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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 Sep 10. 2021

소설'천 개의 파랑'에서의 축산적 오류

'민주'는 과연 볼품없는 말 관리사였을까?

얼마 전 '천 개의 파랑'을 완독 했습니다. 섬세하고 세밀한 인물 심리묘사에 흡인력이 강한 작품으로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유명한 만큼 재미있더군요. 캐릭터들의 입체감, 로봇의 묘사와 심리까지 너무 좋고, 그들의 목표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반전인 완결까지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축산 전공인으로서 보기에 약간 다른 설정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2021년의 말 관련 축산업 현황에 대해 한번 짚어보도록 할까요?


* 말씀드리기에 앞서 '천 개의 파랑'은 소설이라는 점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소설은 허구적인 세계관가 설정되어 스토리가 진행되는 창작품입니다. 더불어 이 책은 미래의 이야기이므로 지금과의 상황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명백하게 이 작품을 비난하고자 글을 쓰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유념하시고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민주'는 과연 볼품없는 말 관리사였을까?

작품 속 '민주'는 경마장의 말 관리사로 등장합니다. 한국에서 경마장 하면 '한국마사회'가 있습니다. 사실, '마사회'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민주는 마사회 직원일 수 있겠죠. 그런데, 작품 속에서 민주는 뭔가 불쌍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민주는 과연 그저 볼품없는 말 관리사였을까요?


한국마사회는 일명 '신의 직장'입니다. 연봉도 센데 복지도 굉장히 좋은 규모가 큰 공사, 공공기관에 속하는 기관이죠. 축산학도들 사이에는 마사회의 통근버스 기사 아저씨 연봉이 1억, 아르바이트생도 월급이 300만 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요, 그럼 마사회 직원들의 연봉을 어떻게 될까요? 제가 '공공기관 알리오'에서 정보를 조금 찾아봤습니다. 

 

신입사원 초임 임금은 기본급 4300만 원 정도, 직원 평균임금은 9000만 원 정도가 됩니다. 여기에 성과급은 기관평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연봉의 비율로 나올 겁니다. 성과급이 천만 원을 넘는 건 금방일 것 같습니다. 공공기관에서 최상위 기관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이밖에도 어린이집 운영, 복지포인트 160만 원, 자녀 학자금 대출, 장학금 지급 등등 혜택도 넘쳐납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철밥통, 준공무원입니다. 


그런데, 이 기관에 입사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경쟁률은 257:1.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근무자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이라고 합니다. 블라인드 채용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과연 진짜 블라인드 채용일까요? 


다시, 민주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민주는 마사회 직원일 것이라고 짐작했을 때 고액 연봉의 직원이었습니다. 볼품없고 비루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었네요.




그렇다면 수의사 '복희'는?

'투데이'를 진료하고 치료하는 수의사 '복희'가 등장합니다. 공공기관에서 말을 관리하는 수의사라면 공무원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무려 시작이 5급인 '5급 수의직 공무원'인 셈이죠. 초봉이 3500만 원 정도 될 것 같네요. 적어 보여도(?) 5급 공무직에 호봉이 알아서 쌓이니 이만한 직업이 없겠죠. 알고 보니, 복희도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말의 몸값 겨우 5000만 원?

'투데이'라는 말은 경마장에서 인정받는 경주마로 몸값이 치솟았다고 해요. 책에서는 5000만 원이라고 나옵니다만, 현재 말의 몸값은 얼마나 될 것 같으세요? 


주로 마사회가 해외에서 수입해오는 경주마는 '35억'정도 한다고 합니다. 이밖에 유전형질이 뛰어난 말의 최고가는 1000억까지 갑니다. 일반 사람들은 돈 벌어서 집도 못 사는데 말 한 마리도 못 사겠군요. 쩝.




말들은 정말 좁은 방에 갇혀 살까?

말 한 마리가 들어갈 만큼의 마방이 교도소의 방처럼 늘어서 있었다. 좌우로 다섯 발자국씩 이동할 수 있는, 사면이 콘크리트로 돈 공간이었다. -책에서


제주도의 마사회는 65만 평이나 되는 초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지만, 마리당 1000평 정도 되는 곳에 풀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경주마들은 사나운 편이라 말들을 같은 울타리 안에 두지 않는다고 해요. 천 평이나 되는 드넓은 초원을 혼자 쓰는 겁니다. 그 안에서 뛰기도 하고 풀도 뜯으며 여유롭게 하루를 보냅니다. 물론, 훈련도 할 테고 마구간에서 밤을 보낼 겁니다. 그래도 한 마리가 들어가서 옴짝 달짝도 못하는 공간의 크기는 아니랍니다. 몸값을 보세요. 비싼 몸값 극진한 대우 해 드려야 이치에 맞으니까요(?)




'투데이'처럼 더 이상 뛰지 못하는 말은 안락사를 할까?

말은 적게는 몇 천, 보통 30억대입니다. 안락사라니요!! 글쎄요. 적어도 도축을 해서 고기로 먹을지언정 안락사로 편하게 보내는 것은 현재로서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은퇴 이후의 말들은 관상용, 교육용, 번식용, 승용, 식용으로 사용된다고 해요. 절반가량은 승용마로 활용이 된다고 합니다. 은퇴 이후에도 몸값이 낮아질 줄 모르는 말들도 있는데요. 그들의 몸이 더 이상 속도를 내기 불충분할 뿐이지, 유전적인 성질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아마도 씨암말, 씨수말로 활용될 것 같네요.


