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터파크 북DB Feb 04. 2016

미술관의 시인 신현림 "고흐 만난다면 프러포즈부터…"



카페에 앉아 있던 그녀의 얼굴은 또렷이 빛났다. 짧은 머리에는 생기가 흘러넘쳤고 목소리에서는 특유의 씩씩함이 묻어났다. 들떠 보인다고 해야 할까, 신나 보인다고 해야 할까. 다분히 유쾌한 느낌이 들었다. 눈 앞에 놓인 작은 것 하나에도 감탄을 빠뜨리지 않았고, 무엇이든 대답을 해줄 수 있다는 표정이었으니까. 그녀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책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를 펼쳐보며, 이제껏 살아오면서 겪은, 혹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겪을 이야기를 그렇게 하나둘씩 꺼내놓았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신현림 시인이 원래는 미술학도였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녀가 미술에 관련된 책을 내면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괜스레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현림 시인은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소녀였다. 학창시절에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실제로 디자인과에 진학했지만 훗날에는 국문학과에 입학해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시인이 됐다. 물론 그녀의 마음에는 늘 미술을 열렬히 사모하는 애틋한 마음이 있었다. 그것을 그리움 혹은 동경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을까. 

"미술관을 통해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20대에는 하루 2시간밖에 못 잘 정도로 불면증이 심하게 찾아왔어요. 밤에 잠을 못 자니까 낮에는 멍해져서 두통도 심했고요. 너무 힘들더라고요. 정말 죽을 맛이었죠. 그래서 매일 시를 읽고 그림을 봤어요. 방에는 물론 화장실에도 그림을 붙여놓고 살았으니까요. 이 책에 실린 그림과 시는 저의 힘든 시절과 젊은 날을 버티게 해준 것들이에요."

신현림 시인에게 있어 시와 그림은 지독한 성장통을 견디게 해준 일종의 마취제였다. 그녀가 그림이 걸려 있는 곳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 찾아다니고 닥치는 대로 시를 써나간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에 새롭게 펴낸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에는 신현림 시인이 아껴온 시와 그림이 수록돼 있다.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 고흐, 모네 등 유럽의 화가는 물론 이중섭, 박수근 등 한국 화가의 그림까지 시대와 국경을 넘나드는 작품들이 담겨 있다. 김소월, 한용운, 윤동주 등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들부터 시작해 최지인, 안미옥, 최현우 등 신인들의 작품까지 두루 만나볼 수 있다.



"그림과 시는 내 힘든 시절과 젊은 날을 버티게 해준 것들"

"보통 시와 미술을 떨어뜨려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요즘 융합의 중요성을 많이 얘기하는데, 이게 사실 르네상스 이전부터 존재한 것이거든요. 왜 우리나라에도 오래된 그림들을 보면 옆에 항상 시가 쓰여 있잖아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고 봐요. 그런데 요즘 우리는 매일 돈, 돈, 돈 하고 살잖아요. 특히 ‘먹방’ 얘기들 많이 하는데, 이제 너무 지겹지 않나요? 어떻게 매일 먹고 자는 얘기만 할 수 있겠어요. 저는 그런 것들을 잠시 풀어둘 수 있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밥 한 끼만 있어도 절로 감사하게 되거든요."

신현림 시인은 20대를 거쳐오며 예술을 보는 안목을 키웠고 시적 상상력을 길렀다. 그래서일까. 어떤 질문을 던져도 작가와 그림에 대한 정보가 주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참에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봤다. 그녀가 꼽은 사람은 바로 빈센트 반 고흐. 신현림 시인은 고흐를 만나면 프러포즈부터 하겠다고 했다. 옆에서 챙겨주는 여자가 있었다면 그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 거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녀는 ‘같이 미칠 수도 있지 않겠냐’며 웃으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필자는 이번 책 가운데 폴 세잔의 ’소년’과 김명인 시인의 ’아들에게’, 이브 탕기의 ’엄마, 아빠가 다쳤어요’와 고형렬 시인의 ’꽃의 통곡을 듣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이문재 시인의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의 조합이 좋았다. 이들의 절묘한 조합은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감동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약간의 아쉬움도 있었다. 작가나 그림에 대한 소개 부분이 다소 기계적이고 건조하게 느껴진 점이 그렇다. 시인의 입을 빌려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부분이 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의 독창적인 감상평이나 개인적인 경험이 더 담겨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녀는 지천명의 나이를 넘겼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까닭을 깨닫고 하늘의 섭리를 느낄 수 있는 나이다. 안 되는 일에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쓸데없는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홀로 딸을 키우면서 이래저래 지칠 법도 한데 여전히 창작의 즐거움에 빠져 있다. ‘좋아해서 하다 보니 지금까지 왔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직관을 키우고 더욱 명민해지기 위해 여전히 시를 쓰고 그림을 본다. 여전히 동네에 있는 단골 서점을 찾아 도스토옙스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카잔차키스 등의 책을 읽는다. 조만간 딸과 유럽으로 미술관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정치인, 책 좀 읽었으면... 국민 헤아리는 마음 너무 부족"

"인생을 가치 있게 살고자 하는 분들,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 책을 봐줬으면 좋겠어요."

신현림 시인이 생각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진실함이다. 예술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진실함은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우리의 삶을 더욱 삶답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런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꽃 한 송이를 사더라도, 책상 하나를 구입하더라도 제대로 고를 수 있지 않겠어요? 카프카는 책이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라고 했는데, 저는 예술도 그런 존재라고 봐요. 인간은 어차피 죽으면 사라지는 존재잖아요. 예술을 통해 치열하게 고뇌하면서 더욱 가치 있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더불어 신현림 시인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근 벌어진 일본과의 ‘위안부’ 문제 합의만 해도 그렇다. 당장 소녀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늘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고 깨어 있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동안의 정치를 보면서 너무 실망을 한 탓에 기대도 안 하는 입장이지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정치하시는 분들이 책을 좀 읽었으면 좋겠어요. 최근의 정치를 보면 국민들을 헤아리는 마음이 너무 부족한 것 같아요. 이제 국력은 칼이나 총이 아닌 지식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더욱이 앞으로는 예술이 국가를 먹여살리는 최고의 자원이 될 거고요.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때라고 하지만 책을 통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르바이트로 젊음을 탕진하지 말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 게 먼저인 것 같고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다른 사람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고 주변과 나누는 마음이 생기거든요. 저라고 어디 쉬웠겠어요?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도 이렇게 웃으며 살 수 있는 건 책을 통해 인생을 축제로 만드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아마 책이 없었다면 벌써부터 안 살았을 거예요. 이번에 새롭게 발표한 시 제목도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인걸요.(웃음)" 


신현림 시인은 녹록지 않은 이 세상에 시와 그림을 무기로 돌진해왔다. 누군가는 맨땅에 헤딩을 한다며 비웃음을 보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저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매일, 그리고 하루를 위해 그것들을 더욱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 속에서 아름다움과 지혜와 나눔의 의미를 깨달았음은 물론이다. 신현림 시인은 여전히 바쁘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며 시를 쓰고 그림을 보면서 사람도 만나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많다. 용기와 희망이라는 단어는 지금의 신현림 시인과 참 잘 어울리는 말이다.  

취재 : 윤효정(북DB객원기자)/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기사 더 보기>>

매거진의 이전글 성희롱 '생존자'에서 변호사로… 이은의의 신고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