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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Apr 14. 2017

세월호 3주기, 문학의 자리를 묻다①

저자 김탁환, 문동만, 안희연, 오은 인터뷰 


2014년 4월 16일, 인천항을 출발해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이 맹골수도 바다에서 침몰했다. 선장과 승무원은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라고 말하고 자신들의 몸만 피신했다. 295명이 사망했고, 9명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희생자에 수학여행을 떠나던 안산 단원고 학생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안타까움은 더 컸다. 정부의 대응은 의혹과 분노만 남겼고, 위로받아야 할 유가족들은 거리에서 투쟁을 해야 했다.


세월호 3주기를 열흘 앞둔 4월 6일 문학인들이 모여 지난 3년을 이야기했다. 이토록 거대한 비극 앞에서 문학은 어떤 질문을 품고 어떤 반응을 했을까?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문학의 자리를 되물어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참여 작가 : 김탁환 소설가, 문동만 시인, 안희연 시인, 오은 시인
진행 : 북DB 주혜진 기자



김탁환 “세월호는 진실을 밝히려는 세력과 은폐하려는 세력 간 치열한 싸움의 장이었다” 

북DB : 3월 22일부터 세월호 인양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3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서야 수면 위로 올라온 세월호의 선체를 본 감회를 듣고 싶습니다.


오은 : 공교롭게도 박근혜가 내려오니까 세월호가 올라왔잖아요. 그동안 세월호를 인양 못 한 게 아니라 안 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3년이 굉장히 아득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박근혜 정권이 계속됐다면 여전히 세월호는 바닷속에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화도 나고 어처구니도 없고 아찔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안희연 : 저 역시도 세월호 인양을 지켜보면서, 그간 세월호를 인양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다는 생각에 무척 화가 났습니다.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온종일 마음을 졸였는데, 동물 뼈로 밝혀져서 안타깝기도 했고요. 하루빨리 미수습자들이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김탁환 : <거짓말이다>를 쓸 때가 작년 8월인데 해양수산부는 작년 여름에 충분히 올릴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계속 눈치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선박 사고는 중요한 증거인 배를 최대한 온전하게 인양하는 게 중요한데요. 세월호에 구멍이 140개나 뚫려 있었대요. 그렇게 큰 여객선은 보통 배가 넘어가도 침몰하는 데 여섯일곱 시간 정도 걸려요. 그런데도 세월호는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넘어가 버렸어요.


여러 가능성 중 하나가 물이 빠르게 배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인데, 이것은 배 어딘가에 혹시 구멍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듭니다. 배를 온전하게 인양해서 구멍이 실제 있었는지를 샅샅이 조사하는 게 중요했는데 해양수산부나 정부는 그런 조사 자체를 아예 막고 구멍이 있었는지조차도 모르게 만든 상태로 배를 올렸어요. 저는 이것이 정부가 세월호를 바라보는 태도라고 봐요. 구멍 뚫린 배의 모습을 보며 ‘세월호가 진실을 밝히려는 세력과 은폐하려는 세력의 치열한 싸움의 장이었고, 그 증거가 저 배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문동만 : 며칠 전 신문에서 세월호 희생자인 박수현군의 아버지인 박종대씨가 쓴 기고문을 읽었어요. 그분들의 고통스런 심정도 심정이겠지만 유족들이 배의 인양 시점마저도 합리적 의심을 던져야 하는 고백이 참 안타까웠어요. 수현이는 우리가 동영상으로 본 B-19 창문에서 구조를 외치던 그 학생 중의 한 명이었어요. 해경이 유리창 한번만 깨주면 살 수 있었던. 직관적으로나 드러난 근거상으로 침몰부터 구조의 순간, 사건을 해결하는 모든 방식이 은폐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선 충분히 확인했던 것 같아요. 배가 침몰할 때 선미만 남겨놓고 간당간당하니까 참 미치겠던데요. 선원들과 해경과 청와대를 보면 ‘어떻게 하면 최선을 다해 구하지 않을까?’를 궁리하고 실행하는 세력들 같았어요.


게으르나마 세월호에서 눈을 뗀 적은 없지만 막상 녹슨 배를 인양하니까 감정적으로 덤덤했어요. 그래서 녹슨 배라는 이미지로 어떤 시를 쓸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이게 쉽게 써지지 않더군요.

 

북DB : 세월호 참사 이후 작가들에게선 문학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짙었습니다. 사고 당시로부터 3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작가님들의 내면에 여러 기억과 생각이 쌓였을 것 같습니다. 


오은 : 저는 한동안 ‘가라앉다’라는 단어를 쓰질 못하겠더라고요. 심지어 저 단어를 무심코 산문에 썼다 화들짝 놀란 적도 있어요. 퇴고할 때 백스페이스를 눌러서 저 단어를 부러 찾아 지우곤 했어요. 지금도 여전히 바다와 관련된 이미지를 언어로 형상화할 때, 물과 관련된 단어를 쓸 때 적잖은 노력이 필요해요. 


