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illiams
1. [스토너 Stoner] (1965) by John Edward Williams
그러니까, 내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계정만 간신히 만들어놓고 잘 들어가지 않는 인스타그램에서 내가 팔로우하고 있는 어떤 이가 이 책의 리뷰를 올려놓은 것을 어느 날 보게 되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신형철 작가가 쓴 추천문 (blurb)을 또 우연히 어딘가에서 읽게 되었다. 그들의 인생 책이라고 하는 이 책이, "소설가들의 소설"이라고 이 책이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작가의 이름이 낯설었다. 2000년대에 영문학을 공부한 내가, 학교에서 이 작가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책의 제목도 들어본 적도 없다. 미국과 캐나다의 서점에서 본 기억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의 1972년 작품 [Augustus]가 존 바쓰 (John Barth)의 [Chimera]와 함께 1973년 National Book Award를 공동 수상한 이후 학계와 대중으로부터 사라졌다고 했다. 그는 완벽하게 잊혀진, 지워진 작가였다.
(공동수상도 이례적이지만, 서로 너무도 다른 두 작품이 함께 선정되었다는 것이 신기했는데, 이는 시대적 변화와 미국 문학의 전환점을 의미하기도 했다. 실험적 스타일의 포스트모던 픽션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는 바쓰 (Barth)의 작품과 전통주의를 잇는 윌리엄스(Williams)의 작품이 차세대 미국문학 자리를 두고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 듯한 이 현상이 꽤 흥미롭다).
그랬던 윌리엄스가 갑자기 사라지고, 2011년에서야 한 유명 프랑스 소설가에 의해 그의 1965년 작품 [스토너]가 번역되면서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먼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13년부터는 미국에서도 뒤늦게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게 되었다. [스토너]는 영국 가디언지와 미국 뉴요커에 소개되었고, 쥴리언 반스 (Julian Barnes)와 이안 매큐언 (Ian McEwan) 같은 영국 유명 작가들이 인정하는,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소설"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그 후로, 이 "고전"이자 "대작"을 뒤늦게 알아본 것을 탄식하듯 여러 관련 기사들이 뒷북치며 쏟아져 나왔다. (나는 이때도 알지 못했다). 아래 팀 크레이더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우리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이었다.
"One of the great forgotten novels of the past century" (Colum McCann)
"John Williams and the canon that might have been" (Leo Robson)
"A quarter century after his death, his austere, unflashy masterpiece was acclaimed a "perfect novel." Does it belong to a larger lineage of neglected modern literature?" (Leo Robson)
"The greatest American Novel You've Never Heard Of" (Tim Kreider)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9/03/18/john-williams-and-the-canon-that-might-have-been
2. 모순
[스토너]에 대한 찬사는 한국에서도 이어졌다. 그중에 신형철 작가의 말이 나를 이 책으로 인도했다.
"2015년 초에 뒤늦게 번역되어 그간 좋은 소설에 충분히 단련된 독자들마저 탄식하게 만드는 [스토너]는 초반 30쪽만 읽어도 눈물이 고이는 이상한 소설인데, "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 중에서)
"농민의 아들인 스토너가 농과대학에 들어갔다가 영문학 개론 시간에 이 73번 소네트를 읽고 문학에 눈을 떠서 처음으로 부모의 뜻을 거스르기로 결심하는 장면을 읽을 때 나는 완전히 수긍할 수 있었다"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 중에서).
나 역시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윌리엄스의 부드러운 물결처럼 편안한 문체에 매료되었다. 이내 [스토너]는 내가 열광하는 문장들로 나를 사로잡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억지스럽지 않게 지적이고 고급스러우며, 단순하면서도 복잡 미묘함을 매끄럽게 전달하는, 이해하기 쉽지만 그렇게 쓰기엔 어려웠을, 내가 수천 번도, 수만 번도 열광해도 모자랄 그런 문장들.
그러면서도 평범한 듯 담담하게 이어지는 문장 속에서 비범하게 내면을 꿰뚫는 뜨거운 시선과 정곡을 찌르는 매서운 통찰력, 뭐랄까, 이미 생을 다 살아본 사람의 여유로운 독백 같은, 어떤 욕심을 가져본 적도, 헛된 꿈도 꿔본 적 없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이 자신의 이미 꺼진 생을 되돌아보며 잔잔히 사랑을, 생을, 이별을, 죽음을 읊조리는 한 철학자의 희미해져 가는 목소리를 나는 넋 놓고 듣고 있는 듯했다. 신형철처럼 나는 여러 대목에서 여러 번 울컥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이미 한 차례씩 했을 인정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소설.
주위에 흔히 있을 법한 이 평범하고도 평범한 사람의 삶이 왜 난 궁금했을까. 왜 나는 그의 삶에 그렇게 공감하고 집중했나. 그건 아마 나도 그와 다를 게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일 거다.
