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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Feb 28. 2017

98세 철학자 김형석 “황금기는 60세부터 75세까지"



“요즘 뭘로 소일하세요?”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흔히 하는 이런 안부 인사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1920년 생으로 올해 98세인 그는 오늘도 ‘열일’ 중이기 때문이다. 철학자이자 수필가로서 몇십 년째 변함없이 강의하고 글 쓰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요즘은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여름 출간한 <백년을 살아보니>(덴스토리/ 2016년)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그를 찾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2월 14일 김형석 교수를 만나 인터뷰했는데, 그 주에만 일주일에 6일 강의가 잡혀 있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여러 통의 ‘섭외’ 전화를 받으며 수첩을 확인했다. “올 봄에는 강의가 더 많을 것 같다”는 그에게 “이 정도면 연예인 스케줄인데 매니저가 한 명쯤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건넸다. 김형석 교수는 인자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바쁜 강의 스케줄 외에도 그는 두 권의 책을 쓰고 있다. 2015년 <예수>, 2016년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 이어 올해 또 하나의 기독교 관련 책을 출간할 계획이다. 내년에는 연재 중인 계간 <철학과 현실>에 실린 글을 모아 철학 관련 서적도 낼 것이다.


98세에 타인의 도움 없이 건강하게 산다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사회적인 존경을 받으며 젊었을 때와 다름없이 정열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삶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부러워하기 전에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특전은 정신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점이다.

 
“무조건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도 행복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의 고마움과 존경을 받으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부도 안 하고 일을 안 하면 그 특전을 못 누리죠. 바야흐로 100세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앞날을 내다볼 때 적어도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그렇게 살도록 인생을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요즘 방송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다들 공감합니다. 더 연장할 수 있었는데, 너무 일찍 인생을 끝냈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60은 돼야 성숙했다 할 수 있어... 인생의 황금기는 60세부터 75세까지”


김형석 교수는 1960~70년대 <고독이라는 병> <영원과 사랑의 대화> 등의 수필집을 통해 전후 빈곤과 사회적 혼란으로 고통받던 젊은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준 우리나라 1세대 수필가이다. 당시 그의 수필을 읽은 젊은 독자들은 세월이 흘러 이제 장년층과 노년층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과제에 당면했다. <백년을 살아보니>는 예나 지금이나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김형석 교수가 100년을 살아보며 얻은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책이다.


“나 자신도 100세까지 스스로도 행복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장년기와 노년기를 맞고 보내며 인생과 사회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더 늦기 전에 스스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과제들을 정리해본 것이에요. 이론적인 설명이나 문제제기보다는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지혜롭게 판단하고 처리하는 삶의 지혜를 추구해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책을 쓰게 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니 오래 산 것이 헛되지는 않은 것 같아 위로가 됩니다.”


김형석 교수는 “백 년을 살아보니 정신적인 성장과 인간적 성숙은 한계가 없더라”고 말한다. 노력만 한다면 75세까지는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 또한 60세 이전까지는 모든 면에서 미숙했다고 고백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 일찍 성장을 포기하는 ‘젊은 늙은이’들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아무리 40대라고 해도 공부하지 않고 일을 포기하면 기계가 녹슬 듯이 노쇠하고, 60대가 되어서도 진지하게 공부하며 일하는 사람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성실한 노력과 도전을 포기하면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된다고 엄중히 경고한다.

 
“공자님도 말씀하셨듯이, 60은 돼야 철들었다고 할까요, 성숙했다고 할 수 있어요.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나이가 이때쯤인 것 같아요. 제가 살아보니까 인생의 황금기는 60세부터 75세까지예요. 저뿐만 아니라 저와 철학계 3총사로 불렸던 안병욱 선생, 김태길 선생도 모두가 동의했던 부분이에요. 75세가 되니까 더 이상 성장은 못하대요. 그 이후는 ‘가지고 있는 것을 얼마나 더 연장하느냐’인데 85세까지는 되더라는 거죠. 그래서 저는 85세까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연장할 수 있는 삶이 가장 보람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젊은 독자들은 노교수의 말이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형석 교수는 교육계에 오래 있으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대학에 들어온 20대들에게 50대에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주지 못한 것이다.

 
“50대에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20대부터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그 생각을 하지 못하면 남을 따라가기에 급급하기 때문에 결국 인생을 낭비하게 돼요. 또한 50대가 되어서는 80쯤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를 꼭 생각해야 해요. 정치가들이 몰락하는 것은 당장 눈앞만 보고 80세 때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20대에는 50대를, 50대에는 80을 바라보고 살면 인생을 보람 있고 값지게 살 수 있어요.


저 또한 50대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다만 자신을 인생을 몇 살까지 끌고 갈 것인가 자문했을 때 80대까진 끌고 가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80이 넘으면 쉬겠다 했죠. 그래서 1년을 쉬어봤어요. 그런데 쉬는 게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시작해 지금까지 그 선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죠.”




“50대 이상 어른들이 책을 읽으면 우리나라도 문화 선진국 될 수 있다”


1920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김형석 교수는 일본 조치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 년간 후학을 길렀다. ‘대한민국 철학계 1세대 교육자’로서 우리나라 철학계의 거두로 평가받고 있다.


