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Leo Tolstoy

The Death of Ivan Ilyich (1886)

by 어떤 지혜 Ginger Ly



IMG_7323.jpg from the public library



1. Count Lev (Leo) Tolstoy (1828-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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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 Tolstoy

1828년 톨스토이는 모스크바에서 130마일 떨어진 Yasnaya Polyana라는 곳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톨스토이의 어머니는 그가 2세가 채 안되었을 때 죽었고, 아버지는 그가 9세가 되던 해에 죽었다. 어머니는 공주라는 타이틀이 있었고, 아버지 쪽 가족은 당시 러시아 왕가보다 더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던 가문이었다.


톨스토이는 어릴 때부터 동화, 푸쉬킨, 성경을 읽으며 자랐는데, 특히 구약의 조셉 이야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Kazan University에 입학해 법학, 동양어, 도덕철학, 루소를 공부했다. 19세에 고향에 돌아가 350명의 농노와 그들의 가족이 살고 있던 부모의 사유지에 대한 재산 권리를 주장하여, 그 후로 방탕한 삶을 살았다.


1852년, 24세에 군에 입대한 그는 첫 소설 [Childhood] (1852)를 발표했고, 이반 투르게네프 (Ivan Turgenev) (1818-1883)의 열렬한 응원과 찬사를 받으면 하루아침에 대 스타작가가 되었다. 1856년, 28세에 군대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 (St. Petersburg)에서 명사의 삶을 살았으나, 곧 그만두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사유지를 관리하며 농노의 자식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1862년, 34세에 18세 소녀 (Sofya Bers)를 만나 결혼했으며, 13명의 자식들을 낳아 키웠다. 1863년에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를 쓰기 시작하여 1869년에 완성했으며, 1877년에는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를 완성했다.


[안나 카레니나](1977)를 집필하던 중에 그에게 정신적 위기가 찾아왔고, 그 후로 [A Confession] (1882), [The Death of Ivan Ilyich] (1886), [The Kreutzerr Sonata] (1889), [Master and Man] (1895) 등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죽을 때까지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했다.






2. 살기 위해 죽어보는 건 어때?


이 세상에는 죽음을 다루는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일까, "인간의 삶 속에 죽음이 있다"라는 명제는 자연스럽고 익숙하다. 하지만 죽음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보통은 삶과 죽음을 두 개의 별개의 것으로 떼어놓고 생각하거나 삶 "후"의 죽음을 삶 "속"의 죽음과 혼동한다. 사는 동안 죽음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거나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는 행위를 삶 속의 죽음이라고 쉽게 간주해 버린다. 마치 죽음이란 나의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톨스토이는 그러한 삶을 죽은 삶이라고 말한다. 그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1866)은 살아가는 것에 집착하고 죽음을 회피하는 삶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 죽음의 냄새가 배어있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죽음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며, 죽음이 있는 삶이 곧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소설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를 죽음 속에 밀어 넣는다.




톨스토이는 1856년 형의 죽음과 1857년 파리에서 단두대 사형 장면을 가까이서 목격한 이후, 죽음이라는 주제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의 작품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1858년에 펴낸, 상류층 여성, 마부, 그리고 나무의 죽음을 다룬 소설 [Three Deaths]가 그 시작이라고 보면 될까.


또 한 번은 그가 [전쟁과 평화]를 완성했던 1866년에 Penza라는 지방에 땅을 사기 위해 떠난 적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던 도중 Arzamas라는 곳에 아주 작고 허름한 방에서 묵게 되었다. 그 방은 사방이 하얀 벽에 붉은 커튼이 드리워진 작은 창문이 하나 있는 정사각형의 아주 작은, 관 같은 방이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죽음을 경험했던 것 같다. 그 경험이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살아있는 채로 죽음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그는 숨을 쉬며 살아있는 상태였지만, 마치 관 속에 누워있는 것처럼 죽은 기분, 즉, 살아있지만 죽은 삶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Penza의 땅을 보러 가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졌을까. 땅의 가격이 그 땅에서 나오는 연수입과 같아야만 매입하겠다던 자신의 굳은 맹세가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


