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터파크 북DB Apr 10. 2017

한지를 닮은 화가 전수민 “그림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

저자 전수민 인터뷰 




전수민은 전통 한지와 우리 재료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미대에 들어갔다. 그 후로는 탄탄대로였다. 짧은 시간에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초대전을 포함해 10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열며 독특한 한국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학창 시절 희곡으로 큰 상을 받아 국문과 특차를 준비했을 정도로 글쓰기에도 남다른 재능을 가진 전수민은 지난해 <이토록 환해서 그리운>에 이어 최근 두 번째 에세이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새움/ 2017년)을 펴냈다. 화가가 되기 전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사람들은 정신과 치료를 권유했을 만큼 독특한 감성과 개성이 넘치는 그녀의 면모는 이번 책에서도 그대로 배어난다.


지난해 8월 베니스 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선정돼 떠나는 날 시작되는 에세이는 기이하게도 한 편의 ‘유서’다. 베니스 도착을 앞두고 뮌헨 공항 근처에서 테러가 발생해 비행기가 무한 연착하는 상황에서 전수민은 남동생에게 유서를 쓴다. 사실 ‘언제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때부터 남모르게 매년 유서를 써왔던 그녀였지만, 이번 유서는 좀 남달랐다. ‘어쩐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밀려왔기 때문이다.

 
마르코폴로 공항 도착 전 경유지인 뮌헨 공항에서 8시간을 연착한 후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베니스에 도착한 그녀는 그곳에 머무는 한 달 동안 매일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 죽음에 대한 예감이 너무나 생생해 매일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 하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고, 한 달간 쓴 편지는 누군가에게 배달되는 대신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누군가가 받아보는 걸 가정한 편지 형식이어서일까.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에세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소설 같은 느낌을 준다. 비유를 하면, 베니스에 머무는 한 젊은 예술가가 여주인공인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같다고 할까. 책의 기저에는 온통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본인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될 정도로 굉장히 심각한 상황인데도 전수민 특유의 통통 튀는 감성과 글 솜씨 덕분에 말간 수채화를 보는 것처럼 경쾌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사춘기 소녀도 아닌데 “곧 죽을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떠는 감성에 살짝 당황스럽다. 하지만 자신은 ‘밥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며 베니스에서 쌀을 사서 꼬박 삼시세끼 밥을 해먹고, 관상학과 수상학, 음양오행을 공부한 이력을 접하면 어느새 ‘이 사람 도대체 누굴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책을 덮을 즈음,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온통 빛으로 범벅된 도시” 베니스에 갈 때는 이 책을 꼭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에 이른다.



“한지는 ‘스며듦’... 오묘하게 우러나는 맛이 꼭 사람 같아”



Q 해외 초청까지 받은 촉망받는 화가의 에세이에 온통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네요. 어찌된 일인가요?(웃음)


고등학교 때부터 제 취미가 매년 유서를 쓰는 것이에요. 언제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처음 쓰게 됐는데,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더 열심히 살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나름대로 죽음에는 단련이 돼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16년은 참 이상했어요. 진짜로 곧 죽을 것만 같은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니 화가로서도 많은 것들을 성취하고, 처음으로 책도 내는 등 인생에서 변화가 많이 온 시점이라 그 기류가 낯설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작년 새해에도 여느 해와 다름없이 유서를 썼는데, 제가 10년쯤 걸릴 거라 생각했던 목표들이 3~4년 만에 다 이뤄져 있는 거예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뭔가 더 이상 하고 싶은 게 없으니까 죽을 때가 됐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베니스에 갈 때도 이상한 게 많았어요. 해외로 나갈 때면 매번 남동생이 배웅을 했는데 그땐 그러지 못했고, 이탈리아에 갈 상황도 못 됐는데 공교롭게도 한 가지씩 문제가 해결되는 바람에 떠밀리듯 간 거거든요. 출국 날에는 공항 근처에서 테러가 발생했고, 베니스에 머물 때는 숙소 근처에서 지진이 나 관광객들이 많이 죽었어요. 이렇게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닥치다 보니 죽음이 마치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하루 자고 일어나면 죽음이 하루 연기된 것 같은 느낌으로 한 달을 살았어요.


