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원작가의 첫사랑 이야기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예쁜 언니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누구보다 선한 눈웃음으로 어깨너머로 늘어뜨린 생머리를 귀 뒤로 살짝 넘기며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이거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쉬익-하고 추출해주는 검은 머리 찰랑이는 멋진 오빠랑 하하 호호 시시덕거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내심 바랐다. 이전에는 돈가스 레스토랑에서 서빙도 해보고 피자집에서 도우를 휘휘 날려가며 눈 깜짝할 사이에 피자 한 판 뚝딱 만들어냈으니 커피 한 잔 내리는 것쯤이야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주변 카페를 들락거리며 저 일하게 해 주세요, 잘할 수 있어요, 시켜만 주세요-하고 구직을 했다.
집 앞에 조금 큰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내일 당장 일을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마도 조금 예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미소를 흘렸던 것이 진가를 발휘한 건지, 진짜 카페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전달되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인력이 급했던 건지 아무도 모르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아르바이트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순정만화를 뚫고 나온 듯한 오뚝한 코의 남자가 검은 머리 찰랑이며 카운터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종석을 빼다 박은 외모로 이종석 동생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남자의 어깨는 키보드 한판이어야 된다는 말이 사실이구나. 이게 꿈이야 생시야. 나 연예인이랑 일하는 거야? 나 꽁냥꽁냥 하면서 일할 수 있는 거야? 눈 한번 마주치고 전기 찌릿하고. 우리 사귈래요? 이제 아름답고 행복한 연애 하면서 꽃길만 걸읍시다 우리. 하며 잠시 그 남자와 손잡고 결혼하는 상상까지 순식간에 다녀왔다.
“안녕하세요.”
고개는 숙이는 듯 아닌 듯 눈은 남자에게 고정했다. 허리가 10도밖에 숙여지지 않으니 자세가 아주 어정쩡했다. 얼마나 올려다봐야 하는 거야. 키가 몇이지. 천장을 뚫겠다.
“아, 새로 오신다는 알바생. 앞치마 드릴게요. 들어오세요.”
미소를 지은 입꼬리가 동그랗게 말려올라가 반듯한 치열이 드러났다. 눈은 살짝 감기며 양볼에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이 남자 눈웃음은 또 왜 이렇게 예뻐. 웃는 모습이 꼭 갓난아기가 엄마를 보고 함박웃음을 짓는 것 같았다. 건네준 앞치마를 보니 여느 프랜차이즈 카페와 같이 예쁜 앞치마지만 자세히 보면 커피 찌꺼기들이 덕지덕지 붙어도 보이지 않는 갈색 앞치마였다. 몸에 두르기 조금 껄끄러웠지만 잘생긴 이 남자 앞에서 인상을 구길 수 없어 눈웃음을 지으며 네-하고 대충 둘렀다.
“나이가?”
“21살이요.”
그 당시 나는 20살이었다. 20살을 다 보낸 겨울이라 나 곧 21살이야 으앙 하던 때였다. 잘생긴 이 남자 앞에서 말이 헛 나오고 말았다.
“아 누나네요(웃음). 저는 20살.”
아, 아니야. 나도 동갑이에요 고쳐 말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것을 느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 심장은 나와 분리되어 저기 앞에서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음에도 같이 일할 수 있는 건가? 나 앞으로 존잘남이랑 같이 시시덕거리면서 일할 수 있는 건가? 이거 내가 할게, 쉬고 있어. 아니야, 내가 할게. 그럼 이거 마시고 있어. 손끝이 스치고 으아닛!
혼자 핑크빛 상상에 젖어 누가 보면 쟤 무슨 생각해- 이상해보였을 테지만 때마침 안에서 매니저님이 나왔다. 주문받아주시고 설거지 쌓여있으니까 틈틈이 해주시고. 하고는 준태야, 준태야. 여행은 어디로 가는데? 내가 어제는 말이야- 하며 남자 앞에서 알랑거렸다. 잘생겼으면 그럴 수 있지. 그래도 매니저님은 나이가 있어 보이니 안심해도 될 것 같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쌓여있는 설거지 더미 앞에 서서 고무장갑을 들었다.
“이거 제가 할게요. 첫날인데 쉬엄쉬엄하세요.”
하며 남자가 고무장갑을 뺏어 들었다. 저기요, 저 일 하나도 안 했는데요? 이거 혹시 그린라이트예요? 속으로 백만 번 물으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묵묵히 설거지하는데 나는 그냥 옆에 서서 말 걸고 싶은 마음에 입술을 옴짝달싹 발만 동동 굴렀다. 뭘 물어볼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머릿속에서 불이 나도록 이리저리 굴렸다.
그렇게 얻은 것이 근처에 같은 대학교를 다니고 집은 저 멀리 살지만 운동 삼아 이 카페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내 집이 카페 바로 앞이니 자정까지 같이 마감을 하고 집 앞까지 바래다준다고 했다. 나 이거 그린라이트 맞는 것 같아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 알바를 하면서 그리고 같이 가게를 정리하고 집 앞까지 같이 걸어가면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 집 앞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오늘 인수인계해드려서 다음부터 안 나와요. 개강하기 전에 여행 다니려고요.”
만난 지 몇 시간 안됐지만, 상상 속에서 이미 남편이었던 남자였는데 갑자기 핑크빛 세상이 무너졌다. 아니야, 알바 같이하는 줄 알았는데. 우물쭈물하는 사이 남자는 멀어져서 들어가세요-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모르게 조심히 가세요-하고 같이 손을 흔들었고 번호는 끝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다음날 카페에서 연락이 왔다. 보건증을 바로 가져오라고. 검사하러 보건소에 간지 며칠 되지 않아 아직 결과가 안 나왔다고 말씀드리니 그럼 일을 그만 나와도 된다고 통보받았다. 보건증이 없으면 당장에 일을 해서도, 고용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제때 보건증을 가져가지 못해 알바가 잘렸고 그는 아마도 얼마 뒤 여행길에 올랐을 것이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