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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Feb 03. 2016

성희롱 '생존자'에서 변호사로… 이은의의 신고식

[기사 수정 : 11일 오전 10시 20분]


“왜 내가 아는 저 많은 사람은 사랑의 과거를 잊는 걸까/ 좋았었던 일도 많았을 텐데 감추려 하는 이유는 뭘까/ 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어 내 경험에 대해/ 내가 사랑을 했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 언제까지나”


이은의 변호사의 애창곡이라는 주주클럽의 ‘나는 나’를 오랜만에 다시 들었다. 왜 그녀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책과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이은의라는 사람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저 노래 가사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삼성맨’이 된 그녀에게 부서장의 성희롱과 커밍아웃은 분명 불행한 ‘사고’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사고가 아닌 ‘사건’이 되길 바랐다. 사고는 상처를 남길 뿐이지만 사건은 나름의 재미와 교훈을 남기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이 인생의 공백이 아니라 경험과 능력이 되기를, 이를 통해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한 그 다음 무대로 나아가기를 원했던 그녀는 서른여덟에 로스쿨 진학을 결정했고, 꼬박 4년 동안 대기업 삼성을 상대로 홀로 싸운 과정을 기록한 <삼성을 살다>를 펴냈다. 

그녀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사무실을 열고, 자신처럼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을 비롯해 청춘을 억압당하는 젊은이들을 상담하고 사건을 맡으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펴낸 <예민해도 괜찮아>는 ‘파란만장 이대리’에서 ‘좌충우돌 이변호사’로 돌아온 이은의의 신고식이라 할 수 있다.



Q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이력을 발견했다. 재직 시절 2년간 휴직하고 방송작가 과정을 수료했더라. 왜 작가가 되지 않고 변호사가 됐나?

한국 사회에서는 글만 쓰면 배고프다.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현실적인 고민을 안 할 수 없었다. 막상 모든 걸 걸고 작가로서 다시 시작하기에는 나이라든가, 부모님도 돌봐야 하고 나 자신도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걸렸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동안 겪었던 일이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 되길 바랐다는 점이다. 예상했든 예상하지 못했든 일어나는 안 좋은 일이 사고라면 사건은 기억에 계속 남을 만한 유의미한 에피소드다. 변호사는 아팠던 상처를 이력 삼아 그걸 기반으로 다른 싹을 틔울 수 있다. 서른여덟에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했을 때, 크게 망설임 없이 로스쿨을 결정했다.

Q 그럼 작가의 꿈은 버린 건가?

아직 버리지 않았다. 좀비 영화를 찍어서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려고 매년 5백만 원씩 적금을 붓고 있다.(웃음) 이렇게 책도 두 권이나 내지 않았나.

Q “책을 낸다는 것은 여자가 옷을 벗고 대로를 활보하는 것과 같다”면서도 책을 쓰는 이유는? 

기록 본능이 있다. 책이든 뭐든 쓰고 싶어 하는 기질이 있다. <삼성을 살다>도 한 시절을 정리해 기록으로 남긴다는 용도로 쓴 것이다. 그런데 마치 선견지명이 있어 ‘날 찾으세요’ 하기 위해 쓴 것처럼 이 책을 보고 연락해오는 클라이언트가 상당히 많다. 어떻게 보면 이번 책 <예민해도 괜찮아>는 내가 변호사가 됐으니까 쓸 기회가 생긴 거다. 이제 당사자는 아니지만 한때 당사자였던 변호사이기 때문에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고, 나도 현재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대기업과 4년 동안 벌인 싸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Q 책 제목이 ‘예민해도 괜찮아’인데 본인은 예민한 성격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더라. 

난 예민하지 않다. 어딜 봐서? 오히려 둔감해서 문제다. ‘예민해도 괜찮아’는 나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너무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이라 상대방에게 미칠 파장을 예민하게 살피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당혹스럽다. 상사가 만질 때도 1년씩이나 참은 게 아니다. 처음엔 잘 몰랐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거다. ‘왜 그러지? 싫은데?’ 이렇게 6개월이 지나서야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더니 남자 직원들에게는 안 그러더라. 선배들에게 이야기했더니 ‘네가 너무 예민하다고 할 것 같다’며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해서 또 참았다. 그래서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Q 사실 ‘예민하다’는 말은 사전을 찾아봐도 좋은 의미인데 언제부터인가 ‘피곤하다’, ‘불편하다’ 같은 부정적인 단어와 동일시되는 듯하다.

