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저자 안광복 인터뷰
※ 3단계의 점층적 형식으로 선보이는 ’프리즘 인터뷰’입니다. 삼각형의 틀을 통해 빛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프리즘처럼 작가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 기자 말
[프리즘①] 안광복의 말, 말, 말
- “철학하기는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보는 연습이에요. 일상에서는 너무 거대하거나 황당해서 묻지 못하는 물음을 묻고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 그게 철학인 것 같아요.”
- “철학을 해서 가장 좋은 건, 강해진다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문제가 경제나 권력으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나만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죠.”
- “IMF 이후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이 정리해고를 앞둔 50대 가장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요. 가늘고 모질게 살아남고 싶다는 것. 우리도 우리 시대의 위대함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켜야 해요.”
[프리즘②] 길거리에서 먹는 한정식
▷ 안광복은 누구 : 일상에서 철학하기를 실천하는 ‘임상철학자’. <철학, 역사를 만나다> <교과서에서 만나는 사상> <서툰 인생을 위한 철학 수업> <도서관 옆 철학카페> <철학자의 설득법> <열일곱 살의 인생론> 등 20여 권의 철학책을 쓴 작가다. 1996년부터 서울 중동고등학교에서 ‘철학교사’로 일하고 있다. 학생들이 부르는 별명은 ‘빨갱이’. 오해 마시라. 화나면 얼굴이 빨개져서 빨갱이다. 또 하나의 별명은 ‘철학자’. 철학자의 별명이 철학자라는 게 좀 이상하다. 수업하는 모습 때문에 생긴 별명이라 하는데, 수업 모습이 어떨지는 알 길이 없으니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 어떤 책을 냈나 : “미스터리다. 지금 보면 이렇게 재밌는데,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는 왜 그렇게 졸음만 쏟아졌을까.”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어크로스/ 2017년 개정증보판)에 대한 기자의 한 줄 평이다. 2007년에 나온 책을 10년 만에 고쳐 썼다. 그동안 30쇄 넘게 발행된 스테디셀러. 서양철학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철학자 40인의 삶과 사상이 망라돼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자 이야기만 나오는데도 재미있다. 사상보다 ‘사람’ 이야기가 앞서기 때문이다. 안광복 작가는 자신의 글을 ‘길거리 음식’에 비유한 적이 있다. 이 정도면 길거리에서 먹는 한정식 수준이다.
▷ 인터뷰 뒷이야기 : 3월 10일 서울 일원동 중동고등학교에서 안광복 작가를 만났다. 약속 장소인 학교 도서관에 가서 깜짝 놀랐다. 1922년에 개관해 역사가 100년에 가깝고, 장서도 3만 권을 넘는다고 했다. ‘이런 학교라면 고등학교를 다시 다녀도 좋겠다’는 생각이 살짝 들 뻔했다. 안광복 작가의 인터뷰는 네 글자로 압축된다. 즉문즉답. 무슨 질문을 할지 미리 다 알고 온 것처럼 고민하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핵심만 콕콕 짚어서 대답했다. 인터뷰를 하다보면 아무래도 인터뷰이에게 약간은 과도한(?) 칭찬을 하게 되는데, 안광복 작가에게 한 칭찬은 100% 진심이었다. 엄지 척.
[프리즘③] 일문일답 들여다보기
Q 철학자 40인의 약전을 읽는 느낌입니다. 사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애에 비중을 두고 이야기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모든 작가들은 자신에게 절실한 문제에 대해 글을 쓸 때 글이 잘 나와요. 그 사람의 일생에서 절실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 사람의 이야기가 더 잘 이해되거든요. 철학자의 절실함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의 생애에 주목해서 글을 쓴 거죠.
Q 2007년 초판 출간 이후 10년간 30쇄 넘게 발행되며 스테디셀러로 사랑받은 책입니다. 비결은 무엇이라고 자평하시나요?
잡다하지 않고 고갱이만 썼다는 것. 한 사람의 본질만 다루고, 철학자를 일반인으로 바라보려 했다는 것. ‘철학자도 사람이다.’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에, 스토리가 있으니까 재미있어서 독자들이 오래 봐주신 것 같아요.
Q 서양철학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40인의 철학자가 이 책에 망라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양철학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책은 뭐가 있을까요? 40권은 너무 많으니 세 권 정도만 꼽아주시면 좋겠습니다.(웃음)
첫 번째는 플라톤의 <국가>.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정의를 다룬 책이죠. 두 번째는 루소의 <사회계약론>. 현대 사회를 이루는 사상적 기초가 되기 때문에요. 마지막은 밀의 <자유론>. 인권의 기초가 되는 가장 중요한 저서입니다. 각각 민주주의, 사회계약, 인간본성을 다룬 이 세 권을 관통하면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서양 사상의 뿌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Q 철학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책 속에 몇 차례 나옵니다. 철학하기, 철학함, 철학공부를 한마디로 정의해볼 수 있을까요?
철학하기는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보는 연습이에요. 모든 것을 신기하게 새롭게 바라보는 거죠. 일상에서는 너무 거대하거나 황당해서 묻지 못하는 물음을 묻고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 그게 철학인 것 같아요.
