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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 Apr 25. 2022

눈을 떴는데, 개운할 때

알람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왠지 모르게 너무 개운했다. 창밖으로는 짹짹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상쾌한 바람 한 줄이 내 코를 간질였다. 여느 연예인이 드라마에서 아침을 맞이할 때처럼, 눈을 비비며 하품을 쩍 크게 하고는 양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면서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아니,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게 창밖이 유난히 밝았다. 분명 나는 새벽 6시 50분엔 길을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날은 어스름해야 맞는데,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등골이 오싹하다는 말은 그럴 때 쓰는 거였다. 심장이 놀이동산에 자이로드롭이라는 기구에 탄 것처럼 상공 70m에서 뚝 떨어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서둘러 핸드폰을 찾으니 전원이 나가 있었다. 이거, 진짜 큰일 났다.


시간은 아침 8시. 이미 도축장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도축장에서는 7시 40분부터 돼지를 잡고, 내가 서있는 판정대까지 돼지가 레일을 타고 오는 데까지 20분이 걸린다. 그러니 8시라고 하면 나는 판정대에 서서 판정을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 당시 도축장에는 평가사 3명이 배치되어 근무를 했고, 우리는 야근이 너무 많이 발생해 돌아가면서 유연근무를 쓰고 있었다. 마침 그날은 내가 1차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9시에 출근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 말인즉슨, 나 외에는 아무도 9시까지 출근을 안 할 예정이었다. (유연근무라는 것은 자신의 업무효율 또는 편의에 맞춰 자유롭게 출퇴근하여 일하는 것을 말하지만, 우리 회사는 도축물량에 따라 야근이 많이 발생할 시에는 유연근무로 조정하기도 한다.)


세수는 무슨, 벌떡 일어나 옷만 입고 차키를 챙겨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몇 초도 용납될 수 없었다. 계단으로 와다다다 내려오며 팀장님과 과장님께 전화를 했다. 나 늦잠 잤다고. 그리고 부아앙하고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았다. 도축장까지 국도로 55분, 고속도로로 40분 거리라서 나는 그냥 천천히 국도로 다녔었는데, 그날은 선택지가 없었다. ic가 조금 막혔지만, 급한 마음에 차선을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진입하여 시속 150km로 달렸다. 누군가에겐 '더 밟아도 되지.' 할 수도, 누군가에겐 '고속도로에서 미쳤구나.' 하는 속도였지만, 나는 살면서 그 속도로 처음 달려보았다. 10년이 넘은 르노 자동차였는데, 차체가 다 뜯겨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나는 제트기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차는 힘에 부쳐 덜덜거렸다. 그렇게 30분 만에 도착하고 정신없이 현장에 들어갔다.


이미 돼지 70마리 정도는 지나가고 없었다. 돼지는 사후강직(죽고 딱딱하지는 과정)이 일어나기 전에 영하 40도 정도 되는 급속냉동 터널에 들어가야 품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도축과정 맨 마지막에 등급판정을 받은 뒤 바로 급속 냉동 터널로 들어가게끔 설계되어있다. 지나가버린 돼지 70마리는 이미 영하 40도 냉장고에 있다는 말이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과장님과 팀장님도 차례로 도착했다. 아마 나보다 더 밟으신듯했다. 다들 방금 일어났다 해도 믿을 만큼 눈곱만 떼고 온 형색이었다. 너무너무 죄송했지만, 두 분은 이미 지나간 돼지를 판정하기 위해 냉동 터널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이 얼마나 듬직하던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돼지들은 냉동 터널에서 다음 저장 창고로 가기 위해 길고 긴 '리을'모양의 자동레일을 타고 계속해서 움직였고, 거꾸로 매달린 돼지의 앞다리는 보통 사람의 허리 높이까지 올 정도로 높은 곳에 걸려있었다. 두 분은 그곳에서 돼지들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돼지한테 이리저리 치이고 냉동 바람에 옷자락 휘날리며 판정을 했다. 나는 편안하게 판정대에 서서 천천히 굴러오는 따뜻한 돼지들을 판정했지만, 그들은 히말라야 산꼭대기에서 마구 날아다니는 돼지를 보고 있다 해도 가히 믿을법했다.


"그럴 수 있어. 한 번씩 다 그래."


두 분은 판정이 끝나고 사무실로 올라와 죄송해서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내게 말했다. 새벽부터 오전 내 냉동실에서 소를 판정하고, 그 이후로는 몇 시간씩 도축라인에 서서 돼지를 판정하며 중간중간 사무실에서 사무업무를 본다는 게, 사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죄송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평가사가 한 번씩 지각을 해봤다는 전례가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 회사에서만 허용되는 불가항력적인 지각이었다. 어쩌면, 진짜 평가사가 되었다는 그런 딱지를 뗀 것 같았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오늘 하루쯤은 누군가의 큰 실수를 너그러이 눈감아주는 것은 어떤지 감히 여쭙고 싶어 진다. 그러면, 내일은 더 따뜻한 하루가 시작될 것만 같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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