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터뷰-문제는 정치다③]
'문제는 정치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정치학자 3인의 목소리
① 최장집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3.9)
②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3.15)
③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3.20)
※ 북DB는 ‘문제는 정치다!’라는 주제 아래 정치학자 연속 인터뷰를 준비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상징되는 부패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기대감이 높아진 요즘. 정치학자들의 식견을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미래를 고민해 보고자 한다.
정치학자 손호철의 저자 약력은 조금 독특하다. 주로 저서와 연구업적이 들어갈 자리에 거리와 감옥에서 보낸 지난한 투쟁의 기록이 함께 있다. 1952년 생인 그 역시 파란만장 현대사를 누구보다 아프고 소란스럽게 건너온 까닭이다. 그가 쓴 <현대 한국정치>(이매진/ 2011년)는 해방 이후부터 이명박 정부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 정치를 다룬 책이다. 추상적인 차원의 분류와 역동적 현실을 씨실과 날실 삼아 촘촘히 묘사했다. 최근 발간한 따끈한 책인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서강대학교출판부/ 2017년)에서는 촛불 혁명 이후를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 떠올려야 할 역사적 정치적 쟁점을 다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흥분과 여운이 남아 있던 3월 14일 오후. 서울 서강대학교 다산관에 있는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큰 키에 학교 점퍼를 입은 손호철 교수가 반갑게 인사했다. 자신을 “소수파의 소수파의 소수파쯤 된다”고 소개하는 그에게서 고집 센 ‘반골’의 느낌도 들었지만, 광장 어디선가 함께 촛불을 들었을 ‘옆집 아저씨’의 느낌도 풍겼다.
“촛불은 위대하지만 영원하진 않아…정치적 주체화 중요”
Q 학교에서 또한 노동 현장에서 운동에 적극 투신했던 정치학자로서 이번 촛불집회에 대한 감동이 남달랐을 것 같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가 생각난다. 나는 당시 중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던 중이었는데 한 진보 언론으로부터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한 글을 써달란 청탁을 받았다. 미국 페미니스트 운동가 엠마 골드만의 “내가 춤출 수 없으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촛불집회가 근엄주의를 깨고, 단상권력을 없앴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그럼에도 촛불 세력이 정치적 주체화가 안 되면 일회적이라 생각했다.
촛불집회는 2002년 효순이‧미선이 미군 장갑차 사고 때,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때도 있었다. 2004년 촛불집회가 있고나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사상 최대의 득표 차로 이겼다. 당시 최장집 선생은 “촛불 드는 것보다 투표 한 번 잘 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까지 했다. 이런 내 생각과 촛불집회에 대한 극찬한 다른 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실제로 2009년 용산 참사를 위해 열린 집회에선 매우 적은 인원만이 촛불을 들었다. 그리고 2년 뒤엔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에서 이겼다. 촛불은 위대하지만 영원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때보다 우리의 촛불은 진화했고, 청소년들까지 집회에 나올 정도로 발전했다. 촛불은 위대하지만 영원할 수 없다. 결국 일상으로 돌아가 잊혀질 수 있으니 정치적 주체화가 굉장히 중요하다. ‘환호와 환멸의 싸이클’이란 표현처럼 자칫 잘못하다 국민들은 다시 절망하게 될 수도 있다.
Q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책의 뒤편엔 ‘11월 시민혁명 일지’라는 제목의 연표를 실었다. 2014년 11월 정윤회 관련 ‘십상시’ 문건 보도에서 부터 헌법재판소 탄핵 인용에 이르기까지 험난하고 숨가쁜 여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번 일련의 사건이 가리키는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나는 항상 ’정치는 공기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해왔다. 공기가 아무리 더러워도 숨을 쉬는 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밖에 없듯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게 정치다.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결국 정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치를 피해선 안 된다는 것을 이번 기회가 가장 잘 웅변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Q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에서 “현재의 광장을 일종의 ’제헌의회‘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썼다. ’촛불의 정치적 주체화‘가 어떻게 가능할 거라고 보는가?
촛불집회에 대해 세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퇴진 운동이 말 그대로 ’박근혜 퇴진‘을 위한 것이기에 퇴진 후엔 바로 해산한다는 최소주의적 접근이다. 그런데 촛불집회 때 6개의 적폐 청산을 내걸었다. 그것은 박근혜의 물리적인 퇴진이 아니라 박근혜로 상징되는 반민주적인 정책의 퇴진을 의미한다.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을 다 뒤엎고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식의 최대주의적인 태도도 있을 텐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는 최적(optimal)노선을 위해 우리 시대의 시대적 과제와 대중의 정서를 조화하는 해법이 필요하다고 본다. 적폐 청산을 위해 촛불 발언에서 나온 새로운 공화국에 대한 생각들을 모아야 한다.
