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재 삼국지> 저자 이희재 인터뷰
<이희재 삼국지>(휴머니스트/ 전 10권)가 세상에 나온 지 15년 만에 새 옷을 입었다. 삼국지라는 서사의 힘과 더불어 이야기를 간결하고 경쾌하게 전달하는 만화의 매력까지 더해져 가족이 함께 보는 고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3월 23일 서울 상계동 이희재 작가의 작업실에서 이희재 작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삼고초려’ 에피소드 하나만으로도 삼국지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며, 사람들이 삼국지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삼국지의 재미와 의미에서 시작한 대화는 만화의 매력과 한국만화의 가능성까지 이어졌다. 작가의 구성진 입담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구닥다리라는 평가를 듣지 않고 오래도록 사랑받을 작품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꾼’ 이희재 작가의 말에, 아직 읽지 않은 작가의 작품에도 신뢰가 느껴졌다.
Q <이희재 삼국지>가 처음 출간된 지 15년이 됐어요. 만화 삼국지를 기획할 때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셨는지 궁금해요.
만화는 수명이 짧아요. 문학이나 회화는 오랫동안 남는데 왜 만화는 금방 흘러가버리고 구닥다리라는 평가를 받을까, 50년 전 만화가는 왜 온데간데없는가, 하는 게 제 고민이었어요. 물론 만화가 시대 유행을 따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시대를 뛰어넘는 기법과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만화도 고전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Q 삼국지를 만화로 표현하려면, 어마어마한 내용을 선생님만의 색깔로 압축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을 것 같아요. 작업하면서 어떤 부분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300페이지에 서술된 스토리를 핵심만 남기고 압축하는 게 숙제였어요. 모두 걷어내고 원작의 핵심을 어떻게 인상적으로, 감동적으로 전달할 것인지가 고민이었죠. 이를 테면 관우가 화웅이라는 장수와 대결하는 장면이 있어요. 원작에서는 그 상황을 몇 장에 걸쳐서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거든요. 서너 장에 걸친 장면을 만화에서는 한 컷으로 표현하니까 상황 전개가 빠르죠. 구성 전개에서 속도감을 주고 싶었어요. 간결한 게 만화 매체의 장점이니까 그걸 살리고자 했죠.
Q 삼국지는 역자마다 인물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다르잖아요. 물론 모든 캐릭터가 각자 매력이 있지만 어떤 인물에 더 마음이 끌리셨는지 궁금하더라고요.
관우는 삼국지를 통해 아시아의 신이 되잖아요. 관우는 왕도 아니고 일개 무사지만 그가 보여준 인간적인 신의, 그리고 신의를 받쳐줄 실력, 용기와 담대함이 있거든요. 삼국지는 크게 보면 유비와 조조가 둘이 싸우고, 손권이 있는 거잖아요. 중국 민중들은 유비의 편에 있고 조조를 간웅으로 보거든요. 이런 편애에서 중국이나 대다수 아시아 사람들의 공통적인 정서를 읽을 수 있어요. 민중들은 소통할 수 있고 의로움을 갖춘 인물을 사랑했다는 것이고, 덕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다는 거죠.
“덕을 갈망하는 민중들의 마음이 관우를 신으로 만들었다”
Q 머리말에서 삼국지를 세상살이를 읽는 책이라고 표현하셨어요. 평소에 자주 떠올리는 에피소드나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사람들에게 한 가지만 얘기할 수 있다면 삼고초려 얘기를 하고 싶어요. 50세가 다 된 유비가 20대 제갈공명을 찾아가는 얘기잖아요. 유비는 반 년 동안 세 번이나 찾아가서 자기 소망을 얘기하고 무릎을 꿇고 자기 사람으로 만든단 말이에요. 유비는 사람을 취하는 데 온 정성을 다하는 거죠. 그런 정성이 통해서 만났을 때, 그 만남의 약속이 평생을 가잖아요. 이게 동양의 윤리예요. 삼국지는 삼고초려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봐요. 그런데 삼국지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삼국지는 싸우는 얘기,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냐는 이유인데요. 물론 싸우는 얘기지만 결국은 인간들의 이야기거든요. 그 속에서 세계를 만나고 사람을 배우는 거죠.
Q 만화 ‘악동이’로 유명하신데, 요새는 명랑만화를 안 그리시나요?
삼국지를 끝내고 어린이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아이코 악동이’라는 만화를 연재했어요. 아이코가 거울을 통해 다양한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인문학적 이야기를 만나는 내용이에요.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그때 권정생 선생님이 같은 잡지에 ‘랑랑별 때때롱’이라는 동화를 연재했는데, 아이코가 훨씬 인기가 많았죠. 만화에는 권정생 선생님도 안 돼요.(웃음)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걸 단행본으로 내놨을 때 ‘아이코 악동이’보다 ‘랑랑별 때때롱’을 훨씬 많이 읽는 거예요. 이유를 보니까, 부모들이 동화는 교육적이고 만화는 웃기는 거라고 생각하고 ‘아이코 악동이’는 안 사주는 거예요.
