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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 May 24. 2022

판사님, 어디 가지 마.

"판사님! 어디 다녀왔어! 가버린 줄 알았잖아!"


고작 이틀 작업장을 비웠다. 특별하게 한 건 없고 그냥 집에서 잠만 잤다. 얼마 만에 갖는 휴가였던지, 노곤 노곤하게 평생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은 소망을 다시금 떠올리며 단잠에 빠져있었다. 작업장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울상이었을지 모를 내 얼굴을 보고도 작업장 이모님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계란 작업장에서 근무한 지 1년 즈음됐을 때였다. 닭은 매일 알을 낳기 때문에 작업장이 쉬는 날이 없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상주하며 매일 닭을 관리하고 알을 모으고 깨끗하게 선별하는 등의 작업을 해야 했다. 닭도 조금 머리를 써서 주말엔 알을 낳지 말고 쉬면 좋을 텐데, '닭대가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쉬는 날 없이 열심히 알을 낳았고, 덕분에 나도 이틀 연속 쉴 수가 없었다. 유통기한이 25일밖에 안 되는 계란을 빨리 유통하기 위해서 수요일,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같이 등급을 판정했다.


내가 일했던 곳은 계사(닭장)에서는 100만 수(마리) 정도의 닭들이 살면서 계란을 생산했고, 그 옆에 작업장이 바로 붙어서 그날 낳은 계란을 바로 포장할 수 있도록 했다. 모든 닭들이 100% 알을 낳지는 않아, 하루에 60만 개 정도의 계란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계란 작업장으로 우르르 굴러갔다. 같은 닭장에서 자란 닭들이 똑같은 것을 먹으며 낳아도 계란의 모양은 아주 제각각인데, 색깔은 희여 멀건 한 것부터 시커먼 것까지, 크기는 손가락 한마디만 한 알부터 주먹만 한 알까지 다양한 계란이 작업장으로 굴러왔다. 그 알들은 선별기라는 큰 기계로 줄줄이 들어가 따뜻한 물과 솔로 난각(계란 껍데기)이 세척되고, uv램프로 소독되며, 깨진 계란이 걸러졌다. 크기별(소란, 중란, 대란, 특란, 왕란)로 분류하고 상품다운 계란만 선별하여 팔레트 위에 척척 쌓았다. 그렇게 선별된 계란은 거래처로 바로 납품이 되거나 등급판정을 위해 포장실로 옮겨졌다. 내가 주로 일하는 공간은 "포장실"이었다. 


같은 날짜, 같은 계군(똑같은 날 태어나고 한 곳에서 똑같이 관리받는 닭장의 닭 묶음), 같은 중량으로 묶인 계란은 6명의 한국인 이모님들이 다시 한번 더 깨끗하고 좋은 계란으로 선별해서 소포장을 했다. 주로 60~68g 사이의 특란을 10구에서 30구까지, 마트에서 파는 그 모양의 난좌(계란 상자)에 맞춰 포장했다. 소포장이 완료되면, 축산물등급판정사인 내가 투입되어 등급란으로 반출해도 괜찮은지 외관도 보고 정해진 수량의 계란을 깨 보며 신선도 등의 상품성을 확인했다. 그래서 포장실의 이모들과 자주 마주치며 함께 일을 했다. 이모들은 이미 많게는 14년, 적게는 7년이나 일한 숙련자였다. 대부분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많았고 이미 환갑을 넘긴 이모도 있었다. 어떤 이모는 나보고 본인 아들보다 어리다며, 귀여워해 주었다.  


"판사가 판정하는 거처럼 평가사님은 계란을 판정하니까, 평가사님을 줄여서 판! 사!"


멈추지 않고 굴러가는 계란 중에 계란의 내용물이나 계분이 묻어있는 등 상품성이 없는 계란을 골라내고 어두운 곳에서 깨진 계란을 걸러내면서 시력이 다들 나빴다. 빨간 안경, 검은 안경을 쓰고 싱글벙글 웃으며, 멋대로 나를 판사님이라고 불렀다. 하루 종일 계란만 보고, 한 손으로 계란 박스를 접으며, 순식간에 띠지를 계란 박스에 끼워버리는 이모들은 지루할 틈 없이 노래를 부르고 엉덩이를 실룩이며 춤을 추었다. 


8시간을 내리 서서 일을 하면서도 오전에 15분, 오후에 15분의 쉬는 시간에는 쪼르르 휴게실로 들어가 하하호호 웃음소리로 작업장을 가득 메워버렸다. 업무적으로 볼일이 있어 휴게실에 방문할 때면 빈 입으로 나갈 수 없었다. 시골 이모답게 간식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아두고는 내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빵에 김치까지 속으로 죽죽 찢어 눌러 담아주었다. 무슨 맛인지 음미하기도 전에, 헛헛했던 가슴까지 꾹꾹 채워주었다.


"그 차장님, 있잖아. 안경 쓴. 그분 안돼. 그러니까 판사님 어디 가지 마."


누군지 알 수 없는 차장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디 가지 말라는 말에 마음이 따뜻해져 버렸다. 정말 어디 가기 싫어져 버렸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인사만 나누고 사무적인 이야기만 하며 1년이라는 세월을 지냈지만, 어느 순간 서로 정이 흠뻑 들어버렸다. 하루라도 안 보이면, 서로를 찾는 사이가 되었다. 언젠가 나는 다른 작업장으로 발령이 날 테고, 이모들도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일을 그만둘 시점이 오겠지만, 마음만은 계속해서 서로를 찾고 그리워할 것만 같다. 그렇게 이 작업장이 그리울 것 같다. 그래서 오늘 발걸음이 조금은 더 가벼웠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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