한국 사회가 ‘예민’과 ‘과민’을 구분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리고 ’예민하다’는 말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는 잘 하지 않는 말이다. 보통 갑이 을에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한다. 예민하다는 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식인데, 마치 이런 반응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갑이 가진 억압의 기제를 을에게 적용해 말하지 못하게 하는 거다. 예민한 건 문제가 아니다. 예민과 과민에 대한 담론이 있었으면 좋겠다.

Q 진입장벽이 점점 높아지는 사회에서 자꾸만 타협과 순응을 요구받는 청춘들에게 “예민해도 괜찮아”라는 저자의 말은 자칫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다.

책 한 권으로 용기를 내기 어렵다. 예민해도 멀쩡히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알게 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만약에 정 문제가 돼서 한번쯤 얘기하고 싶다면 이 책이 “나 여기 있어”라고 저 멀리서 반짝반짝 불빛을 비춰주는 등대 같은 존재가 되면 더 좋겠다.

“성폭력 피해나 성차별을 겪고 나서 이를 신고하거나 문제제기를 한 후에도 무사히(?)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피해자들을 여성계에서는 ‘생존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생존자가 되기 위해 커밍아웃하고 법적 다툼을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인지, 또 생존자가 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생존자가 되는가보다 살아남은 그 자신이 정말로 행복한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생존자라 불렀지만 나는 그저 조금 더 행복해졌을 뿐이다. 나를 무엇으로 부르든 좋았다.” - <예민해도 괜찮아>

Q 성희롱 소송은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가.

그 싸움을 선택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당시는 무척 힘들고 외로웠지만, 돌아보면 참 좋은 기억이다. 회사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그 어떤 행위보다 좋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 아니면 걷지 못했을 길, 받지 못했을 기회들, 못 만났을 사람들,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때론 인생의 큰 파도도 나쁘지 않다.

Q 결과적으로 그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바다에 놀러가는 걸 참 좋아한다. 튜브로 파도 타며 놀 때 물을 먹을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재미있으니까 하지 않나. 또 타다 보면 점점 자신이 파도를 조정할 줄도 알게 된다. 싸움에서 꼭 이기지 않아도 된다. 나를 위한 싸움이라면 그 자체가 큰 족적이 된다.

주주클럽의 ‘나는 나’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가사 중에 “왜 내가 아는 저 많은 사람들은 사랑의 과거를 잊는 걸까”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전 남자친구들에게 받은 반지나 선물들을 그대로 갖고 있다. 사진도 안 버린다. 왜 버리나? 떠나간 사랑을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 나의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두 살이 다 있지 않나. 아침 점심 저녁과 그날의 햇살, 그날의 무엇, 이런 게 다 담겨 있는 그때의 나를 보고 있는 거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은 거다. “그 싸움 이겨야 하나요? 그 사랑 이뤄져야 하나요?” 사랑이 완성될 거라 생각해서 하는 게 아니지 않나. 때론 이 사람을 선택해서 내가 어떤 상처를 입고 애를 먹겠다는 걸 다 알면서도 사랑하지 않나. 그것처럼 인생에서 어떤 일들이 청년들에게 닥칠 때 꼭 이겨야 하고, 이 판에서 모든 승부를 다 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승부가 끝나도 죽지 않거든. 하지만 그 싸움을 해보는 건 중요하다.



"한국사회 여성혐오 현상, 남자들이 불행해서 그렇다"

Q 요즘은 데이트 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실제로 수임 건수도 많은가.

굉장히 많다. 지금도 소송을 몇 개 진행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데이트 폭력’은 없다. 그냥 폭력이다. 데이트 폭력을 근절하는 방법은 발생 초기에 그 관계를 차단하거나 신고 절차를 밟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 행위를 ‘데이트+폭력’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폭력’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폭력에 앞서 데이트하는 관계를 먼저 생각하면 주객이 전도돼 폭력에 대한 대처를 고민하기보다 가해자의 입장을 먼저 고민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많은 여성들이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내가 잘못해서 그러는 거야’라든지,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라고 착각하며 계속 끌려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Q 요즘은 ‘여혐’(여성혐오) 문제도 아주 심각한 것 같다. 