“요새 김형석 교수 하면 ‘국민 철학자’래요.(웃음) 난 몰랐는데 주변에서 그래요. 제가 쓴 <철학입문>이라는 책 때문에 그렇게 됐어요. 문장이 쉬워서 대학생들이 철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을 거예요.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서울대 철학과 교수들이 시험 문제를 내면 자기네가 강의한 내용이 아닌데 다 비슷한 내용의 답안지가 들어오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어디서 따왔냐고 물으니 ‘선생님 강의가 어려워 연세대 김형석 교수님 것을 따왔습니다’라고 하더래요. 그 정도로 많이 읽혔어요.”


그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교수가 되기 전 7년 동안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한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1961년 수필로는 전무후무하게 한 해 60만 부가 넘게 팔리는 초(超)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영원과 사랑의 대화>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다. 학문과 교육 사이에서 갈등하다 학문을 택한 김형석 교수는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는 학생들을 버리고 온 것이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떼어놓고 다른 곳으로 출가한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해 좋은 글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해서 쓴 것이 바로 그 책이었다.


철학자이자 수필가 또 기독교인으로서 수십 권의 저서를 집필한 김형석 교수의 책 사랑은 각별하다. 연세대를 정년퇴직하고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 초대 회장을 지내며 독서운동에 매진했다. 세계 여러 나라를 직접 가본 결과,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세계를 문화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나라는 ‘독서’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나라 50대 이상의 어른들이 다 책을 읽게 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독서교육을 하면 우리나라도 문화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서를 강조한다.

  
“제일 중요한 게,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는 교과서 외에 독서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줘야 해요. 이건 내가 체험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중학교 때 신사참배 때문에 한 해 동안 학교를 못 다녔어요. 대신 평양시립도서관에 다니면서 책을 읽었어요. 1년 후 학교로 돌아갔는데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 전부 제가 읽었던 책의 일부분이란 말이죠. 교과서 지식이라는 게 별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스스로 엄청나게 성장한 걸 느꼈어요. 아마 그 시간이 없었다면 철학을 공부하는 일도 없었을 거고, 문학에 대한 사랑도 깨닫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우리나라 독서교육의 방향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가령 1985년에 쓴 자신의 글이 교과서에 수록이 됐는데, 가끔씩 텔레비전에서 강사들이 분석하는 걸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단다. 교육을 통해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자꾸 남이 쓴 글을 분석만 하면 정작 그 자신은 절대로 좋은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국 사람도 노벨문학상을 받을 거라고 기대하잖아요. 고은 시인 이야기도 나오고. 얼마 전엔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화제가 되기도 했고요. 저도 그 책을 읽어보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문장은 좋은데 사상이 없어요. 세계 문학은 사상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한 번 읽어서 다 이해가 가면 좋은 책이 아니에요.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하는 책이 좋은 책이에요. 이런 책을 많이 읽어야 해요.”




“박근혜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 나라 걱정하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


김형석 교수는 백 년을 살아보니 보람 있는 삶을 위해서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사랑해서 어떻게 노력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그 대상이 각자 다르겠지만,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만큼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져야 할 덕목으로 꼽았다. 그는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고 선진국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것은 나라를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 줄어들어서라고 이유를 들었다. 그는 국가 단위 의식 구조에서 제일 먼저 실패한 사람들로 정치가들을 들었다.

 
“가만히 보면 실질적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정치 지도자가 됐는가 하면 아니거든요. 이들은 국가보다 정권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에요. 정권보다 국가를 먼저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후퇴할 수밖에 없어요. 박근혜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도 법적으로 탄핵을 모면하려고만 하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애국심이 있다면 벌써 잘못했다고, 시정하겠다고 했을 거예요. 지금 하는 것을 보면 정권욕은 있는데 애국심은 없다, 우리는 그렇게 보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을 겪고, 북한을 탈출해 실향민으로 살아온 그에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각별한 존재다. 한평생 대한민국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그는 백 세가 가까워오는 나이에도 나라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가 지금도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면 자신도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요즘 젊은이들에게 나라는 감사하고 사랑해야 할 존재이기보다는 문제점투성이의 환멸의 대상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나라와 국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노교수의 조언은 공허한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산 위를 걸을 때 햇빛이 비치는 쪽을 보는 사람은 밝은 걸 보고, 반대쪽에 있는 사람은 어두운 면을 봐요. 역사를 길게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한 과정이에요. 세월호나 탄핵 문제 같은 것도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지혜롭게 극복하면 역사의 발전 속도가 단축돼요. 사람이 암만 힘들고 어려워도 내가 사랑하는 무엇이 있으면 힘들지 않거든요. 보통 인생을 고해와 같다고 하는데, 사랑을 못해서 그래요. 사랑이 있는 고생은 행복이에요. 내 나이가 돼서 느끼는 건, 제일 행복한 때가 언제였는가 하면 큰 고생을 하더라도 사랑이 있었던 때였어요.”


김형석 교수는 마지막으로 나라가 어지러워 불행한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나라를 사랑하세요. 사랑하면 불행하지 않아요. 젊은 여러분은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백 년 동안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희망을 가지세요. 제가 평생 믿고 있는 말이 있어요. ‘악마는 우리를 유혹하고 신은 우리에게 시련을 준다’는 서양 속담인데요. 사랑하기 때문에, 시련은 있어도 인생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에요.”




취재 : 이미회(북DB 객원기자) /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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