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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팠다.

배는 채우고 볼 일

by 오이

배가 고팠다. 전날 움직이지 않고 끼니를 다 챙겨 먹으니 배가 불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헛트림을 끅끅해대며 가만히 누워서 책을 보고 있었는데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나의 소화기관은 무심도 하지, 밤새 위액을 얼마나 뿜어댔는지 음식물은 잘 분해되어 몸속 구석구석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느껴지진 않는데 아마 그럴 것이다. 텅 빈 위에는 입이라도 달린 듯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앓는 소리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고 잠을 더 청하려는데 이제는 포효하기 시작했다. 방음도 잘 안되던데 옆방에서 자던 사람도 깨울 것 같은 우렁찬 소리였다.

이박삼일 머물렀던 북스테이 호스텔 조식은 먹을만했다. 산골에 호스텔 건물 한 개 덜렁 있으니 자연 속에서 맞는 아침은 기분이 좋았지만, 끼니를 때우러 시내까지 나가는 일은 귀찮았다. 선택지가 없으니 맛있었다. 무료 조식은 8시부터 9시까지였다. 여름휴가를 쓰고 쉬러 간 것이지만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밥을 꼬박 챙겨 먹었다. 아니, 아침 일찍 출근하던 습관 때문에, 그리고 배가 고파서 눈이 떠졌지만, 이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1층으로 내려가니 모닝빵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고 옆에는 일회용 딸기잼과 마가린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놓여있었다. 태양광선이 레이저처럼 지구 표면을 태우려는 듯 내리쬐는 한여름이었지만 3층에 숙소, 1층에 카페와 식당이 있으니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겨우 이박삼일이었지만 더위가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그냥 시원했고 시원하니 따뜻한 홍차가 마련되어 있었다. 주먹만 한 모닝빵 세 개와 발라먹을 거 몇 개, 그리고 따뜻한 홍차 한잔 챙겨 아침햇살 내려앉는 탁자에 앉았다.


아침에는 식당 이후에는 북카페인 1층 내부에는 한 남녀 커플과 나처럼 혼자 온 여자분이 각각 앉아서 식사 중이었다. 그런데 뱃가죽이 얇아 배가 고프든 소화가 되든 방음이 잘 안 되는 위 덩어리는 다시 포효했다. 양 볼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일회용 딸기잼과 버터를 재빨리 뜯었다. 모닝빵을 반으로 갈라 속에 덕지덕지 발랐다. 모닝빵에는 마가린 버터는 최대한 많이, 반으로 접어도 밖으로 삐져나올 만큼 듬뿍 발라 먹어야 맛있으니 통과의례였다.

한입 가득 물으니 모닝빵의 반쪽이 사라졌다. 사실 한입에 다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혼자 우아하게 식사하고 싶은 나를 보며 참았다. 베어 먹으니 듬뿍 바른 버터가 삐죽 나와, 왜 한입에 안 먹냐며 째려보길래 나머지 반도 얼른 입속 깊이 넣어버렸다. 빵은 적당히 따뜻했고 홍차도 적당히 우려 져 있었다. 입속의 빵에 홍차를 적셔 먹으니 주먹만 한 빵이 위로 순간 이동을 해버렸다. 가져온 빵 세 개를 순식간에 해치워버리고 이제 처음 조식을 푸는 것 마냥 조심스럽게 세 개를 접시에 다시 담았다. 통유리로 들어오는 햇살 한줄기가 찬연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사장님이 홍차에 소화제를 탄 듯하다. 조식을 먹고 두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그새 배가 고팠다. 호스텔에 묵는 마지막 날이라 조식 먹고 체크아웃을 했으니 집에 돌아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를 참이었다. 1시쯤 책 보다가 나가면 되겠거니 했는데 나의 눈치 없는 위가 소리 지르기 전에 호스텔을 빠져나왔다. 사장님이 잘 쉬셨어요? 또 오세요- 하는 말에 위가 대신 대답할까 봐 고개만 까딱하고 급하게 나왔다. 얼른 차에 시동을 걸고 폭풍 후진으로 시골길을 빠져나왔다.