세월호 사태가 터진 날, 저는 진은영 시인이 교수로 있는 한국상담대학원에 특강을 갔었어요. 강의 시작 전 세월호 사고가 났다는 얘기를 들었고, 쉬는 시간에 전원 구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런데 두 시간 후 강의가 끝나고 보니 그게 사실이 아니었던 거예요. 원래는 강의 마친 후에 진은영 시인과 밥을 먹기로 했는데 둘 다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어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직까지도 그날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요. 세월호 관련해서 관련자들에게 당일 행적을 묻는 청문회가 있었을 때 다들 입을 맞춘 것처럼 기억이 안 난다고 했잖아요.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1분 1초를 다 기억할 수 있을 만큼의 촘촘한 시간일 텐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에요. 


안희연 : 저는 한동안 물에 대한 공포가 극심해서 물을 잘 못 마셨어요. 시가 너무 무용하다는 생각에 괴로웠고요. 참사 이후 한동안 말의 빈사상태를 겪다가 차츰 더듬거리며 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그 후론 무엇을 쓰든 죄책감과 무력함에 대한 고백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세월호를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물속의 이야기가 되고 아이들의 이야기가 되고 그 시간을 무력하게 들여다보는 저에 대한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그 사이 첫 시집을 묶었는데, 결국 거대한 죽음에 바쳐지는 시집이 되었어요. 세월호 이전에도 죽음에 천착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았고, 제가 시로 써내려갔던 죽음들에도 여러 색과 결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세월호를 연상하시더라고요. 그렇게라도 유가족분들, 세월호의 슬픔에 곁을 내어주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동만 : 저는 살면서 개인적 인연에 대해서, 시대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추모시를 여러 번 쓸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때마다 저는 대부분 청탁을 받아서 썼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제가 자발적으로 터지는 분통을 어떻게 하지 못해서 쓴 시가 ‘소금 속에 눕히며’였어요. 2014년 4월 19일에 시를 쓰기 시작해서 초고를 완성하는 데 두 시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5월 8일에 한겨레 지면에 발표했어요. 작가들은 ‘그 참상을 어떻게 시로 쓰느냐’는 자탄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저는 그걸 해야겠더라고요. 제 몸이 스스로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겠다는 생소하지만 강렬한 느낌은 처음이었습니다. 시를 쓰다보면 울기도 하는데 워낙 참사의 내용이나 제 감정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가장 길게 울며 떨며 썼던 것 같아요. 


제 혈연을 잃었을 때 시를 몇 편 쓰기도 했지만, 세월호 때는 전과는 다르게 분노감, 열패감, 한스러움, 죄스러움이 섞인 채로 시를 썼고, 10회 이상 마이크 들고 대중 공간에서 가장 많이 낭송을 한 것 같아요. 2014년 4월과 5월에는 세월호 관련한 시를 여러 편 썼는데 이상하게 그 다음부터는 잘 못 쓰겠더라고요. 진이 빠져서인지, 엇비슷한 정서로 중언부언하기 싫어서인지. 격정이 컸던 시절이어서 감정도 시간에 깎이고 파고를 겪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김탁환 : 지난 3년을 생각해보면 참사 전에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만났고, 만나는 방식도 엄청 진했어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하루만에 상대가 날 믿고 자신의 존재를 다 드러내는 경우는 흔하지 않으니까요. 김관홍 잠수사도 만나서 자기 얘기를 다 하니까 처음에는 되게 당황했어요. 상황이 급박하니까 이 사람이 우리 편이다 싶으면 바로 밀착해서 자기 이야기를 다 하고 그럼 저도 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참사를 겪으면서 자기가 고민했던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데 저에겐 답이 없는 거예요. 그 질문을 이해하는 것과, 새로운 존재의 사람을 잘 만나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제가 계속 세월호 관련 소설을 쓰는 밑받침 중 하나는 일단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에요. 희생된 304명 개개인의 이야기가 있고, 3년 동안 진상규명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희생자 유가족 분들도 서로 만남이 엄청 진해요. 처음 초대받아서 저녁 먹으러 갔을 땐 ‘밥 먹고 빨리 나와야지’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면 자정 전엔 집에 못 와요. 아이 방에 가서 아이 사진 꺼내놓고, 아이가 살아 있을 때 받은 상장 같은 것들도 꺼내놓고 하나씩 설명하거든요. 그럼 대여섯 시간은 휙 지나가요. 굉장히 힘들고 피곤해져 있는 상태에서도 아이가 죽기 전에 자기에게 행복을 줬던 순간들을 얘기 할 때는 부모님들이 눈도 반짝반짝 하고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죠. 


그걸 보면서 이야기꾼으로서 제가 생각한 건 이야기 판에서는 생사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이야기를 할 땐 마치 그 아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되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시간이 지나고 나서 어느 순간에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거짓말이다>나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는 저에게 공동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의 이야기와 제가 상상한 것들이 합쳐져서 조금 더 나아가는 것 같아요. 