Q 책 속에서 철학하기의 중요함을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그 필요성은 느끼지만 아직도 철학이 낯설고 어려운 초심자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첫 번째로 지적 지구력부터 키우는 거예요. 깊게 읽지 말고 오래 읽으라는 거죠. 철학책부터 보려 하지 말고 스토리가 있는 긴 소설을 보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몸과 영혼을 만드는 방법이죠. 인문학의 세 축을 문학, 역사, 철학이라고 하잖아요. 그건 인문학에 접근하는 순서이기도 해요.
두 번째로, 철학책을 보려면 ‘멈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요. 현대인들은 정보에 너무 많이 노출돼 있거든요. 정보중독 상태에 있으니까 오히려 깊은 생각을 못해요. 철학책을 읽고 싶으면 가만히 있는 훈련부터 하는 거죠. 도서관에 가서 눈을 감고 15분 동안 아무 자극 없이 버티는 거예요. 머리가 복잡한 상태에서 철학책이 전혀 머리에 안 들어가거든요.
철학책은 처음에 접근하긴 쉽지 않지만, 밥알을 입에 물고 있듯이 물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일상에서 쓰지 않는 정신의 근육을 쓴다는 상쾌함이 느껴져요. 물론 탈모라는 후유증이 있긴 하죠.(웃음) 철학을 해서 가장 좋은 건, 강해진다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문제가 경제나 권력으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만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죠. 정신의 강인함을 키워줄 수 있는 학문입니다.
Q 왠지 이 책에 등장하는 40인의 철학자들 가운데 ‘그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안광복이라는 사람을 철학자의 길로 안내한 철학자는 누구인가요?
철학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소크라테스를 꼽을 거예요. 철학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잘나가는 사람이 없어요. 아파야 할 수 있는 학문이 철학이거든요. 기존의 보편적인 학문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철학으로 가거든요. 소크라테스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못생긴데다가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굉장히 밝고 건강했던 사람이에요. 소크라테스의 건강함은 세상의 편견을 자기한테 덧씌우지 않은 것에서 나왔어요. 어린아이가 세상을 보듯이 본 거예요. 소크라테스는 권위에 주눅 들지 않았거든요. 그 삶 자체가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Q ‘대한민국에서는 무척 드문’ 철학교사로 만 20년, 햇수로는 21년째 살고 계십니다. 20년의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의외로 대한민국에서 철학교사는 굉장히 실용적인 교사예요.(웃음) 자기소개서와 면접에 대세가 되면서 입시와도 굉장히 밀접해졌거든요. 자기소개서를 쓸 때 던지는 물음은 굉장히 철학적인 것이거든요.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철학교사가 거기에 조언을 주는 경우가 많죠. 제가 대학교가 아니라 고등학교의 철학자인 것이 참 다행인 게, 저는 매일매일 어린 학생들을 만나면서 일상인이 갖고 있는 고민들과 맞부딪쳐야 하거든요. 고매한 사색의 세계에 사는 게 아니라 세상을 잘 볼 수 있는 위치라는 점에서, 철학교사는 철학하기에는 좋은 자리인 것 같아요.
Q 선생님이 전에 하신 다른 인터뷰 기사를 보니, 처음부터 철학교사를 꿈꿨던 건 아니었더라고요.
제가 되고 싶었던 건 고전문헌학자였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최고의 주석자. 유학을 가고 싶었는데, 사정 때문에 대안으로 선택한 게 철학교사였어요. 그래도 공부에 대한 욕망은 놓을 수가 없어서 작가가 된 것 같아요. 퇴근 후에도 책을 보지 않으면 제 삶이 너무 비참했어요. 저녁 8시 반에 잠들어서 새벽 2시에 깨고, 5시까지 세 시간 동안 책 읽고 글 쓰는 삶을 20년 가까이 살았어요.
3학년 담임을 하면서부터는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면서 공부했어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10시까지 남아서 아이들하고 같이 공부하고요. 지금도 주말에는 거의 도서관에서 살아요. 늘 ‘하루에 두 시간만 더 시간이 있다면 플라톤을 능가할 수 있을 텐데’라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면서.(웃음)
Q 고전문헌학자와 임상철학자는 공부의 방향도 좀 다를 것 같습니다. 고전문헌학자가 학문의 안쪽으로 끝없이 더 들어가야 한다면, 임상철학자는 학문의 바깥으로 그 성과들을 쉽게 전달하는 쪽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 같은데요.
대중한테 쉽게 글을 쓴다는 것은 대중을 깊이 연구하는 일이에요. 문헌이 깊이 있는 연구를 필요로 하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인 사람 하나하나도 아주 중요하고 재미있는 텍스트들이거든요. 제가 교사생활을 통해 배운 건 ‘세상에 단순한 문제는 없다’는 사실이에요. 사람 하나하나가 다 수수께끼 같은 거예요. 엄청난 실존적인 비밀들이 숨어 있어요. 심리학에 대한 관심도 깊어졌죠. 제가 학위는 철학으로 받았지만 상담심리도 공부하고 전문상담교사 자격증도 땄거든요. 제가 임상철학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일상인의 삶의 고민을 파헤쳐보고 싶은 열망이 있기 때문이에요.
