 일이어야 하는지.. ).
"We are writers here to help other writers. [...] The job of writers is to speak out."
우리는 다른 작가들을 돕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작가들의 임무는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Sontag, PEN SEOUL 1988
두 번째 응답:
목숨 걸고 글을 쓰는 작가는 또 있다. 그 유명한 <악마의 시 The Satanic Verses> (1988)를 쓴 영국계 인도인 작가 살만 루시디 (1947-). 그는 1988년 선, 악, 종교적 신념을 주제로 하는 <악마의 시>를 발표했는데, 내용 중에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부정하고 코란의 한 부분을 악마의 시로 비유했다는 등의 이유로 이슬람계의 격분을 샀다. 그의 책을 출판한 영국과 미국의 출판사들과 서점들이 폭파당했고, 노르웨이의 출판자, 터키어와 이탈리아어 번역자들은 총상을 당했으며, 일본어 번역자는 살해당했다. 1989년 이란의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 (Ayatolla Khomeini)는 루시디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은 "fatwa"를 공포했고 루시디는 호메이니가 사망한 1998년까지 영국의 보호를 받았다.
이 사건 또한 손택이 PEN 클럽 회장직에 있던 시기에 일어난 일로, 손택은 격노한다. 이 격노는 단지 루시디를 위협했던 호메이니와 이슬람 단체들을 향한 것만이 아니었다. 한 작가의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말을 아끼던 미국의 비겁한 작가들을 향한 일침이기도 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며 침묵했던 작가들 중에는 커트 보네것 (Kurt Vonnegut)도 있었다고 한다. (미국 문학에서 오랜 세월 사랑받고 존경받는 대작가로 알려진 보네것한테 적잖이 실망했다).
이때 손택은 보란 듯이 작가들을 집합시켜 루시디의 <악마의 시>를 읽는 이벤트를 추진했고, 조앤 디디온 (Joan Didion), 돈 드릴로 (Don DeLillo),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 다이애나 트릴링 (Diana Trilling), E.L 닥터로 (E.L Doctorow), 로버트 카로 (Robert Caro)와 같은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나는 이 이벤트 자체가 한 예술 행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이벤트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과 영국은 루시디의 책을 원래 계획대로 출판하게 된다.
세 번째 응답:
손택의 세 번째 응답은 1992년 사라예보에서 있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옛 유고 연방도 해체가 시작되었는데, 6개국을 구성했던 유고연방에서 1991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가 독립하고 1992년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독립하하자마자, 나머지 2개 국가였던 세르비아 (코소보 포함)와 몬테네그로가 신유고 연방을 결성하고 세르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지휘아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장악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Seige of Sarajevo로 곧 보스니아 내전 (1992-1996)의 시작이었다.
사라예보는 이슬람과 기독교, 가톨릭과 동방 그리스 정교회가 만나는 지점으로 다양한 종교를 가진 여러 인종의 삶들이 사는 곳이었는데, 세르비아는 사라예보를 장악하고 무슬림 보즈니안들을 무자비로 학살하는 인종청소 (Bosnian Genocide)를 자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내전 중에 보스니아 여성 2만 명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오스트리아의 작가 페터 한트케 (Peter Handke)가 수상 당시 논란이 있었던 이유는, 그가 이 끔찍한 보스니아 학살의 존재를 부정하고 내전을 일으켰던 세르비아의 대통롱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와의 깊은 인연을 계속해서 이어가며 그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손택은 사라예보에 갔다. 당시 사라예보는 현대적인 유럽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야만적, 미개한 도시로 착각하며 큰 관심을 쏟지 않았고, 손택은 고통받고 있는 사라예보를 어떻게든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손택은 (정말로 눈앞으로) 총알이 날아다니는 도시에 직접 뛰어들어가 사뮤엘 베킷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을 무대 위에 올렸다.
허기와 피로에 지쳐 픽픽 쓰러지면서도 보스니아 배우들은 그녀의 감독 아래 연극에 임했다. 그들은 자유를 갈망했고, 인간이기를 원했고, 예술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정말로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와주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예술이야말로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믿었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현장 속에서 피어나 세계에 투영되는 예술이 더 큰 힘을 낼 것이라는 것을. 더 큰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것을.
"Writers should be in the vanguard of the dissenting minority, those who are afraid, those who are ashamed, those who say No, those who say "we are bleeding," those who cry STOP."
-작가들은 두려워하는 이들, 수치스러워하는 이들, "안돼"라고 말하는 이들, "우리는 피를 흘리고 있어"라고 말하는 이들, "그만 멈춰"라고 소리치는 이들, 즉 소수의 반대자들 선봉에 서야 합니다.
-"What's Happening in America" (1967)
4. 저자: Benjamin Moser (1976-
1976년 미국 휴스턴 태생. Brown University에서 역사를 공부했고, 네덜란드 Utrecht University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에 브라질 작가, Clarice Lispector의 삶을 조명한 그의 첫 책 <Why This World>를 출간했고, 2019년에는 <Sontag: Her Life and Work>를 내면서 2020년 퓰리처상 전기부문 (Pulitzer Prize for Biography)를 수상했다.
P.S. 손택은 40대부터 찾아온 암이라는 질병을 두 번이나 이겨냈지만, 마지막에 찾아온 골수 이형증후군 (myelodysplastic syndrome)이라는 혈액암과의 싸움에는 패배했다. 무조건 살겠다는 정신력과 무서운 집념으로 의사들도 차마 권하지 못했던 고통스러운 항암치료와 골수치료를 치열하게 견뎌냈던 그녀에게 삶이란, 그녀의 모든 것, 전부였다. 백발의 반송장이 되어 숨을 헐떡이면서도 마지막까지 포기를 모르고 삶에 집착했던 그녀가 안쓰러웠다. 어떻게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에 그토록 뜨거울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손택은 또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괴리, 메타포, 해석, 사진, 영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아마 이 주제들이 그녀를 평생 동안 고민하고 연구했던 주제들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보는 행위, 즉 시선이 가진 권력과 그 권력으로 창조된 이미지는 현실을 왜곡하거나,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간격을 더 넓혀 진실로부터 멀기 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현장으로 직접 뛰어들어가 진실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기를 원했던 것이리라. 몸으로 온전히 "사는" 삶을 살고 싶어 했으리라.
나는 여전히 그녀를 모르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알 것 같다. 그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맹렬하게 살았"다는 것을...
주요 저서:
Against Interpretations (1966)
On Photography (1977)
Illness as Metaphor (1978)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2003)
The question of duty 의무의 문제
Duty to self- 자신에 대한 의무
A: Life is not just a question of courage. 삶은 단지 용기의 문제가 아니잖아.
M: But it is. 그렇지만 맞잖아.
Duty to others. 타인들에 대한 의무
K: It is hard to save anyone. But that is all we desire. 모든 이를 구하기엔 어려워. 하지만 그게 우리가 바라는 전부지.
(Moser p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