Q 그런 느낌 때문에 매일 글을 써서 이 책도 나오게 됐는데요. 베니스에서 보낸 한 달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 듯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할까요. 한 달 내내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예술가의 목숨을 귀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내 자신이 아니라 내가 남겨야 하는 것들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쓰게 된 거예요. 예술가는 죽고 나서도 작품이 남잖아요. 사람들이 내 작품을 찾다 보면 자연스레 그 시기의 내 삶에 대해서도 알게 될 거란 생각에 이르자 제 삶을 잘 정리할 필요성을 깨달은 거죠.


사실 원래는 이런 인터뷰 같은 것도 어색해서 안 좋아했어요. 그런데 이젠 차차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차피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뭐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베니스를 기점으로 좀 더 자신감을 얻고 세상으로 한 발짝 나아가게 된 것 같아요.


Q 이런 삶이나 태도 외에 그림 작업에서도 영향을 받았나요?


감정의 변화가 화가들에게 영향을 많이 줘요. 그림이라는 게 화가가 본 이미지를 감정으로 승화시켜 표현하는 거잖아요. 제가 느낀 베니스는 그 자체가 빛의 범벅이었어요. 햇빛이 물에 반사되고, 건물과 건물이 마주 보고 반사가 돼요. 앞이 안 보였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떴을 때 환하게 펼쳐지는 느낌, 동굴 속을 빠져나갈 때 빛이 확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들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베니스에 다녀온 직후에 그린 그림들은, 그 전에 그린 그림들보다 굉장히 밝아졌어요. 저는 발표하는 작품은 늘 한지에 작업을 해요. 한지가 스며드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켜켜이 쌓다보면 색이 무거워지고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부분을 극복했어요.


Q 특별히 한지에 작업을 하는 이유가 있나요?


한국화니까 무조건 한지를 고집하는 건 아니고요. 여러 가지 사용해본 재료 중 제가 표현하고 싶은 작품 세계를 가장 잘 구현하기 때문에 한지를 주로 사용하고 있어요. 캔버스는 종이 위에 그림을 덧칠해 올리는 형식이라면, 한지는 스며듦이거든요. 오묘하게 우러나는 맛이 있는데, 그게 꼭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양화가 겉을 치장하는 느낌이라면, 한지에 그리는 우리 그림은 사람의 내면을 계속 다스리는 것 같은 느낌을 줘요.


물론 사명감도 있어요. ‘천년 종이’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 한지의 우수성이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뛰어나거든요. 해외 전시회에 자주 나가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에게 한지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 공부를 계속하고 있어요.


Q 작품 속에 해와 달을 비롯해 늘 풍경을 담는 이유도 궁금합니다.


풍경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요.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똑같이 볼 수 있는 존재잖아요. 그 풍경 안에 해와 달을 넣는 것은 신비롭기 때문이에요. 저는 종교는 없지만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세상이 눈앞에 보이는 물질만 중시하고 정성이 많이 들어간 게 등한시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 세계가 전부라는 인식 때문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여기서 착하고 따뜻하게 산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는 또 다른 신비로운 세계가 있다고 믿어요.


제 그림은 늘 그런 세계를 탐구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세계를 표현할 때 어디서나 본 것 같지만 어디에도 없는 풍경을 그립니다.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을 그리는 이유는 너무 거부감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면 해서예요.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고 신비로우면서도 친근하다고 하는 건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Q 첫 번째 책의 표지에 실린 ‘기적’이란 그림은 배우 박해일씨가 소장한 것으로 유명하더라고요.


저는 SNS의 가장 큰 수혜자예요. 지방 대학을 나왔고, 집이 부자도 아니고, 여러 가지로 열악해서 작가로 살아나가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우스갯소리로, 다 되는데 돈만 없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되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SNS를 시작했어요. 부지런히 저를 알리고 있죠. 사실 처음엔 소위 ‘스폰서’라 불리는 사람들로부터 유혹을 많이 받았어요. 너무 궁핍한 상황에서는 혹하기도 했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았죠. 그런 유혹을 여러 차례 뿌리치니까 SNS에서 말없이 저를 지켜봐주셨던 분들이 그림을 사주시더라고요.


박해일씨도 어떻게 보면 SNS가 맺어준 인연이죠.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가수 강산에씨 소개로 만났거든요. 박해일씨를 처음 만났을 때 제 글이 많이 들어간 도록을 드렸는데, 그걸 세 번이나 완독했다고 하더라고요. 이 외에도 많은 유명 인사들이 제 작품을 사가셨는데, 공개하는 걸 개의치 않는 분들도 계시고 꺼리는 분들도 있고 그래요.