Q 요새 뜨거운 감자인 ’개헌‘으로도 연결이 된다.
최순실 게이트에 제왕적 대통령제나 불완전한 민주화의 문제가 깔려 있던 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개헌을 하기엔 시간도 없고, 개헌 연대를 하면 결국 반문연대(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가 되어 버린다. 지금은 적폐 청산과 개혁을 해야 할 시점이지 개헌 타이밍은 아니다. 그렇다고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측의 말처럼 개헌은 대선 끝난 후 천천히 이야기 하자고 하면 촛불은 다 꺼지고 결국 다시 과거처럼 정치인끼리의 밀실협상에 의해 개헌이 이뤄질 공산이 크다.
지금은 개헌보다는 ’새로운 공화국상‘을 만들 때라고 본다. 촛불을 든 다양한 세대,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에 대한 의견들을 수렴해야 한다. 이것을 개헌의 토대 삼아 정치권에 압박해야 한다. (시민들이) 그냥 광장에서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제2, 제3의 박근혜가 나올 것이다. 촛불의 정신을 살릴 수 있는 큰 그림은 만들어줘야 한다. 제7공화국 보다는 진정한 의미의 제2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
“개헌 타이밍 아냐…결국 반문연대 돼버릴 것”
Q ’경향신문‘ 3월 12일자 대담에서는 ’촛불혁명‘이 오히려 한국 대의민주주의의 실패를 보여준다고도 말했다. 고장난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을 수리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외국에서 교수들이 한국에 오면 광화문 세월호 텐트촌,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보고 ‘사회운동이 잘 되어 있는 게 부럽다’고 말할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오히려 이런 것들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거리의 정치가 활성화 된 건 제도정치가 제 기능을 못해서다. 정치란 제도적 틀 내에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것인데, 그 기능을 못하니 그 갈등들이 전부 다 거리로 나오는 거다. 여당이 제대로 하고, 야당도 제대로 견제했다면 이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직접 민주주의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국민 소환제 대상을 확대하고, 주민발안제를 해서 국민들이 직접 정책도 발안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선거할 때 투표용지가 30~40장씩 된다.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로에서 했던 참여예산제를 우리도 도입해야 한다. 이로써 국민들이 직접 거리로 나오지 않아도 국회가 시민사회나 시민의 다양한 이해를 대변하게 해야 한다.
Q ‘결선투표제’를 시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소수자 대통령이 안 생기지 않도록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독일과 같이 연동제식 비례대표제를 해야 한다. 헌법재판소도 2014년에 인구수 편차 3:1의 현행 선거구 획정이 국민 평등권을 침해하기에 현행 선거제도는 고쳐야 한다는 불합치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현 제도 아래선 수도권에서 1표 행사하면 지방 사람이 4표 행사하는 것과 같다.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것과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건 4:1이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정의당이 6.7% 얻었는데도 6석이다. 녹색당같이 환경문제에 관심 갖는 정당도 1%밖에 표를 못 얻는 게 현실이다. 다양한 이해가 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대의 민주주의는 질이 나쁜 대의 민주주의다. 직접 민주주의를 강화해서 국민의 목소리를 정치에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
Q <촛불혁명>에서 표층에 있는 것은 박근혜 게이트이지만, 심층에는 헬조선, 흙수저 세습제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박근혜가 왜 대통령에 당선됐을까?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민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97년 대선에선 가난할수록 김대중을 찍었다. 한국판 계급 투표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이 지난 후에 2007년 대선에선 가난할수록 이명박을 찍었다. ‘강북우파’가 생겨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에 양극화가 심화됐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좌파 정권이라 성장을 못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보다 성장률은 높았다. 사실 진짜 실패한 건 분배였고, 그 결과가 ‘헬조선’이다.
이번 촛불혁명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한 건 정유라라고 생각한다. 입시라는 게 워낙 예민한데다가 “돈 많은 부모 만나는 것도 실력이야”라는 한마디에 모든 청소년들과 헬조선의 흙수저들이 분노해 일어난 거다. 결국 밑바닥엔 헬조선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깔려 있었다. 나비효과와 같은 탈 근대적 과학과, 역사적 우연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스’에서는 이번 최순실 게이트를 ‘강아지 게이트(puppy gate)’라고 했다. 최순실과 고영태 간에 강아지를 둘러싼 분쟁이 없었다면 탄핵도 없었을 것이다. 우연한 사건이 엄청난 연쇄효과를 일으켜 여기까지 온 것이다.
