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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Dec 15. 2016

그분의 7시간, 우리는 이제 공부할 시간

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지리산 피아골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 작년에 겪은 첫 번째 겨울의 충격이 생생하다. 춥고 바람이 강한 매서운 기억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 따뜻하고 포근해서 당혹스러웠다. 


나는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의왕시 청계산 자리에서 자랐다. 강원도 산간 지역은 아니어도 눈과 얼음을 보면서 겨울을 보냈다. 지리산 피아골에서 그런 겨울의 경험이 깨졌다.  


피아골은 행정 구역상 전남 구례군 소속이다. 전남은 한반도 남쪽에 있다. 피아골은 지리산에서 남쪽 방면에 있다. 북쪽(경기도)에서 나고 자란 내게 이 남도, 그중에서도 볕이 잘 드는 지리산 남쪽의 겨울은 따뜻하기만 하다. 


서울에 눈이 오면 피아골에선 비가 내리는 경우가 잦다. 밤 사이 눈이 내려도 해가 쨍한 오전 11시면 다 녹는다. 피아골에 사는 아이들은 겨울이면 계곡에서 썰매 탈 거란 생각, 착각이다. 계곡물은 거의 얼지 않는다. 작년 볕 좋은 겨울 어느 날, 외투도 입지 않고 마당에서 한가하게 마늘을 깐 적도 있다. 그만큼 포근하다.


피아골에서 지내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면 화들짝 놀란다. 용산에 도착한 기차에서 내리면 확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와 바람. 이런 ‘동토의 땅’에 이토록 많은 사람은 산다는 게 놀랍다. 서울의 지인들은 내게 자주 말한다. 


"지리산에 있으면 엄청 춥죠? 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하게 지내세요."


누가 누구의 추위를 걱정하는 건가. 지리산 피아골은 따뜻하다고, 바람도 많이 불지 않는다고 말하면 상대방은 놀란다. 같은 한반도, 그중에서도 분단 국가 좁은 남쪽의 사람들끼리도 이러니 그 옛날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을 본 유럽 백인들은 어땠을까. 


사실 아메리카 대륙까지 갈 필요도 없다. 피아골에 사는 나를 크게 놀라게 한 건 “구례에서도 와이파이 터지냐?”는 서울 친구의 물음이 아니다. 같은 구례군 주민, 읍내 사람의 질문에 나는 충격에 빠졌다.


"피아골에 살아요? 아이고, 진짜 촌구석에 사네요! 치킨은 배달됩니까?"


인구 3만 명도 안 되는 구례군, 차로 30분이면 행정구역의 양쪽 끝을 밟을 수 있는 시골, “읍내에 롯데리아 생겼어!"라는 소식이 뉴스인 곳에서도 이렇게 서로를 딴 세상 사람 취급한다. 모든 존재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인간은 오해와 착각의 동물이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거대한 집단도 착각에 빠지고, 동시대의 수많은 사람도 같은 오해를 하기도 한다. 가령 "아버지가 경제를 살렸으니, 그분의 딸도 이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킬 것이다"라는 생각은 어떤가. 백 번 양보해 '경제발전 부녀 계승론'을 믿으면서, "아버지가 독재를 했으니 그 분의 딸도 독재를 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왜 안 하는 것일까?


최고경영자 출신 인물이 한 사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면 모든 국민이 부자가 될 것이란 착각은 또 어떤가. 상식선에서 따져도 이 착각은 안타깝다. 최고경영자와 일부 간부만 부자고 사원은 당장 다음 달 월급만 끊겨도 생활이 곤란해지는 게 대개의 회사 모습이다. 


"그분께서 나라를 잘 이끌 것"이라 기대했던 사람들은, 그 기대가 오해이자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 분의 직무를 정지시켜 버렸다. 아무 권한이 없는 외부인이 절차를 어기고 나라 일에 참견한 결과는 아닐 거다. 오랜 세월 불평등, 불만, 불의에 대한 분노가 쌓인 결과일 거다. 


그분은 "나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당신들 갑자기 왜 이래. 나 이런 줄 몰랐어?"라고 억울해 할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최고 권력 자리에 앉히고, 또 끌어내리기도 하는 게 민주주의다. 환호했다가 돌아서고, 돌아섰다가 다시 열광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착각, 오해에 빠지고 변덕을 부린다. 서로의 부족함을 알기에 사람은 민주주의 제도를 만들었다. 


수십 년 전 다른 세상을 꿈 꾼 사람들이 맨몸으로 숨어 들어간 지리산 자락에서, 촛불 하나 들고 거리로 나선 사람들이 최고 권력자의 직무를 정지시킨 풍경은 경이롭다.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내 부모 세대의 많은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 세상이 망할 거라 생각했단다. 저 북쪽에서 '빨갱이'가 내려오고 모두가 곧 길거리에 나앉을 거란 걱정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분의 자식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이 되고, 또 갑자기 직무가 정지됐지만, 이 세상은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지리산처럼 별 변함이 없다. 


이 사회는 어떻게 유지되고, 움직이고, 발전하는가. 시민의 힘이 어떻게 최고 권력자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가. 어쩌면 지금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지 싶다. 


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방송이 책으로 나왔다. 책 제목도 참 식상한 그 이름 (후마니타스)다. 다행히(?) 책은 두껍지 않고 내용도 어렵지 않다. '시국이 시국인만큼 한 번 볼까?' 하면서 펼쳤다가 두 시간 만에 다 읽어버렸다. 


책은 다큐프라임 방송을 보는 것처럼 만들어졌다. 이미지와 도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궁금한 건 세계적인 석학들이 직접 설명하는 방식이다.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생각한 건, 지금의 이 탄핵정국은 ‘경제적 불평등’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책에서 여러 석학들은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가 경제 발전을 이루고, 평등하고 부패가 없는 사회일수록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이 없다는 걸 역사적 사실과 여러 통계로 설명한다. 책을 읽다보면 "부자들 세금을 깎아줘야 경제가 좋아진다"거나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게 된다. 


민주주의는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하면 여러 사람이 골고루 나눠가질 수 있을까 하는 아주 현실적 물음에서 출발했다. 책에서 저자가 하는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민주주의는 선거의 문제로 축소되었습니다. 빈곤의 악순환이 다시 도래한 지금, 자원 배분에 대한 시민의 권력의지가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다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식상한 민주주의가 작동되기에 '넘버 원'도 날리고, 그가 없어도 세상이 유지된다. "자원 배분에 대한 시민의 권력의지"를 다시 한 번 불태울 때다. 지금은 민주주의 공부가 필요한 시간이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그분의 7시간, 우리는 이제 공부할 시간]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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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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