“정성 많고 느린 것을 등한시하는 세상... 오래 들여다보는 것은 기다리는 것”


Q 2016년에 이어 불과 1년 만에 두 번째 책을 냈어요. 이번 책은 어떤 것에 중점을 뒀나요?


첫 번째 책은 5~6년 동안 꾸준히 써왔던 글 가운데서 추렸어요. 미술을 하기 전부터 글을 계속 써왔거든요. 첫 번째 책은 사실 목표가 뚜렷했어요.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위로와 여유를 느꼈으면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책은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한다기보다는 내가 쓰고 싶은 걸 쓰고 싶었어요. 그림 그리는 사람도 똑같거든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게 아니라, 예술가들 역시 보통의 일상을 즐기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걸 솔직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Q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정성이 많고 느린 것들을 등한시하는 세상이 됐잖아요. 이 제목 때문에라도 오래 들여다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오래 들여다본다는 건 계속 그것만 본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말하자면 잊어버리는 것도 오래 들여다보는 거예요. 정성이 많고 느린 것들 중 농사가 있잖아요. 농사를 지을 때도 모심기 해놓고 계속 보진 않잖아요. 기다리는 거죠. 오래 들여다본다는 것 자체가 기다리는 거예요. 잊어버린 것처럼 기다리는 거. 그런데 기억하고 있는 거.


결국 기다림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에요. 또 그림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요. 제 그림에 그런 메시지를 많이 담고 있어요. 제 성향이나 작업 방식도 그렇고요. 그렇게 오래 있다 보면 빨리빨리 했던 것은 다 떨어져나가고 결국은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것만 남더라고요.


Q 예술가가 자신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화가이고, 글로 표현하면 작가인데요. 그림과 글은 어떻게 다른가요?


글은 써 있는 대로 읽으면 되는데 그림은 보는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요. 말하자면 그림은 뭉뚱그리면서 얼버무릴 수 있는데 글은 그럴 수가 없죠. 화가가 컵을 그려놓고 화분이라고 하면 컵이라고 말한 사람이 오히려 ‘아 미안’ 이런 반응을 하거든요. 하지만 글에서는 컵이라고 쓰고 화분이라고 우길 수가 없잖아요. 서로 다른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예술가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부분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면, 글은 자신의 생각을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책은 한 달 간의 베니스 생활을 기록한 에세이잖아요. 이렇게 한 주제에 관해서 깊이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느꼈어요.


Q 여러 직업을 거쳐 뒤늦게 그림 공부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바닥까지 망했기 때문이었어요. 그 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사는 방식대로 너무나도 충실히 살았거든요. 대학 나와서 졸업 전에 취업하고 따박따박 단계 밟으면서요. 그랬는데 망했단 말이에요. 아버지가 하시던 일이 잘 안되면서 어느 날 신용불량자가 됐어요. 회사도 더 이상 다닐 수도 없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할아버지 할머니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고요. 또 제 신용으로 도움을 줬던 절친마저 연락을 끊고 사라졌고요.


3일 동안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엉엉 울었어요. 너무 억울한 거예요. ‘앞으로 어떡하지.’ 그때 불현듯 내가 뭘 하며 살고 싶었는가 생각해보니 못했던 그림이 생각났어요. 그림 그리고 글 쓰는 걸 너무 좋아했지만 가난한 농촌에서 그림 공부를 하겠다는 건 꿈도 못 꿨어요. 글 쓰는 건 돈이 안 드니까 이쪽으로 해볼까 해서, 큰 공모전에 희곡이 당선돼 대학 특차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어요. 그런데 수능 보는 날 몸이 아파서 시험을 망치는 바람에 그 꿈도 좌절됐고요.


결국 전문대학 문헌정보학과에 들어갔어요. 처음 그림을 다시 시작했을 땐 일요일에만 동네 미술 학원에 다녔어요. 그러다가 학원 원장으로부터 공부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듣고 편입을 알아봤죠. 그런데 입시 미술을 공부한 지 10일 만에 기적처럼 합격을 한 거예요. 밤낮으로 일해 집안 빚도 갚고 학비도 마련하면서 어렵게 학교를 마쳤어요.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정성을 많이 들여서 느리게 가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건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또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어딘가로 떠나봐야 알 수 있는 거지만,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이 그 여정에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 인터파크도서 북DB www.book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 원문 보기


▶ 북DB 바로 가기

▶ 북DB 페이스북 바로 가기

매거진의 이전글 프로불편러 위근우 기자 “당신만 불편한 게 아닙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