나는 톨스토이의 그때의 경험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밑그림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시 저 관 같은 정사각형 방 안에 누워있는 톨스토이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는 죽어있는가, 살아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있다. 인간은 언제가 죽는다. 우리 모두는 저 관 같은 방(죽음) 속에서 살고 있다. 몸이 이미 그 관(죽음) 속에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우리는 영영 죽지 않을 것처럼, 물욕, 출세, 권력에 눈이 멀어 아등바등 사는, 살아있지만 '죽음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관(죽음) 속에서 죽어가면서 자신이 맡은 자리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한순간 한순간 의미 있게 살다가 죽는 '죽음 속의 삶'을 살 것인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관 속에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가 사는 삶은 죽음 가운데 사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톨스토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법대를 졸업하고 지방 공무원을 거쳐 고등 판사를 지낸 사람으로, 그는 그의 부, 명예, 경력,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는 여자와 결혼하고 남들에게 자랑하기 좋은 근사한 집을 장만하는 등, 사회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열심히 일했고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던 이반 일리치는 어느 날 갑자기 허리 쪽에 통증을 느끼며 (신장 암으로 추정되는) 점점 악화되는 원인 모를 병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게 된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의 장례식에서 이반 일리치의 시체가 누워있는 관을 회피한 채, 각자 장례식 후 벌어질 카드게임과 그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공석과 정부에 요구할 생활 지원금 같은 주제로 "그들의 삶"에 집중하는 그의 동료들과 아내의 모습에서 과연 그가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뒤바뀐 이 순서는 톨스토이가 의도한 것으로,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소설의 처음 부분에 위치하고 그의 서서히 죽어가는 삶 -그러나 죽음 속에서 오히려 삶에 더 가까워지는 삶-을 그 후에 조명함으로써, 그의 삶에 대한 평가를 유보시킨다. 마치 관에 누워있는 시체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와 다시 한번 생의 기회를 맞이한 사람처럼 삶을 살아가는 (실제로는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의 모습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도 그의 삶이 정말 헛된 것이었는지, 그의 죽음은 정말 무의미했던 것인지, 아니면 죽음 속에서 결국 참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인지를 서서히 판단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죽음이라는 관 속에 병들어있지만 살아있는 이반 일리치를 완전히 가둔다. 그저 멀찌감치 서서 죽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반 일리치의 삶 테두리에 아예 관을 짜서 그의 주위를 빙 둘러버리고 죽음 속에 그를 완전하게 매몰시킨다. 그리고 그가 그대로 잠식되어 죽을지, 죽음 속에서 죽어가며 그의 삶을 되돌아볼지를 지켜본다. 암흑 같은 죽음 속에 그를 담근 후 고통으로 처절하게 울부짖는 그를 지켜본다. 마치 따끔한 교훈을 주고 있는 신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온 증상으로 '완벽'하다고 믿었던 이반 일리치의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급기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로 악화된다. 의사를 비롯해 그의 가족들과 친척, 동료들 모두가 그에게 곧 괜찮아질 것이다, 죽지 않을 것이다, 따위의 말을 건네며 위로하지만, 그는 왠지 모두가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 말로만 그러는 것 같아 몹시 괘씸할 뿐이다. 열심히 살아온 그는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어 발악을 해본다.


그런데 만약 살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어떻게 달리 살아야 하는 걸까?


"To live, how?" (p57)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도달했을 때, 그는 그렇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닌가,라는 깨달음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는 "잘못 살았다, 틀렸다, 그러면 안 됐다, 삶과 죽음이 아닌, 거짓과 기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 (p61). 그럼 그는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었을까.