운전하며 틀어놓은 노래 비트에 맞춰 위가 힙하게 랩 했다. 나의 발은 엑셀을 더 밟지 않도록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눈알을 굴리며 휴게소가 어디 있는지 탐색했고 조금 전까지 네비에 떴던 휴게소는 갑자기 없어졌다. 못 보고 지나칠까 봐 엑셀에서 발을 올려놓고 싶지 않았는데 똥 마려운 것처럼 급하긴 급했나 보다. 20분을 달려 고속도로로 들어갈 수 있었고 거기에 20분을 더 달려 휴게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평일 낮이기에 주차 공간은 널널했다. 대충 흰 선 안에 끼워 넣고 신용카드와 차 키만 챙겨서 재빨리 나왔다.


드디어 햇빛이 여름이야 몰랐니?라고 자외선과 적외선을 내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햇빛 아래 선지 몇 초 안되어도 살갗이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태양을 피하며 종종걸음으로 식당으로 직진했다. 고속도로 휴게소라서 그런지 평일 낮이라서 그런지 대부분 아저씨들이 혼자 식사하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식당 테이블 간격이 넓었고 의자도 몇 개 없었다. 만석이었다. 그래도 점심시간의 아저씨들의 밥 먹는 속도를 믿고 메뉴판을 빠르게 훑었다. 뭐 먹지. 따뜻한 국물이 땅기긴 하는데 면은 싫었다. 아침에 빵만 먹어서 밥이 당겼다. 맵 찔이라 너무 매운 건 안 되고 적당히 매콤한 것을 먹고 싶었다. 김치는 싫었지만 돼지김치 짜글이 비빔밥이 제일 맛나 보였고 제일 비쌌다. 그래서 돼지김치 짜글이 비빔밥을 먹기로 했다. 연휴의 마지막 날이니 최대한 호화롭게 마무리 짓기 위해서.


주문하고 뒤를 돌아보니 감사히도 음식을 입안 가득 쓸어 담아 오물거리며 금방금방 일어나시는 아저씨들 사이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앉아서 가방을 내려놓으니 휴게소답게 주문한 음식이 바로 나왔다. MSG 가득할 것 같은 붉은색 국물 속에 지방과 살코기가 반반인 적당히 얇은 돼지고기가 담겨있었다. 야들야들한 고깃덩어리와 함께 김치 덩어리들이 지글거리며 춤추는 돌솥 뚝배기가 나왔다. 통통한 콩나물무침과 김가루가 올라가 있는 흰쌀밥도 함께였다. 검은콩 5알이 성의 없이 반찬 그릇에 담겨있어 순간 욱했지만, 옆에서 숟가락, 젓가락 챙겨가라는 무표정의 직원 말에 두리번거리다 금세 잊어버렸다. 챙겨서 자리로 돌아오니 다시 눈에 들어온 콩 5알에 직원을 쏘아보았지만 돼지김치짜글이가 자글자글거리니 봐주기로 했다.


허기가 가장 맛있는 조미료라고 했던가. 아삭아삭 씹히는 콩나물과 고슬고슬한 흰밥에 빨간 돼지고기와 달짝지근한 양념을 얹어 슥슥 비벼 먹으니 고급 레스토랑 뺨쳤다. 맵기와 짜고 단 정도가 아주 알맞아 입이 쉴 틈 없이 비빔밥 한 숟가락씩 가득 밀어 넣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고봉밥만치 쌓여있던 비빔밥이 바닥을 보였다. 땀이 잘 나지 않는 체질인데도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든든했다.


배속이 실해지니 힘도 나고 기분이 좋았다. 배가 든든하니 렌즈를 닦은 듯 눈앞이 선명해졌다. 깨끗하게 비워낸 빈 식기를 직원에게 갖다 주니 감사하다며 한껏 눈웃음을 지어주셨다. 햇볕은 따뜻한 손길로 나를 어루만져주었다. 다시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1시간은 족히 남았지만,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 어깨를 들썩이며 신나게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차 내부는 다행히도 에어컨의 냉기가 가시지 않아 시원했고 태양은 나 잘했지? 하고 윙크를 하는 것 같았다. 살포시 엑셀에 오른발을 올리고 누구보다 고요하고 매끄럽게 출발했다. 나무랄 곳 없는 여행이었다. 맛있든 맛없든, 저렴하든 비싸든, 집이든 고속도로 위든 배는 채우고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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