Q 철학교사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선생님의 철학도 궁금합니다. 철학자 안광복의 화두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철학의 방향은 위대함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키는 거예요. IMF 이후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이 정리해고를 앞둔 50대 가장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요. 가늘고 모질게 살아남고 싶다는 것.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까. 잘돼봐야 살아남을 뿐인데.’ 모든 위대했던 시대는 시민들이 위대함에 대한 감각을 생생하게 느끼던 시대예요. 로마의 공정함, 보편성, 관용정신이 로마 시민들의 자부심으로 살아 있었거든요. 우리도 우리 시대의 위대함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켜야 해요.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 위대함이란 뭔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살릴 수 있을 것인지가 제 철학적 화두죠.
Q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대학 철학과는 줄줄이 문을 닫는, 참 이상한 인문학 시대입니다. 철학자로서, 교육자로서 이런 시대를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굉장히 평등해진 사회예요. 서울대를 졸업해도 실업자고, 연대나 고대를 졸업해도 실업자고, 다 실업자예요.(웃음) 남과 똑같은 길을 쫓아가면 대책 없는 결말을 맞을 뿐이거든요. 그렇다면 남다른 길을 가야 하는데, 남다른 길을 꿈꾸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에요. 굉장히 역설적이에요. 인문학을 하면 돈이 안 된다고들 하죠. 그럼 경영학을 하면 돈이 돼요? 공학을 하면 돈이 돼요? 의대를 간다고 뾰족한 수가 있나요? 일종의 과도기적 현상이죠. 모두가 평등해진 상황에서 나만의 특별한 것을 찾아야 하는 시기. 그 절실함이 인문학에 대한 집착을 낳은 겁니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인생 진도표가 통했어요.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들어가서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지금처럼 경제 정체기에는 그런 인생 진도표가 통할 수가 없거든요. 그럴 때는 자기만의 특별함이 있어야 하는데요, 그 특별함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나오거든요. 인문학을 하고 싶다는 학생이 있으면 주저 없이 하라고 얘기해주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후회라도 없잖아요. 후회 없는 인생이 성공을 만드는 거고요.
Q 2001년 <청소년을 위한 철학자 이야기> 이후 20여 권의 저서를 내셨습니다. 그 가운데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는 작가로서 선생님 개인에게 어떤 의미의 책인가요?
산업의 모래가 반도체이듯이,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는 제 모든 저작의 기초 원료가 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서 철학자 한 명 한 명을 그야말로 공부했거든요. 그것이 다른 책을 집필하는 데도 굉장히 큰 밑천이 되는 것 같아요.
Q <서툰 인생을 위한 철학 수업> 서문에서는 자신의 글을 ‘길거리 음식’에 비유하신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글쓰기가 갖는 최고의 장점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깊이 있는 먹거리를 먹을 수 있게 하는 에피타이저 역할이죠. 가볍게 건드리면서 지적 흥미를 일으키는 글. 철학작가로서 제 위치는 입문서 작가예요. 학생들이 제 책을 읽고 남긴 글들 중에 제일 반가운 글은 “이제 선생님 책을 읽을 단계는 지났습니다”예요. 그게 제가 할 역할을 다한 거죠.
Q 지난해 2월 북DB 청소년 독자들을 위해 책을 추천해주신 바 있습니다.(관련기사 : '1세대 철학교사' 안광복 추천! 새 학기에 읽을 책 10권) <도서관 옆 철학카페>와 같은 책도 내시고 독서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선생님이 책을 고르는 기준을 독자들에게 귀띔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냥 읽고 싶은 책을 읽어요. 서점하고 도서관을 정기적으로 가고요 우리가 음식의 영양 성분을 일일이 조사해서 먹지 않아도 먹고 싶은 걸 골고루 먹다보면 몸이 알아서 영양 균형을 맞추잖아요. 책도 마찬가지로 지금 이 순간 확 끌리고 읽고 싶은 책, 그게 좋은 책 같아요. 일단은 눈에 책이 보여야 책을 읽게 되기 때문에 서점을 자주 가야 돼요. 두 번째는 지하철을 탈 때 아무 책이라도 들고 타세요. 스마트폰과 이혼하는 것,(웃음) 그게 아주 좋은 독서법 같아요.
Q 철학교사로, 그리고 작가로 만 20년을 보내셨습니다. 앞으로 20년은 어떻게 보내고 싶으신지,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마흔다섯을 넘기면서부터는 자꾸 저한테 남은 시간을 계산하게 돼요. ‘내가 몇 년을 더 책을 쓸 수 있을까.’ 10년에서 15년 정도 글을 더 쓴다고 하면, 지금까지는 철학의 전도사로서 활동했지만 이제 ‘철학자 안광복’의 저서를 써야겠죠. 그게 뭐가 될지는 지금도 고민하고 있어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작업은 제 원래 소망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자’가 되는 거죠. 그리스 철학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문제의식을 심도 있게 탐구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는데, 될지 잘 모르겠어요.
취재 : 최규화(북DB 기자)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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