그가 뒤늦은 후회만 하다가 숨이 멎었다면, 그의 죽음은 단순한 처벌적 죽음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저 질문을 시작으로, 그의 육체가 죽어가는 동안 그의 정신은 살아나며 짧지만 유의미한 '삶'을 경험하게 된다. 죽음이란 모두에게 찾아오는 것으로, 막을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의 하인 게라심 (Gerasim)을 통해 알게 되고, 죽기 직전 미처 다 끊어내지 못한 삶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리자 자신이 가족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며, 마지막으로 그는 더 이상 육체적 고통과 죽음도 두렵지 않은 상태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삶 속에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삶'처럼 맞이할 때 비로소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죽음이 있는 삶에서 깨닫는다. 죽음 속 삶이 진짜 삶이라는 것을. 죽음 자체가 끔찍한 것이 아니라, 죽은 삶이 소름 끼치게 끔찍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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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loopie72.wordpress.com/2012/09/25/leo-tolstoy-the-death-of-ivan-ilyich-1886/


모두가 죽음을 회피한 채 그의 고통에 공감하려 하지 않고 그에게 쾌유만을 빌 때, 그의 하인으로 일하는 게라심은 이반 일리치에게 죽음이란 모두에게 찾아 오는 것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그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기꺼이 그의 다리를 들어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고 밤새 주인의 고통을 덜어준다.


"We shall all of us die, so why should I grudge a little trouble" (p49)


이것은 병들어 죽어가는 자신을 향한 사랑, 연민이었다. 자신의 고통과 수치심을 이해해 주고, 자신의 외로움과 슬픔에 공감해주고 있는 게라심으로부터 깊이 감동받고 사랑을 느낀 이반 일리치는 그때까지 힘겹게 장착하고 있던 주인의 허세와 지위를 허물 벗듯 내려놓게 되고, 한결 자유로워진 이반 일리치는 게라심의 동정과 연민의 토닥임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주인과 하인 사이의 수직관계와 경계심은 그렇게 허물어져 내린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이렇게 서로의 숨결과 피부가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진작에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았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하지만, 어쩌면 그는 또 한낱 인간이기에, 마지막까지 그가 살았던 삶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마음처럼 쉽게 버리지 못한다. 자신의 이전 삶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는 작업은 사흘 내내 지속된 그의 괴로운 절규로 절정을 이룬다. 그의 그런 집착은 계속해서 그의 영적 진보와 정신적 회복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흘 밤낮으로 비명을 지르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서 영원히 머무를 것 같던 그는 죽기 두 시간 전, 깨달음을 얻는다. 그 깨달음의 순간은 톨스토이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이런 느낌이다: 기차 칸에 앉아서 자신이 탄 기차가 뒤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기차가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느낌. 그리고 그 순간 기차가 가고 있는 진짜 방향을 알게 되었을 때의 느낌.


"What had happened to him was like the sensation one sometimes experience in a railway carriage when one thinks one is going backward while one is really going forward and suddenly becomes aware of the real direction" (p62).


자신이 가야 하는 올바른 방향을 찾은 순간에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고 눈물을 흘리는 어린 아들의 눈을 본 그는, 죽어가는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저 가여운 가족들을 자유롭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가족들을 살릴 것이고, 자신이 사랑하는 그들을 살게 함으로써 자신 또한 기쁘게 죽게 (그들의 삶 속에 살게) 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사랑이었다. 육체적 죽음과 정신적 삶이 완벽하게 일치되는 순간이자,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이었던 가족들로부터 완전히 분리가 이루어지는 순간, 자신의 몸을 억누르고 조여 매던 삶에 대한 미련과 집착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제야 하나둘씩 그의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제야 그는 외칠 수 있다. 죽음은 이제 끝났다.


"Death is finished,... It is no more!" (p63).


"죽은 삶"을 끝내니 "삶"이 그에게 찾아왔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삶 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톨스토이는 이 짧은 이야기를 통해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인간은 이야기 속 이반 일리치와 같아서 저 질문들의 존재를 모르는 채로,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회피한 채로 살아간다. 톨스토이는 그런 우리들에게 질문해 보라고 권유한다. 질문하라. 그리고 말한다. 죽음 속 "사는 삶"을 살아라.





Mememto Mori (Remember you will die)

2021년 네이버 블로그에 쓴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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