‘빠순이’, ‘김여사’로 시작해 ‘된장녀’, ‘김치녀’, ‘개똥녀’, ‘오크녀’ 등 온갖 신조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근본 원인을 들여다보면 남자들이 불행해서 그렇다. 자기가 행복하면 남을 비난하지 않는다. 자기 삶이 불안하고 불행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혐오의 화살을 돌리는 거다. 이건 여성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약자에 대한 혐오고, 그걸 하는 사람도 약자다. 여혐이 내 불안한 상태에 대해 어딘가를 향해 던지는 절규라고 볼 때, 귀결은 한국 사회 청년이 불행하다는 거다. 그래서 청년들을 힐난하고 싶지 않다. 여혐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Q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사무실을 개업한 것은 용기인가? 무모인가?(웃음)

용기일 수도 있고 좀 무모한 걸 수도 있고. 크게 용기를 내서 한 게 아니니, 무모한 건가?(웃음). 본질적으로는 ‘잘 될 거야’, ‘설마 안 되겠어?’ 거기서 출발하는 거 같다. 근거는 딱히 없다. 지나온 삶 안에서 크게 큰일 나지 않았던 하루하루의 삶, 그 선택들이 해롭게 작용하기보다 하루하루 봐도 별일 없었다는 안도감, 이런 것들이 그 무모함을 만든 것 같다. 긍정적 마인드도 구조가 선순환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해결이 된다는 마인드를 가져야 방법을 찾을 수 있고, 방법을 찾아야 문제가 해결된다.

로펌에 있다 하더라도 변호사는 어차피 프리랜서다. 경력이 10년이라고 1년차보다 잘하라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초창기가 더 패기 있다. 법조에서 이력이 매우 필요한 거라면 초임 판사를 두지 않을 거다. 왜 신입부터 뽑는지 생각해보면 다 이유가 있다. 보통 개업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력을 쌓기보다 수임의 문제가 더 크다. 그런데 막상 나와서 개업해보면 수임이 된다. 나 같은 경우 여성가족부 성폭력피해자 무료법률지원사업 지정변호사로도 활동하고 있고 강의나 자문 같은 활동을 통해 수입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에 수임 스트레스는 없다.

Q 변호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변호사의 역할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이 많다. 피해를 입증하려면 사실관계와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의뢰인은 변호사에게 사실을 정확히 말해야 하고, 증거를 모아 와야 한다. 그런데 변호사가 입증 증거를 발굴해주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거다. 가령 모텔 앞까지 끌려가서 성추행 당했다고 치자. 신빙성 있는 진술도 증거가 되긴 하지만 CCTV나 항의문자, 간접증거가 되는 녹취라도 있어야 한다. 의뢰인이 ‘변호사가 CCTV 확보해주지 않을까’ 하는데 당사자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데 달라고 하면 주겠나. 증거와 사실들을 가지고 판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법의 언어로 치환해서 소명하고, 부족한 것을 요청하는 게 변호사의 일이다. 

그리고 성폭행을 당했을 때 즉각적으로 증거를 보존하는 게 중요하다. 많이 알아야 한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에도 다 아는 이야기하지 말고,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구체적인 대처 방법이라든가, 피해자를 위해 목격자나 주변인으로서 견지해야 할 태도, 회사의 다짐 같은 실질적인 정보가 있었으면 좋겠다.

Q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확률보다는 목격자나 주변인이 될 확률이 높다.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할까. 

이런 일이 불거질 때면 목격한 사실의 부당함이나 피해자의 입장보다는, 증언을 하거나 피해자 편에 섬으로써 자신이 불리해지고 불편해질 일을 고민하게 될 거다. 언뜻 보면 세상이 바뀌는 건 용감한 피해자들 덕인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내가 몸담은 환경과 세상을 조금씩 좋게 바꿔나가는 것은 피해자의 용기나 가해자의 반성이 아니라 수많은 제3자의 선택이다. 그들이 유리함보다 유익함을 선택하고 피해자를 지지할 때 세상은 좀 더 나아진다. 

이 책을 쓸 때도 단지 피해자나 가해자의 문제, 여성문제로만 받아들여지지 말고 약자와 강자가 싸울 때 당사자가 아닌 주변부의 시선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컸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나 을의 입장에서 “너 힘들겠다”라고 공감해주고 가해자에게는 “저 사람이 힘들어하는데, 하지 말지?”라고 말해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취재 : 이미회(북DB객원기자)/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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