Q 촛불로 표현된 대중이 차기 지도자에게 기대하는 바는 무엇일까?
광화문 집회에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포스트잇에 적어 붙이는 공간이 있었다. 한 고등학생이 남긴 쪽지의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남보다 더 일찍 새벽에 나가고 남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는 부모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나는 이 속에 대중의 욕망이 들어있다고 본다.
이번 대선에서 정권 교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현 대선주자들 사이에선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자기반성이 전혀 없다. 문재인 캠프 공동선대위원장 전윤철은 ‘정치권 경제민주화는 포퓰리즘’이란 얘길 하고, 문재인은 경제단체 연구소장을 만나서 밥을 먹는다. 이대로는 ‘헬조선 3기’가 되고 만다. 지금은 최순실 사태로 박정희 신화가 잠시 죽었지만 이대로 가면 박정희 신화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제2, 제3의 박근혜 아니면 한국판 트럼프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거대 민주주의 넘어 일상의 민주주의도 중요”
Q 책에서 ‘젠더민주주의’도 언급했다. 이 대목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지난 2월 16일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제7차 포럼’에서 한 페미니스트 선언이 떠올랐다. 이 자리에서 문 전 대표는 차별금지법 반대에 관해 질문하는 활동가에게 “나중에 발언 기회를 드리겠다”라고 답해서 비판을 받았다.
젠더 문제는 같은 연대의 원칙에서 처리해야 한다. 여성이 먼저고 동성애자는 나중이라는 건 옳지 않다. 87년 이후의 민주화를 돌아볼 때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문제의식이 촛불 속에서 같이 살아있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헌법 관련해 권력구조나 대통령제와 같은 거대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만 얘기가 됐지만 나는 기본권이 핵심적 문제라고 본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본권을 자유권과 평등이라는 거대 민주주의적 측면에서만 생각했다. 소수자 인권이나 생태 관련 자연권을 포함하는 일상성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런 면에서 촛불 시위에 나왔던 10대 소녀의 이야기가 정치학자보다 더 뛰어나다고 본다. ‘최순실 때문에 민주주의가 주목된 것은 옳지만 박근혜의 퇴진만이 민주주의의 실현이라 이야기하는 게 슬프다. 나에게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가 있다’고 말하며 우리 안의 박근혜, 우리 옆의 최순실은 어떻게 할 거냐는 문제제기를 했다. 하다못해 이번 촛불집회에서도 여성비하적 언사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촛불에 의미는 있지만 소수자의 목소리를 억압한 측면이 많다.
Q 야권 연합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많다. 야권 연합은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보나?
어떤 방식으로든 정권 교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야권 연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개헌 연대라는 이름 하에 전선이 달라져선 안 된다. 더불어민주당을 제외한 친박에서부터 국민의당까지 세력이 다 합쳐서 싸우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히 야권이 분열해 집권 못하게 되는 문제가 아니다. 촛불의 정신을 같이 했던 야권이 함께 이끌어가야 한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따로 갈 정도로 이념적으로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권력투쟁으로 누가 주도권을 갖느냐의 싸움인 것이다. 정의당이나 여타 진보정당까지 함께 하는 쪽으로 친노와 호남이 연대해야 한국정치가 발전할 수 있다.
Q 정치학자 기획 인터뷰의 마지막 차례다. 앞에 진행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강원택 서울대 교수에게 지난 30년간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를 내려달라고 질문했을 때 후한 점수를 줬다. <현대 한국정치> 등의 저서에선 한국현대사,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대한민국은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나라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어떤지를 따져봐야 한다. 국가마다 통계를 분석해 봤더니 한국과 대만이 경제와 민주화 두 가지를 이룬 나라였다. 하지만 우리는 긍정적인 한 측면만 본다. 세계에서 가장 노동시간이 길고 산재율이 높은 건 왜 이야기 안 하나? 이룬 업적과 그 뒤에 숨겨진 어둠을 균형 있게 봐야 한다. 학자는 의사와 같은 존재다. 병원에서 의사가 ‘간도, 위도, 장도 괜찮지만 폐암으로 죽습니다’라는 식으로 처방내리지 않는다. 사회과학의 기능은 조기 경보 장치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아무리 경제가 성장해도 사회가 양극화되어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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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 주혜진(북DB 기자)
사진 : 임준형(러브모멘트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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