오은 “생일시는 죽은 아이가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세월호는 다시 글 쓸 수 있게 된 이유” 


북DB :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생일에 시인들은 그 아이의 부모님과 친구들, 주위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생일시’를 짓기도 했어요. 


김탁환 : 저는 생일시 모임에 두 번 참여했어요. 왜 생일 모임 같은 걸 할까 생각했었는데 유가족들이 제일 아플 때가 크게 보면 두 번이래요. 한 번은 당연히 4월 16일 날, 그날은 함께 불행한 일을 당했으니까 유가족들도 함께 하면서 견디는데 아이 생일은 개별적으로 각자 다 다르잖아요. 그래서 부모들은 생일 날에 더 아픈 거죠 그날이. 그러니까 치유공간 이웃 정혜신 선생님, 이명수 선생님을 비롯한 치료자들이 그날은 혼자 있지 말고 다들 모여서 온전히 그 아이만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 거죠. 


아이들이 갖고 있는 물건들을 다 꺼내놓고, 아이의 친구들이 와서 죽은 아이에 대해서 얘길 하거든요. 그런데 부모님은 하나도 모르는 얘길 해요. 사실 저도 부모지만 애가 어떻게 사는지 모르잖아요. 우리 애는 이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들이 와서 막 얘기를 해요. 그러면 무척 위안이 된다고 하고, 그때 하이라이트가 생일시죠. 생일시를 슬라이드에 띄워놓고 모인 사람 전부 시를 같이 읽으면 울음 바다가 돼요. 그걸 보면서 시인들은 대단하구나 느꼈어요. 


오은 : 세월호 사태 이후 저는 한동안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산문보다 유독 시를 쓰기가 힘들었어요. ‘이런 상황에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컸던 것 같아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제가 다시 또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도 세월호 사고 때문이었어요. 저는 6월 6일이 생일인 이지민양의 생일시를 쓰게 되었는데요. 지민양 부모님이 지민이 사진이나 지민이에 대한 친구들의 말, 카카오톡 주고받은 것 하나까지 모아서 엄청난 양의 자료를 보내주셨어요. 처음에 생일시라고 불리는 것을 받아서 보니까 이건 시라기보단 어떤 이야기, 죽은 아이가 부모님께 “나 여기서 잘 있어요”라고 말하는 편지에 더 가깝더라고요. 저는 한동안 지민이가 된 채 보냈어요. 한 번도 그렇게 길게 시를 써본 적이 없었는데, 나중에 완성하고 보니 A4 용지 여덟 장을 썼더라고요. 


지민이 생일 파티 자리에서 부모님과 친구들이 긴 시를 나누어 읽으면서 펑펑 우셨다고 해요. 읽으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는 말을 전해 들었어요. 그때 생일시는 왜 길어질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시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지 깨달았어요. 나중에 지민이 부모님께서 제게 연락하시곤 그때 고마웠다고 나직이 말씀하시는데 통화하다가 저도 모르게 펑펑 울었어요. 그런 시기가 지나고 난 뒤에야 저도 다음을 다잡고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동만 : 아이러니하게 ‘미수습자 가족’들은 ‘유족’이라고 불리워지기를 가장 소원한다는 것과 비슷한 얘기 같기도 해요. 오은 시인 얘기처럼 내가 뭔가 글을 써서 혹은 제문을 읽어서 치유가 되는 과정을 저는 개인적 경험에서 느껴본 적이 있거든요. 사람이 죽으면 천도제 같은 걸 지내잖아요. 스님이 불경도 외고, 처사가 와서 주문도 해요. 살아 있는 망자의 목소리로 빌려 산 자에게 메시지를 주기도 하지요. 이를테면 캐릭터가 돼서 우리에게 무슨 얘기를 해요. 그런 의식이 치유의 힘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오 시인이 얘기한 생일시의 체험이 공감이 되네요. 


안희연 : 저도 생일시를 썼고 치유공간 ‘이웃’에도 다녀온 적이 있어요. 생일모임이 끝나고 나서 아이 아버님께서 제게 그러시더라고요. 우리 아이가 정말 저렇다고. 진짜로 우리 아이가 말하는 것 같았다고. 그 말을 듣는데 제 안에 어떤 부끄러움이 크게 자리하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시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상태였거든요. 치유공간 ‘이웃’을 이끄는 이명수 선생님께서도 “시가 본인 생각보다 귀하게 쓰이지요?”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부정을 못하겠더라고요. 아이 부모님의 표정이, 말투가, 너무나 진실했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생일모임이 끝나면 아주 정성스럽게 생일 앨범을 제작해서 우편으로 보내주시는데, 앨범을 받고 나니 더욱 실감이 나더라고요. 생면부지의 존재인 제게도 이렇게 애틋한데, 아이 부모님께서는 얼마나 더 애틋하셨을까요. 생일시를 쓰는 과정은 무척 힘겨웠지만, 그 뒤론 시의 힘을 더욱 믿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글 : 주혜진(북DB 기자)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 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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