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
<꼬마 눈사람 스탄>(하위도 판 헤네흐텐/ 현북스/ 2011년)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모차르트나 베토벤, 바흐보다 아름다운 음악적 재능을 갖고 태어났으나 한 번도 발휘 해본 적 없이 무덤에 묻힌 사람이 부지기수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괴테나 셰익스피어, 톨스토이보다 훌륭한 문학적 재능을 가진 사람도 많았을 것 같고, 미켈란젤로나 피카소, 고흐보다 뛰어난 미술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 소크라테스나 공자, 헤겔, 데카르트보다 탁월한 사유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죽었다. 왜?
한 번도 악기를 연주해본 적 없어서, 제대로 된 그림 같은 걸 본 적이 없어서, 문맹이었거나 강대국의 언어를 쓸 줄 몰라서, 생존하기에도 벅차서, 혹은 지독하게 운이 없거나 권력자의 미움을 샀거나.
천재는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서도 절로 재능을 드러내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나는 단언컨대 천재는 환경이 길러낸다는 쪽이다. 역사에 남은 천재들은 최소한의 조건이라도 충족된 환경에서 자랐고 운이 따랐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산간오지의 무지렁이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피아노라는 것은 구경해본 적도 없고 일곱 살 때부터 소년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면 그래도 위대한 작곡가가 됐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는 자신에게 인류 유산으로 일컬어질 음악적 재능이 있는지 짐작도 못한 채 일생을 촌부로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중국에 '장수선무 다전선고(長袖善舞 多錢善賈,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한다)' 라는 속담이 다 있겠는가.
왜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느냐면 의외로 많은 사람이 적성을 모르는 채 살아간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몰라서 가장 무난한 방법을 택하는데 공부해서 대학가고, 공부해서 취업하는 것이다. 적성 같은 건 사치스러운 말이고 일단 대학가고 취업하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남들이 들어 다 알만한 데면 금상첨화다. 그 어렵다는 취업에 성공하고 나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 된 것 같아 벅차고 신이 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민에 빠진다. 아! 적성에 안 맞는 거 같아. 지상 최대의 고민과 갈등이 시작된다. 내 적성이 뭐지? 이 일을 그만둬, 말아?
어떻게 그 나이 되도록 자기 적성이 뭔지도 모를 수 있냐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만 원인이 과연 당사자에게만 있을까.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꼬마 눈사람 스탄> 을 소개하고 싶다. 그림동화라 기분 전환에도 좋다.
작은 숯은 두 눈이 되고 당근은 코가 됐다. 기다란 목도리를 두르고 헐렁한 모자를 쓴 채 손에는 포크를 들고 있는 꼬마 눈사람 스탄. 태어난 지 몇 주가 흘렀지만 오랫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왜냐고? 그게 눈사람의 할 일이었으니까. 눈사람은 움직이면 안 된다고 다른 눈사람들이 그랬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작은 새가 당근 코에 날아와 앉더니 스탄이 지금까지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을 했다.
"네 힘으로 한번 움직여봐. 너도 얼마든지 마음대로…."
그제야 처음으로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왜 눈사람은 움직이면 안 되는 거예요?"
눈사람 병정이 답했다.
"눈사람은 누구든지 꼼짝 말고 서있어야 해. 그게 원칙이고 그건 절대 바뀌지 않아!"
곁에 있던 긴 모자 눈사람이 이제 곧 익숙해질 거라고 위로하지만 스탄은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리 지른다. "난 움직이고 싶어. 난 움직일 거야!" 눈사람 병정과 긴 모자 눈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고, 움직이면 녹는다고 안타까워했지만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다.
스탄이 마음껏 달리고 뛰어오르고 춤을 추고 깡충깡충 뛴다.
미끄러져서 넘어지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나 달리고 또 달린다.
스탄이 달빛 아래서 한바탕 신나게 웃는다. 눈 속에 버려진 자전거를 타고 멀리 멀리 달려서 아름다운 벌판에 이른다. 하얀 벌판 위에 사람들이 즐겁게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지금까지 눈사람은 움직이면 안 된다고 움직이면 녹는다고 배웠다. 그런데 이곳의 눈사람들은 모두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스탄이 묻는다.
"녹는 게 무섭지 않나요?"
나이가 아주 많고 넓고 큰 세상을 두루 다녀 지혜로운 앨프레드 할아버지가 알려준다.
"들어보렴, 스탄. 눈사람은 보통 가만히 서 있잖니? 그건 눈사람이 전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얼어붙은 거야. 익숙한 곳에만 있으려고 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거지. 어떤 눈사람은 살짝만 움직여도 녹는다고 생각하기도 해!"
움직이면 녹는다는 다른 눈사람들의 말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움직인 적 없었지만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였고, 그 덕에 마음대로 움직여도 녹지 않는 세상으로 갈 수 있었다. 스탄은 관성적이지 않았다.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 그 상태로 운동하려고 하고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고 한다. 뉴턴이 제시한 관성의 법칙을 처음 배웠을 때 한참 헛갈려 했던 기억이 난다. 운동하는 물체가 계속 그 상태로 운동하려면 외부에서 계속 힘이 작용해야 하고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운동하는 물체는 정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시작된 중세의 과학관이고 갈릴레이와 뉴턴은 정지상태와 운동상태가 역학적으로 똑같다고 주장하면서 근대 과학의 문을 열었다. 어려운 물리학 용어지만 관성은 일상에서도 곧잘 사용된다. 정지한 물체가 계속 정지 하려고 하거나 지금까지 움직였던 대로 똑같이 움직이려고 하는 것. 이런 상태를 관성적이라고 표현한다.
"자유의 반대는 보통 구속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관성이다."
사진작가 이시우가 <민통선 평화기행>(창비) 에 쓴 글이다. 이어지는 글을 계속 읽어본다.
"사람들은 자신이 구속됐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하지만 관성은 그렇지 않다. 그게 관성의 무서운 힘이다. 또 사람들이 구속이 외부에서 오는 데 비해 관성은 내부에서 생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관성도 구속처럼 외부에서 오곤 한다. 물건을 사는 손조차도 광고에 반응하는 손이다. 외부에서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 생기는 것이라는 판단, 여기에 관성의 실체가 있다."
지금까지 움직였던 대로 계속 똑같이 움직이려고 하는 것뿐 아니라 정지했던 대로 계속 정지하려는 것에도 힘이 작용한다.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 습관적으로 하는 선택, 판단, 결정, 행동…. 이러한 것들의 요인이 실상 외부에 있다는 지적은 내면을 살피는 이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둘러싼 환경 조건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한 후에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정, 학교, 회사.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는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관성 탓이었다. 내가 관성대로 움직인다고는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그거 말고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겠냐고 되묻기만 했다. 하지만 앨프레드 할아버지가 들려준다.
"전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얼어붙은 거야. 익숙한 곳에만 있으려고 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거지."
움직여봐야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해봐야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맞는 일을 찾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고 이것저것 해보는 시간은 낭비, 방황, 능력부족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시간이다. 무엇보다 그러한 시간을 거치지 못한 채 세상에 나가면 연기를 해야 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모습, 직장에 잘 맞는 모습, 애인(배우자)에 맞는 모습, 사회에 맞는 모습…. 그 모습을 자기라 착각하고 주장하면서, 자기가 녹을까봐 두려워하면서.
※ 본 연재는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유선경/ 샘터/ 2016년)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전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얼어붙은 거야]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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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유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