[스토너]는 평범한 한 남자의 일대기이다. 간단히 말하면,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는 일 말고는 어떤 꿈도, 어떤 미래도 없었던 윌리엄 스토너가 미주리 대학 농과대학에서 우연히 문학 수업을 접한 뒤 문학에 눈을 뜨고 영문학 교수가 되어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 지극히 대수롭지 않은 남자의 삶이 건드리는 지점들은 이상하게도 너무 보편적이라 심오했고, 너무 평범해서 고귀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모순적이다. 양귀자의 [모순]과 여러 부분에서 맞물렸다. 신형철이 말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의 '0'를 향한 삶이란 어쩌면 '모순적'인 삶을 말하는 게 아니었을까.
"스토너의 삶은 뜻밖의 '기회'와 그에 따르는 '대가'에 언제가 공평하게 점령당한다. 그런 그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우리에게 제공하는 '기대와 실망'의 총합은 결국 '0'이다. 이 계산 과정을 경이롭도록 정확해서 어떤 아름다움에까지 이른다" (신형철)
[모순]에서 양귀자도 비슷한 계산을 했었다.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이다.... 할 수만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양귀자의 [모순] 중)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총합 역시 '0'인 것이다.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점철된 인간의 삶은, 그래서, 모순적인 것이다. 양귀자는 이 모순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양귀자의 [모순] 중)
"무엇을 따라도 모순의 벽과 맞닥뜨리는 인간과 삶.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 있으며,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의 본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양귀자의 [모순] 중).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간인 스토너 역시 무엇을 따라도 모순의 벽과 맞닥뜨린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스토너의 삶의 모든 순간에 그의 선택이 있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면 그의 삶을 살아내야 했다. 부모를 떠나 영문학을 선택한 것, 제1차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원하지 않고 대학에 남아 교수가 된 것, 첫눈에 반한 에디스 (Edith)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에는 실패한 것, 아내에게 딸 그레이스 (Grace)의 육아를 맡긴 것, 후배 강사와 진실한 사랑을 했지만 그녀와 헤어지고 결국 가정을 지키기로 한 것, 자격 미달인 박사과정 대학원생의 디펜스를 불합격시킨 것, 그것 때문에 대학 이사장과 불편한 관계가 된 것 등등...
눈여겨볼 점은, 모든 선택을 그가 자발적으로 했다는 것이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든 간에 그는 덤덤히 그 대가를 치렀다는 것이다. 그와 가장 친한 동기 교수 두 명이 전쟁에 참전할 때도 대학에 남기로 결정한 그는 주위의 따가운 눈초리를 느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첫눈에 반한 에디쓰와 결혼을 하지만 그 결혼생활이 실패했음을 자각했을 때도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빗질하듯 쓸어내리기만 할 뿐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다.
어떤 선택을 했다면 그 결과와 대가가 무엇이든 간에 그는 그저 받아들인다. 그 과정엔 호들갑도 없고 체념도 없다. 물론, 감정이 있는 한낱 인간이기에, 어느 날은 땅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어느 날은 하늘 위로 치솟는, 무섭게 요동치는 감정의 격렬함과 번뇌 때문에 상대적 무력함도 느낀다.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것 같은 자신이 식물인간 같다고 느끼기도 한다. 무엇인가 고통에 의해 살아있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He felt at times that he was a kind of vegetable, and he longed for something -even pain- to pierce him, to bring him alive" (184).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은 살 가치가 있나, 와 같은 질문을 하는 시기도 겪는다. 허무함이 지속되기도 했다.
"He was forty-two years old, and he could see nothing before him that he wished to enjoy and little behind him that he cared to remember" (186).
(나도 아주 가끔 이런 기분을 느낀다. 내 미래도 궁금하지 않고, 내 과거에도 미련이 없는 그런 무중력 한 상태의 기분. dissociaion, removal of my consciousness from the body. 그럴 때마다 다시 나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가장 큰 중력, 그래비티는 내 아이들, 내 가족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해탈한 사람처럼 살지도 않았다. 허무주의자도 아니었다. (스토너 자체도 정말 모순적이지 않나). 그는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에는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후에 오는 쓰디쓴 괴로움도 고요하게 겪어낸다. 그의 삶은 배움과 체험의 과정 그 자체였다. 그는 오로지 선택하고 실수하고 다시 그 대가를 치르며 살아내는 삶을 살 뿐이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는 양귀자의 말이 다시 오버랩된다.
3. 사랑
내가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아무래도 중년의 위기(?)에 대한 부분인데, 실패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면서 그는 어떤 깨달음에 도달한다. 사랑은 목적,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알고자 하는 끊임없는 시도이자 과정이라는 것을. (Erich Fromm, Joan Didion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내가 처음 사랑에 빠진 그 사람은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사랑도 변하고, 배우자도 변하고, 나도 변하기에. 오직 우리는 현재 그 사람을 알기 위해 오늘도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게 사랑이라고.
"In his forty-third year, William Stoner learned what others, much younger, had learned before him: that the person one loves at first is not the person one loves last, and that love is not an end but a process through which one person attempts to know other" (199).