기창덕 선생님의 ‘꺼벙이’라는 만화가 있어요. 그것도 무척 인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부모들은 공부하는 책이 아니라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즐겁게 해준다는 게 얼마나 큰 요소예요? 즐거움이 공부나 학습보다 더 상위의 것일 수 있어요. 학습이라는 게 기존의 가치관과 충돌하면서 진보하는 건데, 아주 엄격한 잣대로 색다른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경직돼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런지, 저는 학습만화라는 말이 불편해요. 공부만 하는 게 좋은 건가요? 인생은 재미있게 살아야 하고, 공부는 즐겁게 사는 지혜를 깨우치는 게 돼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학습만화는 내게 감동을 주고 인생에 영향을 주고 나를 지배하는 이야기겠죠. 학습만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요.
Q 예전에는 만화에 대한 편견과 비하가 많았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좀 바뀌지 않았나 싶은데요, 그런 변화를 느끼시나요?
만화를 지금은 웹툰이라고 해요. 대중을 만날 수 있는 출구가 출판의 형태에서 웹 형태로 바뀐 거죠. 2014년에 네이버 ‘도전 만화’ 코너에 등록한 만화가가 8만 명이에요. 물론 프로는 아니지만 만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 그 정도인데, 지금은 더 많아졌겠죠. 웹툰 작가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만화의 가능성이 열리면서 만화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사랑받는 매체가 됐어요. 70년대에는 만화라는 매체가 검열, 징계의 대상이어서 아동만화만 그릴 수 있었거든요. 지금은 오히려 아동만화를 보기가 어려워서 만화가들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학습만화라는 말 불편... 공부는 즐겁게 사는 지혜를 깨우치는 것”
Q 이전에 출판 형식의 작품을 하던 만화가들은 이 변화를 힘들어하는 분도 많은 것 같아요. 80, 90년대 만화 전성기가 있었는데, 그때 활동하던 분들은 지금 보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건 적응을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예요. 출판이냐 웹툰이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고요, 자기가 해온 방식만 고집하는 거죠. 익숙한 것과 결별하기 싫어서 옛날 얘기만 하는데 그게 꼰대인 거죠. 나이 든 사람도 미래를 얘기할 수 있고 선도해 나갈 수 있단 말이에요. 물론 오랜 세월 지혜가 축적된 과거의 형식이 가진 장점이 있어요. 그런데 디지털 작업의 장점도 분명 있거든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 하고, 그건 윗세대가 공부해야죠.
Q 만화 독자로서 한국 만화도 보지만 일본 만화도 보거든요. 물론 만화산업의 규모라든지 지원정책도 다르니까 결과물도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한국 만화는 일본 만화에 비하면 천편일률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원로 작가로서 쓴소리 해주신 김에, 한국 만화에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일본 만화가 20세기에 맹렬하게 발전을 했어요. 만화의 영토는 지금 일본이 가장 크고요. 그러니까 일본 만화가 발전할 때 훌륭한 스토리 작가, 연출가들이 모인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다채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거죠. 100년 동안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고 만화 영토가 넓어지면서 지금 이만큼 커진 거거든요. 우리는 그에 비하면 영토도 적고 인구도 적고 산업 규모도 적어요. 그래서 저는 사실 한국 만화 발전을 회의적으로 봤어요.
그런데 최근에 웹툰을 보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웹툰으로는 이미 일본을 따라잡았죠. 네이버 만화 코너에 10만 명 가까운 사람이 있잖아요. 인재들이 쏠리고 있다는 거죠. 아마 수많은 분야의 인재들이 웹툰으로 물결처럼 몰려들 거라고요. 그런 걸 생각하면 한국 만화도 일본 만화 못지않게 더 다채롭고 풍성한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Q 수전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어려움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는지 또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하고요, 마지막으로 계획하고 있는 작품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제가 소심해요. 좋게 얘기하면 섬세하고.(웃음) 처음에 만화 배울 때 연필로 그릴 때는 안 떠는데 펜으로 그리면 떨어요. 이게 인쇄돼서 지울 수 없다고 생각하면 긴장이 돼서 손이 떨려요. 그래서 그림을 못 그린다는 평가도 들었는데, 만화가로서 내 개성을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체질적으로 손을 떨 수밖에 없고, 그래서 다른 작가들처럼 매끄러운 선을 그리기 어렵다면 아예 떨리는 선을 내 선으로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자기 꼴대로 사는 게 자연스럽다는 생각에, 선이 떨리는 걸 약점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개성으로 여기자고 한 거죠.
작가로서 현실을 제쳐놓고 이야기를 만든다는 게 공허해서 현실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만화는 또 현실을 넘어서기 때문에 만화인 거잖아요. 그 대단한 만화의 장점을 버릴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 그리고 있는 ‘사기열전’도 역사지만 인물로 접근을 하는 거고요. 이 작품이 끝나면 일제강점기 광주학생운동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지금은 잊힌 과거 이야기를 복구하는 게 문화예술의 역할이라고 보고, 만화가로서 그걸 해보고 싶어요.
취재 : 정윤영(북DB 객원기자)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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