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의 사랑을 아름다운 서사로 만들고 싶어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작은 실수에서조차 기적을 발견해 내는 비상한 능력을 발휘한다. 각기 다른 좌석에 앉아 있었던 남자와 여자가 영문도 모른 채 출발 5분 전의 암스테르담 행 비행기에서 내려, 느닷없이 공항 수비대의 몸수색을 받기 위해 나란히 서 있다면, 우리는 누구라도 우연의 신이 이들을 엮으려 한다는 걸 예감한다.
사람들이 가득한 전시 오프닝에서 평소 잘 신지 않은 높은 하이힐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해 넘어졌는데, 하필 가장 민망한 그곳이 뜯어져 난감해 하는 여자 앞을 가방 안에 여자들을 위해 언제나 얇은 스웨터를 가지고 다니는 남자가 우연히 지나갔다면, 그는 뜯어진 그녀의 바지에 그 스웨터를 기꺼이 둘러주며 그 여자를 영원히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 여자는 아빠와 함께 찍은 어린 시절의 피크닉 사진을 보다가, 우연히 사진 속 자신의 건너편에 지금의 남편이 모래장난을 하며 놀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도 있다. 함께 심은 장미가 막 피어나기 시작한 봄의 뒷마당에서 다섯 살 딸에게 목마를 태워주며 웃고 있는 저 남자와 자신이 이미 다섯 살에 만났었다는 우연 때문에 갑자기 목이 메는 것이다.
사랑에서 가장 믿을 만한 것은 '우연'이다.
우연만큼 사랑을 빛나게 하는 건 없다. 사랑의 마법인 ‘우연’이란 신의 선물을 온갖 복잡한 종류의 서류들로 증명하고, 이민국에 입증해야 하는 일은 그러므로 그것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성을 훼손한다. 만약 그 사랑이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열정이라면, 편지로 말해질 리 없는 욕망이라면, 일기장에조차 기록할 수 없는 괴로움이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고 증명할 수 있을까.
그의 영주권 심사 날을 기억한다.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서류 뭉치들이 차례로 꽂힌 철제로 만든 책장. 미국 국기가 꽂혀 있는 벽이 보였다. 이민국 직원은 '갭 베이비'에서 산 아동복을 무리하게 껴입은 것 같은 느낌의 뚱뚱한 라틴계 여자였다. 그녀는 먼저 내 이름을 물었다. 살면서 내 풀 네임을 누군가에게 또박또박 말하기 위해 이처럼 노력한 적은 없었다. 이민국 직원의 이름은 제시였다.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를 만났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와 사랑에 빠졌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와 미래를 설계했는지 변호사의 조언대로 진술했다. 내가 하는 말은 오차 없는 수학공식 같았다.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바로 그 순서대로 나는 내가 가진 사랑의 서사를 조직하고 설계했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플롯에서 이탈하는 순간, 의심이 싹트고, 추궁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야기에도 자연스런 흐름이란 게 있었다. 가령 계절이나 날짜, 장소, 이름 같은 것들은 정확한 팩트에 기반해야 했다. 하지만 공식을 외운 것처럼 너무 전형적인 이야기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나는 우리가 함께 입양한 3개월 된 유기견 이야기를 꺼냈다. 마침 유기된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던 심사관은 내 이야기에 쉽게 반응했다. 그녀의 얼굴이 한껏 부드러워져 있었다. 미군이었던 남편 때문에 한국에 몇 년간 머무른 적이 있었던 그녀는 아파트 복도를 돌며 세탁물을 픽업하는 한국의 세탁 서비스가 정말 환상적이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자신에게 한국은 '세탁! 세탁! 세탁!' 하는 그 낭랑한 목소리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운영했던 플러싱 유일의 24시간 세탁소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 얘길 하진 않았다.
"고양이 이름이 1월 1일이에요.”
"일월일일?”
"처음 입양했던 날짜가 이름이거든요."
그녀가 빙긋 웃었다.
"기막힌 우연이에요."
그녀가 귀를 쫑긋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설마! 그날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도?"
"우리가 처음 만나기 31일 전이에요."
그녀가 유달리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큰 소리로 웃었다. 제시는 내게 악수를 청하더니 "결혼을 축하해요"라고 말했다. 한 시간이 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밖으로 나와 시계를 보니 단지 십 분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 성주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나는 그를 말없이 안아 주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애인의 애인에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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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