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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 May 14. 2022

시골에선 처자 구하기 어려우니까!

"아가씨, 그래서 몇 살이고?"

"아, 네. 사장님. 저 25살입니다."

"아 그럼, 옆에 나이 더 있는 처자는 없고?"


등급 문의 전화인 줄 알았더니, 다른 전화였다. 소 키우는 사장님은 맞는데, 다른 용무인듯했다.


"혹시 어떤 거 때문에 그러시죠?"

"아니, 내가 아들이 하나 있는데, 고대 나와서 지금 약국을 하나 차려줬거든."


아들이 40대인데 아직도 장가를 못 갔다며, 정말 괜찮은 남자라며, 아들 자랑을 내일까지 할 기세였다. 그저 웃으며, 좋으시겠어요, 멋진 아들이라니 사장님 로또 되셨네요, 하며 약간은 말동무센터인지 잠시 헷갈렸지만, 유치원 선생님같은 리액션이 마음에 드셨는지 빠른 시일 내에 나랑 소개팅 날짜까지 잡으려고 하셨다. 사장님, 그만! 멋쩍은 웃음소리를 내며 그 전화는 일단락되었다.


우리 회사는 축산물 등급만 평가하는 게 아니다. 이력제 관리도 우리 회사의 주 업무인데, 이력제라는 것은 농장에서 소에게 주민번호와 같은 12자리의 번호를 부여하고 도축과 가공을 거쳐 우리 집 식탁까지 오는 과정을 그 번호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기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역추적하여 원인을 바로 찾을 수 있도록, 또는 소비자들이 원산지나 가공장을 확인하여 안심하게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이다. 즉, 귀표없이 또는 떨어진 상태로 키우는 것, 귀표를 다른 소와 바꾸는 행위 모두 위법이므로 농장에서 판매장까지 이력번호를 꼭 표기하고 잘 관리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절차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축협과 협업하여 농가를 방문하고 신고된 귀표와 소의 개체수를 확인하는 작업한다.


때는 2018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충남 서천시에 축협 과장님 한 분과 농가 몇 군데를 방문하여 DNA 검사용 소 털도 뽑고 귀표도 점검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과장님은 유난히 농가 사람들과 친해 보였다. 과장님의 덜덜거리는 파란 트럭을 타고 흙길을 먼지날리게 달리다보면, 부채질하며 그늘에 앉아 막걸리를 한 잔 시원하게 기울이시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과장님을 불러세웠다. 운전하는 과장님께 대뜸 막걸리를 마시라며 한 사발 따라주셨고 과장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다음에 밥해줄테니 들리라는 할머니의 말씀을 뒤로하며 그렇게 시골을 구비구비 돌았다.


시골은 공기가 좋다며 에어컨이 아닌 창문을 활짝 열어젖혀 달달거리며 달리는 트럭속에서 따뜻한 바람에 내 긴 머리칼이 이리저리 치였다. 따뜻한 바람에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송글송글 맺히는 땀을 닦으며 풀내음을 맡던 중 대뜸 나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당시에 만나는 사람이 없길래 솔직하게 없다고, 이제 큰일났다고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과장님은 갑자기 레이싱 선수가 드리프트 하듯이 차를 돌리더니 시부모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잘못 대답한 것 같았다. 소개팅도 아니고 시부모?


마구 달려 도착한 곳은 시골의 가축병원. 영문도 모른 채 문밖에서부터 큰소리로 내가 왔다며 떵떵거리며 들어가는 과장님을 쫄래쫄래 따라 들어갔다. 가축병원 안에는 수의사 선생님과 선생님의 부인이 나란히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며 티비를 보고 있었다. 과장님은 갑자기 며느리감을 데려왔다며 나를 소개했고 얼떨결에 나는 인사를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이가 없어 멋쩍게 웃었고, 시부모라고 소개된 부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머님은 내 직업(등급 평가사)을 듣더니 공무원이라며 좋아하셨고(준공무원이다), 선생님은 그렇게 말라서 애는 낳겠냐며 볼멘소리를 내셨다. 어머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었고 신나게 나의 의사를 물어보셨다. 그 모습에 차마 내 스타일이 아니다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생김새도 시원시원하고 키도 훤칠하니 아주 남자답다며 듣기 좋은  대답을 해드렸고, 선생님은 시골에서 살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황당한 며느리 면접인가 싶었는데, 도시보다 자연을 좋아하는 나는 '시골 좋다.'고 말씀드렸다. 그 말이 아드님과 갑작스러운 결혼으로 시골에서 살겠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며느리로서 통과되는 대답이었나보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시더니 내 명함을 달라셨다. 설마 진짜 연락 오겠어- 하며 명함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드렸고, 며칠 뒤, 그 아들에게 정말 연락이 왔다. 부모님 말을 잘 듣는 아들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내가 마음에 들었던건지 알 수는 없었다. 착한 분이구나 생각만하고, 정말 만나진 않았다.


나는 그렇게 축산 농가에서 뗄레야뗄 수 없는 회사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다. 등급 한 개 차이로 몇 백만 원씩 차이가 나기때문에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빈번하니, 마냥 예쁨만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열심히 사랑으로 키운 소의 가치를 거침없이 매기다보니 예쁨을 받기보다는 적에 더 가까웠다. 덕분에 5년간 농가와 함께 울고 웃었다. 이제는 시골 농가분들의 안부도 묻고 푸념도 듣고 자제분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30분이 훌쩍 지나있다. 그날 옆집에서 무슨 요리를 했는지 알 지경이다. 우리 엄마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와 이야기하는 착각이 들곤한다. 만담을 주고받으며 얼굴도 모르는 농가분들과 하하호호 떠들 수 있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선자리 해프닝 정도는 그때를 생각하며 하하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었을 뿐이다. 어르신들을 마주할 일이 많기에, 시골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일이 많기에 더욱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나 축협 과장님처럼 이 직업이 천직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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