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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얇은 분홍색 에세이 책 한 권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고.

by 오이

나에게 책이란 펴자마자 잠들게 해주는 수면제였다. 책 수면제로 잠든 다음날 아침은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수능 언어영역에서는 열심히 문제를 풀었는데도 5등급을 맞을 정도로 국어, 글, 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랬던 내가 책과 가까워진 계기가 있다.


2019년 8월, 3년간 뜨겁게 사랑했던 남자 친구와 이별을 했다. 그 당시 남자 친구는 길거리 캐스팅을 당할 만큼 연예인 뺨치게 잘생겼었다. 변요한과 원빈 그사이 어딘가의 생김새였으며 키도 크고 운동을 따로 하지 않았는데도 식스팩을 장착하고 다녔다. 그게 문제였다. 다투는 빈도수가 많았는데도 얼굴을 보면 화가 누그러졌다. 1년 하고 6개월을 만났을 때, 나는 취직으로 인해 김해에서 1년간 머무르게 되었고 우리는 장거리 커플이 되었다. 대전과 김해의 거리감만큼 우리의 관계는 미적지근해졌고 첫 직장에서 받는 나의 스트레스가 그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전날까지 행복하게 전화 통화를 하던 우리였는데 다음날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나도 모르는 새 일방적인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홀로 타지에 남겨진 나는 매일같이 울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배신감과 당혹감, 외로움 등 복잡한 감정으로 6개월을 버텼고, 운이 좋게 대전으로 발령을 받아 다시 연고지로 오게 되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머리에 종양이 생긴 그가 먼저 나에게 연락을 했고 다시 만나자고 했다. 아프니 생각나는 게 나밖에 없다는데 나는 그런 핑계를 뿌리칠 만큼 그의 얼굴에 강하지 못했다. 양성종양의 크기가 작아 다행히 병간호는 하지 않았음에도 우리의 재결합 이후 1년 반은 나에게 지옥이었다. 배신감으로 똘똘 뭉친 나의 감정은 그를 볼 때마다 괘씸하다는 생각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고, 언제든지 그가 다시 갑작스럽게 관계를 끝낼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랜 장정 끝에 나는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동시에 그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상상은 물거품이 되었다. 학생 때 만난 남자 친구와 오랜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하는 로망도 이별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누군가를 다시 만나기에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관계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관계로 채울 수 없는 나의 마음속 공허함을 달랠 무언가가 필요했다. 항상 누군가가 나의 옆에 있었는데 그 자리가 비어버린 모든 시간들이 너무 어색했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고민 끝에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새해 목표로 써봤을 법한 '독서'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해보는 책 고르기에 나의 독서 취향을 알 수 없으니 어떤 종이책을 골라 돈을 들여 살지 참 고민이 되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 번을 다 읽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종이 뭉텅이에 이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들이는 것이 아까웠다. 그 돈이면 치킨 한 마리, 로션 한 통, 저렴한 티셔츠 한 장인데 말이다. 그래서 그 당시 한창 유행이던 이북 월정액권에 가입했다. 첫 달은 무료, 다음 달부터 한 달에 6,9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등록되어 있는 이북을 무제한으로 볼 수 있었다. 가입하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책은 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였다.


책 표지에는 분홍색 바탕에 어깨동무를 하고 ‘we love’라고 쓰여있는 티셔츠 하나를 같이 입은 두 명의 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 모습에 레즈비언 책이라고 확신을 하며 책을 폈다. 레즈비언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이런 책도 출간된다는 놀라움에 고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동성애자가 전혀 아닌, 결혼하지 않은 40대 여성 두 명이 동거인으로 같이 사는 이야기였다. 티셔츠에 그려진 ‘we love’ 아래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고양이 4마리를 함께 키우면서 고양이를 사랑한다는 그림이었나 보다. 저자는 그 둘의 가족 형태를 분자식 ‘W2C4’로 나타내었다. 여자 둘 고양이 넷. 둘에게는 이 시대의 사랑의 결실인 ‘결혼’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정말 30평대 아파트에서 집을 같이 구매하여 공유하고 같이 밥을 먹는 동거인 개념의 새로운 가족이었다. 저자가 못하는 것은 요리는 동거인이, 동거인이 못하는 청소는 저자가 담당하는 것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감사하며 행복한 생활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는 것을.


난독증이 있는 걸까 스스로를 의심을 해오던 내가 앉은자리에서 순식간에 책을 다 읽어버렸다. 책이 이렇게 재미있는 것인지 몰랐다. 27년 내 인생에서 놀라운 순간 중에 하나로, 나에게 그리고 책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당시의 ‘이별’이라는 상황이 책을 읽는데 부스터 역할을 해주긴 했다만 그 책이 결혼 가치관에 대해서만 새로운 충격을 준 것은 아니었다. 나는 27년이라는 시간을 연애에만 쏟아부은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혼자만의 깊은 성찰의 시간을 만들어주다니. 모든 걸 잊고 온전히 책 속에 들어가 작가의 친구가 되어 감정을 공유하고 것 같은 착각이 들다니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책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별도, 바로 내 눈앞에 닥친 상황도 책을 보는 순간에는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책에게 위로를 받고 다른 꿈을 꾸어보며 나에게 집중해보는 시간이 생겼다. 이전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생각없이 의지하고, 평범하게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상상을 하며,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남에게 쏟아내기 바빴지만, 이 책을 기점으로 나 혼자 서는 법을 배웠다. 이후로는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시간과 곱씹어 볼 시간이 없었다. 읽을 책과 읽어보고 싶은 책이 산더미라 그런 하찮은 일에 시간을 쓸 수 없었다. 덕분에 불안함도 가시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래서 사람들은 책을 읽는 거구나, 책은 재미있는 것이구나를 것을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처음 이해할 수 있었다. 대단한 정보와 지식이 들어있는 책도 아닌 겨우 분홍색의 얇은 에세이 책 한 권으로 말이다.


현재의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는 사람이다.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 퇴근하자마자 잠들기 전까지 화장실을 가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한다. 출퇴근 시간도 아까워 오디오북을 들으며 운전을 하는 책벌레가 바로 나다. 집에 있는 것은 답답하다고 여겨 신명 나게 돌아다닐 줄만 알던 내가 엉덩이를 한 곳에 몇 시간씩 붙이고 책을 본다.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개설하여 새로운 사람들과 책에 대해 토론하며 더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게 되었고 독서 기록을 남기는 SNS를 개설하여 팔로워도 제법 많아졌다. 종이책 한 권 내 손으로 사본 적 없는 나에게 읽어보라며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주기도 한다. 인생은 알 수 없다. ‘이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 해볼 글쓰기 강의도 듣고 있으니 정말 놀랄 노 자다. 책으로 변하는 내 모습이 좋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내가 스스로 찾은 취미다. 늦바람이 무섭다던데 이런 늦바람이면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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