어렸을 땐, 나 역시 사랑은 절대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줄 알았다. 내게 행운이 따른다면, 사랑이라는 어떤 변하지 않고 고결한 상태로 존재하는 그곳에 내가 걸어 들어가기만 한다면 나는 다 되는 줄 알았다. 연애에 성공하고 결혼에 성공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그 사랑이라고 하는 어떤 상태의 버블 속에 안전하게 흐트러지지 않은 예쁜 모양 그대로를 내가 들어가 그것을 누리면 끝이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스토너가 깨닫듯이, 나 또한 뒤늦게 깨닫는다. 사랑은 은혜로운 상태도, 환상도 아닌, a human act of becoming, 즉 무엇인가를 되기 위한, 변화하기 위한 인간의 행동과 과정이었다. 순간마다 날마다 창조되고 수정되고 다시 태어나는 그런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상태. 나의 의지와 지성과 감수성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탐구 과정. 사랑은 능동적인 그런 거였다.
"In his extreme youth Stoner had thought of love as an absolute state of being to which, of one were lucky, one might find access; in his maturity he had decided it was the heaven of a false religion, toward which one ought to gaze with an amused belief, a gently familiar contempt, and an embarrassing nostalgia. Now in his middle age he began to know that it was neither a state of grace nor an illusion; he saw it as a human act of becoming, a condition that was invented and modified moment by moment and day by day, by the will and the intelligence and the heart" (201).
후배 강사 캐서린 (Katherine Driscoll)과 불륜을 저지르지만, 스토너에게는 그것이 사랑이었다. 캐서린과의 뜨거운 사랑을 통해 스토너는 차가운 에디쓰와의 결혼생활에서 느끼던 육체적,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 거의 처음 맛보는 행복과 희열 euphoriad!로 되살아난 것처럼 보인다. (에디쓰는 미국의 50-60년대 frigid woman의 전형인데, 존 업다이크 (John Updike)의 소설 속 히스테리컬 여성 캐릭터와 비슷하다. 그녀와 대조되는 캐릭터가 캐써린이다. 어쩌면 두 명의 대조적인 여성 캐릭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히스테리의 묘사가 과도하여 여성 독자들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비평가들로부터 여성 혐오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가 대학에 알려지게 되자, 그들은 헤어지기로 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헤어질 결심, " 그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이해가 가기도 하는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해를 안 하고 싶기도 하다. 다 버리고 둘이 도망칠 수도 있고, 그들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왜?
"Because then,... none of it would mean anything- nothing we have done, nothing we have been. I almost certainly wouldn't be able to teach, and you - you would become something else. We both would become something else, something other than ourselves. We would be -nothing" (221).
둘이 도망간다면 더 이상 자신들이 아니라는 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 때문이라는 말.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또 다른 선택에 책임을 지면 되지 않나,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그는 더 이상 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녀 또한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why not? 왜 그렇게 살면 안 되나? 삶은, 사랑은, 인간은 변화하는 것이라면서...?
하지만, 도망간다면 그들은 더 이상 자신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이 가시처럼 날카로이 꽂힌다. 아둔하고 어리석게 보일 정도로, 지금까지 자신이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지고 대가를 치르고 살았던 자신들의 신념, 그리고 의지. 그것은 곧 그들의 정체성이자 그들의 삶 전부였다. 그것을 버리고 떠나는 순간, 그들은 살아오며 지켜왔던 선, 도덕, 가치관 등 그들의 모든 것을 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떠난다면, 자신들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It's simply the destruction of ourselves, of what we do" (222).
여하튼, 관계를 정리하고 스토너는 다시 살아간다.
"He didn't see Katherine Driscoll again" (222). 그리고 대학 강의에 혼신의 열정을 다하다가 은퇴할 즈음 암에 걸려 생을 마감하는 데, 그 끝은 또 너무 덤덤하고 잔잔해서 여운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4. 다 못한 말
신형철이 쓴 것처럼, "이 소설에 대해선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나는 제대로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나도 시작조차 하지 못한 기분이다. 너무 할 말이 많으니 쓰면서도 정리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제1차 세계대전과 진주만 폭격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돌고 도는 생과 사, 데자뷔 현상처럼 반복되는 '죽음'이 이 소설에서 메아리치고 있는데, 그것에서 오는 허무함이 특히 스토너의 죽음과 맞물려 절정을 이룰 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 고요한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에게 르네상스 낭만주의 시를 가르치고 있는 스토너의 마음엔 늘 작은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 "캠퍼스 소설"이지만, 전쟁 소설로도 읽히는 작품이다. 자신은 참전하지 않기로 했지만, 전쟁이 터지고 몸과 정신에 극심한 변화를 겪는 스승의 모습을 보며 스토너는 원인 모를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친한 동기가 전사하고, 그 소식을 접한 스토너는 그때부터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 친구와 스승을 떠올린다. 그의 삶엔 그들의 영혼과 유령이, 늘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 말이 많으나 너무 평범해서 다 말하지 못하겠고, 또 다 너무 특별해서 함부로 다 말하지 못할 것 같다. 정말로 이상하고 완벽한 책이다.
참고자료:
Robson Leo, "John Williams and the Canon that Might Have Been." The New Yorker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