+ 좋은 형질의 말들의 씨받기도 치열한 것 알고 계신가요? 경주마는 자연교배만 취급하고 있습니다. 교배 시즌이 오면 말 교배를 위해 추첨을 합니다. 좋은 말의 자식을 얻어야 비싼 몸값 그리고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으니 너도나도 받고 싶을 거예요. 마사회에서는 무상교배라고 하지만, 교배료를 받는 민간인도 있을 겁니다. 말들이 우승을 거듭할수록 그 종마의 교배료는 천정부지로 높아진다는 뉴스가 보도된 적도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유명한 씨수말의 교배료가 5억이나 호가한다고 해요. 세상에... 5억이 무슨 동네 강아지 이름 같네요.



말에도 등급이 있다고요?

필자의 직업이 축산물등급판정사인만큼 식용으로 사용되는 말에 대해 조금 언급해드리겠습니다.


말은 주로 제주도에서만 도축하고 등급을 판정합니다. 필자는 도축된 말을 본적도, 판정한 적도, 먹어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평가사로서 말을 등급판정한다는 것은 숙지하고 있습니다. (숙지만 하면 안 될 텐데 말을 볼 일이 없을 테니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간단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소와 돼지는 의무 판정 축산물입니다. 등급판정이 없이 반출되면 불법, 등급 없는 고기는 불법이라는 말이죠. 말은 다릅니다. 계란, 닭, 오리처럼 자율등급제예요. '하고 싶으면 신청해서 등급을 받는 시스템'이라는 말입니다. 말 등급제는 2019년 7월부터 시작했어요.  다른 축산물은 법제정기준 소, 돼지(1993년), 닭(2001년), 오리(2013년), 계란(2004년)에 비해 많이 늦은 편입니다.


말의 등급은 육질등급 1,2,3등급으로 나뉘고, 육량등급은 A, B, C등급으로 나뉩니다. 이것을 합쳐서 우리는 1A, 1B, 1C, 2A, 2B, 2C, 3A, 3B, 3C로 부르게 됩니다. 그밖에도 판정이 불가능할 정도의 도체*는 '등외'로 분류됩니다. 

*도체: 도살한 가축의 가죽, 머리, 발목, 내장 따위를 떼어 낸 나머지 몸뚱이


판정을 할 때는 도체의 여러 가지를 보고 판단합니다. 일단, 도체중과 지방이 얼마나 붙어있는지, 등심 면적이 얼마나 되는지로 육량등급을 판정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아시는 '마블링'을 봅니다. 등심 단면에 지방이 얼마나 많이, 고르게 퍼져있는지 조견표를 보고 판정을 하게 됩니다. 이밖에도 육색과 지방색, 고기의 탄력 정도와 질, 생리적 연령을 보고 육질등급을 판정합니다. 


여기서 소비자들은 육량등급 A, B, C등급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마리 도체에서 뼈를 발골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고기가 얼마나 나올지 미리 예측하여 고기를 가공하는 분들을 위한 등급이니까요. 고기를 사 먹을 때는 이미 소분할로 되어있으니 육량등급 필요하지 않겠죠. 1,2,3등급만 보고 원하는 등급을 고르시면 되겠습니다.






말이야기와 휴머노이드의 이야기인 '천 개의 파랑'으로 시작된 축산적 의문이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말 관련 축산업에 조금 더 가까워진 마음이 드셨다면 필자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번외편

+ 번외로, 이건 제가 겪은 일화인데요. 대학교 측에서 취업연계 프로젝트로 축산 관련 업체를 섭외해 견학시켜주는 졸업여행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제주도에 있는 마사회에도 견학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마사회에 도착하자 다른 회사와 다를 바 없이 방문객들을 제일 먼저 홍보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홍보 담당자가 앞에서 ppt를 켜고 마사회 소개 발표를 자신감 뿜 뿜, 아주 멋들어지게 하더군요. 그런데, 교수님은 제주도까지 가는 여정이 피곤하셨던 건지, 발표가 지루했던 건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지만, 졸음을 참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마사회 측 발표자가 갑자기 교수님께 삿대질을 하며 졸지 말라고 지적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냥 보기에도 20대 중후반쯤 되는 것 같았는 말이죠. 정말이지, 문화충격이었습니다. 홍보 pt는 고작 취업과 관련된 마사회 소개였으며, 교수님은 머리를 까맣게 염색했지만 지긋한 50대이셨으며, 그래도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우리나라에서 꽤 인정받는 축산 쪽 교수님이셨는데도 말입니다. 축산학계의 서열을 말한다기보다 그래도 한국은 아직 동방예의지국인걸요. 발표자는 삿대질하면서도 코는 하늘을 찌르는 자세였으며 덕분에 눈을 내리까는 교묘한 모습에 2차 충격을 받았더랍니다. 덕분에 마사회를 가지 말아야 할 합리점을 찾을 수 있었고 저는 이 기관을 못 간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가지 않는 것이 되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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